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애드리아나와 통화를 하다 보니 가면 갈수록 상황이 가관이었다.
애드리아나는 아예 우리 비원더와 건물 층수가 다른 곳에서 식사했다.
VIP들만을 위한 식사 장소가 따로 마련된 모양이었다.
-론도 왔어요. 그, 동양인 밴드하고 같이.
‘동양인 밴드라면, 일본 대표인 ‘베이즈’인가.’
심지어 스폰서 집안사람인 론이 가수들과 친목질하고 있었다.
한국이라면 큰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이지만, 여기서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체념했다.
이곳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잘못됐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그냥 실력으로 이기는 수밖에.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우리가 베이즈보다 더 뮤직비디오 성과는 좋았는데? 대체 뭐가 기준인 거야?”
애드리아나도 기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우리도 그냥 주최 측이 가란 데로 갔어요. 잘 모르겠어. 매니저한테 알아봐 줄까요?
“아니 괜찮아. 알려줘서 고마워. 밥 먹고 나서 같이 커피나 하자.”
나에게도 알아봐 줄 매니저는 있었다.
* * *
식사 후, 우리는 씻고 노래 연습을 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행인지 불행인지, 크루즈는 헬스장과 음악 연습실에서만은 가수들의 차등을 크게 두지 않았다.
그냥 일찍 가면 임자였다.
유일하게 평등한 이 분야를 우리는 철저하게 활용했다.
누구보다 많은 연습과 트레이닝을 하며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사이 배영웅 매니저는 나름의 휴민트를 동원해 우리의 현 상황에 대한 정보를 모아 왔다.
‘뭐 아마 이윤강 PD가 제일 컸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내가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배영웅 매니저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이게 알고 보니까, 제작사는 뮤직비디오 성과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네요.”
“그래요? 그럼 뭐가 중요한가요?”
“국가별 민티 매출이요.”
재호와 환희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나도 표정 관리가 잘 안됐다.
아니, 민티가 일본에서 잘 팔리는 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나라보다 인구가 많은데!
재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럼 스웨덴 같은 작은 국가는 아예 개죽을 먹어야 하는 건데요.”
“정확히는 ‘뮤비 촬영 이후 얼마나 민티 매출이 늘었느냐.’를 퍼센트로 체크해서 순위를 정했다네요.”
이제야 뮤직비디오 미션의 정확한 문구가 떠올랐다.
[가급적 민티를 최대한 많이 노출해주십시오.]
‘그게 그런 뜻이었나.’
환희가 황당하다는 듯 탁탁 탁자를 치며 말했다.
“아니, 그걸 기준으로 줄 세우기를 할 거였으면 말을 해줘야죠. 그랬으면 우리도 맨날 민티 마시면서 찍었을 텐데.”
내가 핀잔을 줬다.
“아서라. 디즈니 공주 컨셉인데 웬 탄산음료?”
“아오!”
환희가 우걱우걱 치킨을 뜯었다.
저거 벌써 두 마리째 아닌가?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저 정도 먹으면 위험할 텐데.
배영웅 실장이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선생님이 공식 채널 통해서 항의해 보신다고 하네요. 큰 효과는 없을 거 같긴 하지만요.”
나도 배영웅 실장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아직은 2006년, 곧 2007년.
케이팝은 세계 대중 음악계에서 변두리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설사 일본, 중국 등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천채왕 프로듀서 같은 전설적인 제작자라 해도 세계시장에서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글로벌 비전과 같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방송에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앞으로는 어떻게든 상대를 실력으로 이겨주겠다고 결심했다.
이런 생각을 할 무렵, 고소한 냄새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치킨 냄새가 솔솔 풍겼다.
“그러고 보니 환희 너, 치킨은 어떻게 받았냐? 우리 땅콩버터 샌드위치하고 사과밖에 안 주잖아.”
“애드리아나가 주던데요? 룸서비스래요.”
“……. 야! 우리도 연예인이야! 자부심도 없냐?”
환희가 당당하게 닭 다리를 뜯으며 대답했다.
“배고픔은 있어요!”
“아이고 두야.”
머리가 아팠다.
그때였다.
문자가 하나 날라왔다.
-야! 대체 무슨 일이야!!!
* * *
문자의 정체는 말론 웨이였다.
말론 웨이가 씩씩대는 목소리로 나를 로비로 불러냈다.
지하 로비로 가니, 시카고 저지 셔츠에 찢어진 청바지 차림의 말론 웨이가 큰 손짓을 하며 내게 고함쳤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뭐가요?”
내가 잘못한 게 있는 건가 싶었다.
“대체 왜 이런 싸구려 방에 있느냔 말이야. 너희는 스타잖아! 스타! 스타를 어떻게 이런 최악의 방에 두는 거야. 여기! 주인 불러!”
말론 웨이가 급격히 과장된 몸짓으로 로비 앞의 벨을 울렸다.
정장 차림의 백인 여성이 후다닥 걸어 나왔다.
“주인 불러.”
“네?”
“주인 부르라고! 크루즈 주인! 내가 이 방송 호스트 말론 웨이인데, 내가 지금 주인을 부른다고!”
호텔 직원이 깜짝 놀라 사라졌다.
내가 말론 웨이에게 속삭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쉿. 내게 맡기고 가만있으라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거 같은데요! 저는 상관없으니 멀찍이 떨어져 있겠습니다.’
뒤에 서 있던 배영웅 실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살금살금 뒤로 가려던 순간, 낯익은 얼굴이 로비로 걸어 나왔다.
한 올의 오차도 없는 순백의 드레스 차림의 마리였다.
“뭔가요 말론? 행패 부리려는 거예요?”
“노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왔지.”
말론은 목소리로 은근히 압박했지만 마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가 말론을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말인가요?”
“비원더는 최대 하이프(hype)의 그룹이야. 미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예선 시청률도 최고였고, 뮤직비디오 관심도도 최고였고! 이 대회에서는 최고의 우승 후보를 이런 식으로 대하나! 이건 경우가 아니지!”
말론은 거의 코가 마리에게 닿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해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마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만든 기준이 아니에요! 회의로 나온 규정이고 저는 따라야만 했어요.”
“비겁한 변명이야.”
“그게 회사라고요. 말론 당신은 모르겠지만. 한번 시스템이 내린 결정은 어쩔 수 없어요. 1라운드 이기면 다시 등급을 매길 거예요. 그때는 좀 나은 기준을 찾아볼게요. 그때까지는… 할 수 없어요.”
“할 수 없다고? 어이 노엘.”
“네, 네. 저요?”
깜짝 놀랐다.
놀란 가슴을 어루만지며 터덜터덜 말론 옆에 가서 섰다.
“자 말해봐 친구! 뭐가 필요해? 솔직히 방도 너무 좁고, 음식도 형편없잖아? 저 젠틀맨에게 다 들었어!”
말하면서 말론이 손으로 배영웅 실장을 가리켰다.
‘그런 거였나.’
아무래도 배영웅 실장이 상황을 알아보면서 말론 웨이와 접촉했고, 그 덕분에 말론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상황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말론이 다시 되물었다.
“필요한 거 없어?”
“아, 필요한 거요.”
문득, 배고파서 치킨을 애드리아나에게서 공수해 온 환희 생각이 났다.
“…식사는 좀 먹을 만한 걸로 주셨으면 합니다. 햄버거도 아니고 땅콩 샌드위치에 사과로 3끼는 너무했어요.”
“뭐? 여기가 무슨 빈민가냐! 연예인들이야. 여기, 마이너 리그 아니라구!”
마리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말했다.
“그건… 시정하겠어요. 제작진이 그림을 연출하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음식은 컨디션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음식에는 차별을 없애는 걸로 하죠.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부터! 됐나요?”
* * *
다음 날 아침.
드디어 우리는 당당하게 개선장군처럼 레스토랑에 입성할 수 있었다.
환희가 가슴을 쫙 펴고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후으읍~.”
“뭐하냐?”
“이 아름다운 조식 뷔페의 냄새를 기억하려고요!”
“아 그러냐.”
환희는 순식간에 포치드 에그부터 살몬, 베이컨까지 온갖 아침 음식을 가득 담아와서 먹기 시작했다.
재호는 평소처럼 깔끔하게 정량의 요거트와 샐러드를 섭취했다.
재호의 표정도 매우 밝았다.
“너도 기분 좋네?”
“사실 나도 스트레스 많았다구. 어제까지 환경으로는 식단 조절이 안 되니까.”
“아 그랬겠네.”
“진짜 이게 안 됐으면 헬기에 띄워서 도시락 배달을 시킬까 진지하게 고민했어.”
재호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뭐, 사실 나도 기분은 좋았다.
이 배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하는 제대로 된 식사였으니 말이다.
말론이 슬쩍 우리 테이블에 왔다.
“괜찮아?”
“너무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비원더 멤버들이 모두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론에게 감사를 표했다.
말론이 내게 뭔가 종이를 줬다.
“이게 뭔가요?”
“대진표야. 방금 발표됐어. 곧 모든 팀에게 전달될 거야. 한번 확인해 보라고.”
“감사합니다.”
‘대진표’라는 말을 듣자마자 웃고 있던 재호와 환희도 표정이 달라졌다.
드디어, 1라운드, 첫 대결이 시작된 셈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진표를 펼쳤다.
배영웅 실장까지 4명이 앉은 테이블이 가득 찰 정도로 큰 대진표였다.
128개 팀이 모두 담긴 토너먼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디 보자. 1라운드 상대는 제롬 스미스. 나이지리아의 래퍼네.”
재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몇 번 들어본 거 같아. 아프리카의 힙합 강자. 상당히 주의해야 할 상대야.”
역시, 월드뮤직에 조예가 깊은 재호다웠다.
“그러냐…… 헉!”
대진표를 보다가 그대로 한곳에 마음을 빼앗겼다.
만약 우리가, 프린스 제롬을 이기면 그다음에 붙을 유력한 상대는 캐리비안 바베이도스의 ‘배로니스 메이어스’.
이미 빌보드 차트를 휩쓸고 있는 정상급 가수였다.
미국 대표지만 아직 신인급인 루비아이, 일본의 중견 뮤지션이지만 세계적인 인지도는 부족한 베이즈 등등 유수의 음악 강국의 대표보다도 오히려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그 강력한 팀이 바로 우리의 2라운드 상대가 될 각이 나왔다.
“으음…….”
멤버들은 물론 배영웅 실장까지 표정이 굳어 버렸다.
배로니스 메이어스를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내가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말을 시작했다.
“뭐… 어차피 언젠가는 배로니스 메이어스도 이겨야 우승할 수 있잖아?”
재호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긴 하지…….”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재호도 용기를 얻고 싶은 눈치였다.
환희도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상황.
내가 일부러 조금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우승해야 할 거. 한번 해 보자 까짓거!”
그때였다. 옆에서 누군가 나른한 목소리로 내게 쏘아붙였다.
“…그전에 잊은 게 있지 않나?”
고개를 돌렸다.
“흡!”
내 앞에는, 우리의 1라운드 상대 제롬이 서 있었다.
깔끔하게 삭발한 머리에는 다양한 타투가 새겨져 있었다.
170의 작지만 탄탄한 근육질의 몸에, 아프리카 특유의 원색 느낌이 가득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짙은 색감의 선글라스 덕에 눈빛은 알 수 없었지만, 표정은 짜증으로 가득했다.
야성이 온몸에 풍기는 느낌의 남자였다.
“나를 이겨야 2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다고. 바로니스 메이어스를 신경 쓸 여유가 없을 텐데?”
‘저 사람이 제롬이군.’
이전 생에서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재호가 예의 바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제롬! 팬입니다. 한 번쯤 뵙고 싶었습니다.”
제롬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자기 손으로 삭발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