소설리스트

회귀가왕-245화 (245/280)

제245화

“착각이 지나쳐. 너희들 이거 봤어?”

제롬이 종이를 펴서 보여주었다.

도박사들이 글로벌 비전 우승에 건 배팅을 토대로 나온 등급을 보여준 통계였다.

확인하자마자 내 표정이 구겨졌다.

“아니, 이건 너무한 거 아냐?”

제롬은 A급,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물론, 루비아이나 배로니스 메이어스 같은 우승 후보는 S급이었다.

심지어 베이즈 같은 아시아 인기 밴드도 A-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우리는 D등급이었다.

‘C도 아니고 D급이라니.’

제롬이 종이를 눈앞에서 흔들었다.

“봐라. 최약체 팀으로 평가받는 주제에, 뭔 깡으로 배로니스 메이어스가 걱정되느니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돌아갈 비행기 표나 끊어 두라고.”

바로 제롬은 어딘가로 사라졌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D등급이라는 도박사들의 평가에 놀랐기 때문.

일반적으로 도박사들은 가장 정확하다.

자기 돈을 걸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돈은 지키려 하지 않는가?

그런 그들이 우리를 이렇게 낮게 평가했다.

가장 객관적인 평가란 뜻이었다.

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왜 등급이 이렇게 나왔을까요? 말론에게 한번 물어볼까요?”

배영웅 매니저가 대답했다.

“물어봐도 잘 모를 거예요. 말론도 지금은 배에 있지, 바깥 상황은 잘 모르니까요.”

“저는 지금껏 나름 글로벌 팬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낮은 등급을 받으니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배영웅 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저희가 받은 데이터에 따르면 저희 화제성은 전제 128개 팀 중 4위예요.”

“4위?”

그건 우승 후보급 아닌가?

“그걸 좀 다르게 해석한 거 같습니다.”

“다르게 해석을요?”

배영웅 매니저와 함께 기사와 인터넷 칼럼들을 확인했다.

가관이었다.

[뮤직비디오 전략, 이대로 괜찮은가?]

-비원더의 뮤직비디오는 큰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비원더 덕분일까? 율리아 뵘은 프랑스 국가를 불러도 큰 호응을 얻었을 것이다. 정작 비원더 노래에 비원더는 뒷전이다.

댓글 반응도 차가웠다.

-율리아 뵘 빨로 어그로 끌어서 뭐 하겠다는 건지. 정정당당하게 음악으로 승부해야지.

-아시아 쿼터라고 또 아시아 애들 억지로 밀어주네 불편하다.

ㄴ 그냥 백인 남성이 세계 음악판 다 해 먹는 거 보고 싶다고! 그럼 안 됨?

ㄴㄴ사실 우리 모두 그걸 바라잖아.ㅇㅇ

-엘비스 노래를 동양인이 한다는 게 그냥 이상함.

ㄴ비원더 비원더 해서 영상 봤는데 이게 왜 인기인지 모르겠음. 차라리 동네 밴드 공연을 가.

‘어떤 일이 생긴 건지 알 것 같군.’

빠가 까를 만든다는 인터넷 격언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었다.

갑자기 비원더 팬덤이 생기니, 이에 거부감과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이 총동원되어 비원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음악 평론가들까지 가세해 비원더 음악을 비판했다.

아무 고민 없이 만든 깊이 없는 알앤비 음악이란 평이었다.

2천년대 중반은 아직, 음악 평론가의 존재감이 있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들이 선호하는 어려운 음악과 비원더의 음악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당연히 비판 일색의 리뷰뿐이었다.

‘음…….’

어느 정도의 비판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비판이 너무 커져서 전체 대중의 평을 흔들 정도라면 문제였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 * *

드림 크루즈 맨 위층에는 수영장이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수영장만은 등급으로 차별하지 않았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수영장 옆 갑판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우리 팀의 새 스태프인 메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수영복 차림의 메리는 긴 갈색 생머리에 짙은 눈썹, 강렬한 푸른 눈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화장기가 전혀 없어서 되려 나 같은 동양인이 보기에는 미모가 더 두드러져 보였다.

정작 서양인들은 그녀가 평범하게 생겼다고 했지만.

메리는 우리 팀 코러스의 룸메이트였던 인연으로, 글로벌 비전 본선 기간에만 우리와 함께하기로 한 미국인 방송작가였다.

앞으로 비원더의 ‘서사’를 만들어 줄 사람이었다.

지금 그녀는 환희와 재호의 인터뷰 내용을 탁자에서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보곤 고개를 돌렸다.

“노엘! 왔어요?”

“작업은 잘되고 있나요?”

“이건 별거 아니죠. 써먹는 게 어려운 거지.”

“뭐, 일단 그 전에 저희가 해야 할 게 있어요. 사실 작가로서 일이라기보다는 PR에 가까운 일인데. 메리 의견이 궁금해서요.”

메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인데요?”

내가 간단하게 지금 비원더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알려 주었다.

율리아 뵘을 출연시킨 뮤직비디오가 큰 효과를 거두었지만, 되려 역효과로 비판하는 세력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인기가 한순간의 유행이라는 평 때문에 우리의 등급은 D등급이라는, 최약체로 분류되었다는 점까지 말했다.

메리가 파하하 웃었다.

“그거 다행이네요.”

“다행이요? 뭐 망한 건 아니지만 다행일 거까진 없지 않을까요?”

“알아서 스토리를 만들어 주고 있잖아요. 되려 우리에겐 반갑죠.”

내가 한숨을 쉬었다.

“그건 맞긴 한데. 그래도 차라리 평이하고 순탄하게 갔으면 좋겠네요.”

“대책 있어요?”

“제 생각은 하나입니다.”

“뭔데요?”

“메리하고 상의한다.”

“뭐예요, 그게!”

메리가 푸하핫 웃었다.

나는 진심이었다.

그녀에게 뭔가 아이디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메리와 시선을 맞추며 그녀를 독려했다.

“뭐 괜찮은 거 없을까요? 저희의 인상을 다르게 해 줄 방법이오.”

“음 글쎄요? 사실 지금도 저는 무시하고 실력으로 보여주면 될 거 같은데. 막상 무대를 보면 달라지지 않겠어요? 어쨌든 지금 비판하는 사람들 태반은 비원더의 무대를 못 본 거잖아요?”

“맞는 말씀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크루즈 생활이 너무 불편했다.

최약체 팀으로 살아서 모텔 수준의 허름한 방에서 자고.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먹고.

여튼 피곤했다.

조금은 이 배에서 인정받고 싶었다.

‘하긴 뭐, 무대에서 아무리 잘하면 뭐 하겠어. 민티 내부에서 평가가 좋아야 대우가 좋아지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그냥 지금의 굴욕을 참고 무대에 집중하는 편이 더 좋아 보이기도 했다.

가만히 고민하던 중, 메리가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문제가 된데 발단은 율리아 뵘이잖아요?”

“그렇죠?”

“율리아가 이번에, 토크쇼 나올 예정이라던데요? 오메가 와이즈 쇼라고.”

“오, 그 흑인 여성이 진행하는 쇼 말이죠? 엄청 유명하잖아요?”

나도 몇 번인가 본 기억이 있는 미국 최대 인기 토크쇼였다.

메리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오메가 와이즈 쇼 메인 작가가 제 친구예요.”

“오호….”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통화라도 해볼까요?”

나는 주변을 살폈다.

다들 수영하기 바빴다.

우리 둘의 이야기를 들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해보면 어때요….?”

나는 슬쩍 내 계획을 메리에게 알려주었다.

* * *

다음 날 저녁.

나는 우리 방에 있는 싸구려 브라운관 TV를 켰다.

다행히도, 우리 방에도 케이블 티비는 연결되어 있었다.

채널을 돌려 오메가 와이즈 쇼를 틀었다.

오메가 와이즈는 커다란 아프로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유명 여성 토크쇼 호스트였다.

특히 명사들과의 인터뷰로 거대한 명성을 쌓았다.

그중에서도 오늘의 인터뷰 상대는 율리아 뵘이었다.

편곡 아이디어를 정리 중이던 재호가 곁눈질로 화면을 확인하더니 크게 당황했다.

“어? 율리아네?”

내가 살짝 놀리는 투로 물었다.

“너. 여배우는 잘 모르는 거 아니었어?”

“그건 일반 배우 이야기구! 우리랑 인연이 생긴 사람이면 기억해야지. 덕분에 뮤비 이상 없이 찍게 해 준 은인인데.”

재호랑 내 대화 소리를 듣던 환희도 슬쩍 양초를 켜고 진행하던 요가 세션을 마무리하고 티비 앞에 앉았다.

오메가 와이즈가 힘찬 목소리로 율리아 뵘을 맞이했다.

-굿 이브닝 아메리카! 오늘은 영화 ‘히어로 고등학교’의 여주인공을 맡은, 율리아 뵘을 소개합니다!

박수 소리와 함께 율리아가 등장했다.

몸에 딱 맞는 세련된 블랙 니트에, 블랙 조거 팬츠 차림이었다.

환희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예쁘다아~. 스포티한 느낌도 좋네요.”

“우리랑 뮤비 찍었을 때는 디즈니 컨셉이었으니까. 드레스 차림밖에 못 봤지.”

그사이, TV에서는 오메가와 율리아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요새 율리아는 뭐에 빠져 있어요? 연애?

율리아가 방긋 미소 짓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요새는 케이팝! 케이팝에 빠졌어요.

-케이팝? 케이팝이 뭐죠?

-한국의 음악이에요. 춤과 노래, 뮤직비디오 모든 게 합쳐진 거죠. 정말 빠졌어요. 제가 자진해서 휴가를 반납하고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까지 했다니까요!

오메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What? 휴가를 반납해요? 1년에 며칠 있다고?

-그러게 말이에요!

-그럼, 그 가수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예요?

율리아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런 셈이죠.

“뭣!”

재호가 흥분해서 펄쩍 뛰었다.

나와 환희는 그 모습을 보고 폭소했다.

“쿨가이 재호가 저런 반응을 한다니 처음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오메가는 계속해서 방송을 진행했다.

-사실 그래서! 우리가 비원더의 노래를 준비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It's Now Or Never!’

오메가가 기습적으로 카메라에 신호를 보냈고, 바로 카메라는 휙 돌아 롱테이크로 3명의 가수를 잡았다.

3인의 가수들이 우리의 무대를 흉내 내며 춤추고 노래하고 있었다.

경박하게 놀리는 패러디가 아니었다.

정말 진지하게 무리 무대를 보여주고 있었다.

노래의 피날레에서는 급기야, 율리아 뵘과 오메가가 무대에 난입해 함께 춤을 추었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오메가의 클로징 멘트가 나왔다.

-율리아 뵘이었습니다. 땡큐 아메리카!!!

그렇게 인터뷰가 쿨하게 끝나버렸다.

환희가 TV를 붙잡고 소리 질렀다.

“진짜! 이게 끝이라고? 이러고? 무슨 우리 광고예요?”

“우리 광고도 낯 뜨거워서 이렇게는 못 찍지.”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메리와 함께 짠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우리는 메리의 친구인 오메가의 토크쇼 메인 작가에게 슬쩍 율리아 뵘이 케이팝 팬이라는 이야기를 던졌다.

아직 2천년대 중반, 케이팝이 큰 인기를 끌지 않던 시절이었다.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가 ‘케이팝’이라는 요상한 음악의 팬이라는 독특한 정보를 방송작가가 놓칠 리가 없을 거라고 나와 메리는 확신했다.

예상대로였다.

제작진은 아예 율리아 뵘의 인터뷰의 피날레를 비원더 이야기로 장식해버렸다.

‘이 정도면 우리가 율리아 뵘 빨로 떴다는 뜬소문은 없앨 수 있겠지?’

그때였다.

천채왕에게서 국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야! 노을이 너가 나보다 낫다! 어떻게 섭외했어? 네가 기획했다며?

천채왕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아니요. 섭외한 건 아니고요.”

-여튼 대박이야 대박! 야, 너 내 후계자 수업받을래?

“억만금을 줘도 싫습니다.”

죽을 때까지 가수 하고 싶어서 지옥에서 돌아온 사람한테 무슨 섭한 말씀을.

마음만 받을게요. 마음만.

아, 상여금도 조금 주면 좋고.

그렇게 기분 좋게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진짜 기분 좋아지는 일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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