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말론 웨이의 동공이 커졌다.
거친 호흡 소리도 들렸다.
권노을은 속으로 기뻐했다.
‘계획대로야.’
사실 나는 말론의 최애 가수가 ‘보이즈투맨’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말론 웨이의 방송을 확인해 본 덕분이다.
그는 틈날 때마다 ‘보이즈투맨’과 ‘시스코’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90년대 흑인 알앤비의 광팬이란 뜻이었다.
나도 아주 좋아하는 종류의 음악이었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방송의 메인 MC인 말론 웨이와는 계속해서 부딪칠 운명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글로벌 비전 대회의 진행자니 말이다.
그는 우리 팀을 매우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나는 인터뷰를 하면서 그 이유를 금세 눈치챘다.
말론은 ‘흑인음악’에 자부심이 대단한 흑인이었다.
‘뭐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 내 동생이 국악을 해서 말인데. 거꾸로 흑인이 자기가 한국인보다 더 국악을 잘한다고 하면 얼마나 웃기겠어?’
그래서 정통 흑인음악을 표방하는 비원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력으로 압도하지 않는 한, 말론 웨이와는 계속해서 문제가 생길 터였다.
차라리 지금, 제대로 부딪쳐보는 편이 나았다.
내 호기로운 장담을 들은 말론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 말은 취소하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말론이 갑자기 펄쩍 뛰며 말했다.
“취소하는 게 어때! 쫘식아!(My Ass!)”
‘방송이랑 실제 모습이 그대로인 사람이네. 완전 기분파야.’
내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보이즈투맨을 좋아해서 그런 겁니다. 꿈도 못 꾸나요?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저도 꿈이 있어요.”
흑인의 영웅, 마틴 루터 킹을 일부러 인용했다.
내 말을 들은 말론이 더더욱 얼굴을 찌푸렸다.
“뭐?(What?) 그건 상관없어.”
나는 ‘당신이 동양인 가수 차별하는 거나, 미국 백인들이 흑인 차별했던 거나 무슨 차이냐?’라고 비꼰 건데, 말론에게 이해가 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재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야 뭔지 모르겠는데. 저 사람 너무 흥분한 거 같은데 그냥 취소하겠다 그러구 넘어가는 게 좋지 않냐?’
‘우리, 보이즈투맨하고 스티비 원더를 존경하고 그 사람들처럼 되려는 거 맞잖아. 도가 지나치게 흥분한 건 저 사람이야.’
재호가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이 정론이었으니까.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론에게 통보했다.
“그럼 보여드리죠. 우리의 가능성을.”
말론이 입을 크게 벌려 소리쳤다.
“하! 재미있군. 그래, 한 번 들어 보지. 당장 하라고 하진 않겠어. 원래 나는 내일 다시 LA로 돌아가는 일정이었어. 하지만 하루 더 기다려주지. 나는 관대하다고 내일 무대를 봐보겠어. 하지만 내 시간을 낭비했다간 두고 봐. 내 성깔을 보여줄 테니까. 내 성깔을 더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말을 마무리한 말론은 흡사 큰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대 뒤로 사라졌다.
말론 매니저의 비명이 들렸다.
“말론~ 왜 그랬어? 우리 오늘 가야 해. 티켓 없어!”
* * *
비원더 연습실.
비원더 멤버 3인과 우리의 트레이닝을 돕던 빅4가 모두 소집되었다.
빅4의 ‘매튜’가 굳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왜 그랬습니까? 굳이 그런 사람을 자극하는 말을 할 필요가 있었나요?”
나는 적당히 넘어갔다.
“죄송합니다.”
내게는 복안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을 굳이 타인에게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우리 편이 내 전략을 모르는 것이 내 계획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빅4의 멤버인 소프라노 케이트가 이마를 손으로 덮으며 말을 이었다.
“왜 하필 ‘보이즈투맨’이에요? 그 하고많은 그룹 중에. 보이즈투맨은 진짜 ‘아카펠라 그룹’이에요. 흥행한 중창단 그룹, 알앤비 그룹 중 최정상이라고요. 저희도 평생 추구하는, 그런 존재인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바로 그겁니다. 저희도 그래요. 목표란 게 잘못은 아니니까요. 그거에 화를 내는 사람이 문제인 거죠.”
“하지만 그 사람은 사회자잖아요? 출연자 입장에서 굳이 사회자랑 싸워서 좋을 게 뭐가 있어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재호가 말을 끼워 넣었다.
“내 말이! 게다가 갑자기 일정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서 한 번 더 우리 노래를 듣겠다는 거 보면, 자기 마음대로 일정이고 대본도 바꿔버리는 마이페이스라는 뜻인데요.”
“원자폭탄은 제어가 안 되면 원자폭탄이지만, 제어만 되면 원자력 발전소야.”
재호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뭔 말이야?”
“에너지가 넘치는 만큼 우리 편이 돼버리면 천군만마가 될 사람이란 뜻이지.”
“그게 맘대로 되겠냐?”
매튜가 화이트보드에 우리 일정을 마커로 정리하며 설명했다.
“일단 트레이닝 코스는 마무리했습니다. 세분들, 생각보다 진짜 빨리 마스터 하셨어요. 이제 리듬, 체력, 그리고 음감도 예전과는 다를 겁니다. 하지만.”
매튜는 말에 뜸을 들이며 우리 멤버 모두에게 한 명씩 눈을 맞춘 뒤, 나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보이즈 투 맨이 되지는 못합니다.”
팀워크만으로 역대 최고의 아카펠라 그룹인 보이즈투맨이 될 수야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걱정되지 않았다.
애초에 ‘보이즈투맨’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내게는 또 하나의 비밀 병기가 있었으니까.
나는 손뼉 치며 연습 시작을 알렸다.
“자! 그럼 하루밖에 안 남았으니까. 보이즈투맨 노래 연습 한 번 해볼까요?”
* * *
다음날 다시 우리는 말론과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우리의 선곡을 들은 말론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End Of The Road를 한다고?”
“네.”
말론이 빈정댔다.
“다른 곡을 모르는 거 아냐?”
환희가 하하 소리 내며 웃었다.
눈은 웃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었다.
“설마요! 보이즈투맨이라면 크리스마스 앨범까지 달달 외웠습니다.”
“근데 그걸 해?”
말론 웨이가 우리를 쳐다보는 눈빛이 이제는 분노를 넘어 안쓰러움으로 넘어갔다.
‘말도 안 되는 선곡이라 이거겠지.’
사실 말론 웨이의 생각은 일반적으로는 맞았다.
‘End Of The Road’라면 보이즈투맨의 허다한 명곡 중에서도 최고의 곡이었다.
역사에 남을 명곡이니 당연히 엔간한 노래 실력으로는 원작자의 노래에 먹힐 가능성이 99%였다.
그런 노래를 하겠다고 하니, 기가 찰 만했다.
내 눈짓을 신호로, 밴드가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마저, 아무런 재해석이 없는, 원곡 그대로의 연주였다.
우리는 침착하게 1절을 불렀다.
아예 원곡과 다를 게 없는, 완벽한 재현에 가까운 노래였다.
우리 셋은 절제된 하모니로 보이즈투맨의 하모니를 소화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우리 팀워크가 좋아졌다고 해도, 평생 화음을 연구한 아카펠라 그룹들과 비교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내가 슬쩍 카메라를 확인했다.
카메라맨들이 하품을 했다.
대부분 잡담을 하거나 해바라기 씨를 까먹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딴짓을 하는 중이었다.
노래가 원곡의 열화 버전이 되니, 흥미가 자연스럽게 식은 것이다.
가수에게는 가장 섬뜩한 순간.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번 잃어버린 관객의 관심을 다시 찾아오는 그 순간이 가장 짜릿했다.
2절 부분이 시작됐다.
내가 노래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2절의 애드립 파트를 나는 원작자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비틀어 불렀다.
정면 승부였다.
팀워크라면 당연히 전문 아카펠라 그룹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들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의 노력을 어떻게 저렇게 할 따름.
하지만 개인 기량이라면 달랐다.
물론 보이즈투맨의 메인 보컬의 노래 실력은 엄청나다.
하지만 팀플레이가 아닌 개인 기량이라면, 나도 그와 대결해서 충분히 해볼 만하다 생각했다.
‘누구와도 보컬 정면승부를 이제부터는 피해서는 안 돼!’
글로벌 비전은, 말하자면 미래의 보이즈투맨이나 마이클 잭슨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도전하는 음악 대회다.
‘전설적인 가수를 감히 내가 이길 수는 없죠’ 같은 미적지근한 태도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수준의 무대라는 뜻이었다.
팝의 전설보다 뛰어난 무대를 보여주겠다는 배짱 정도는 필요했다.
그저 나는 내 목소리를 믿고, 내 목소리에 노래를 맡겼다.
그다음은 내 목소리에 모든 걸 맡길 뿐이었다.
* * *
말론 웨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건 뭐지?’
방금 그는 뭔가, 다른 차원에 다녀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권노을이 후렴 직전의, 클라이맥스 고음을 치는 그 순간, 아예 들어 본 적이 없는 성량과 밀도의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그의 눈이 소처럼 맑아지고, 표정도 공손해졌다.
뭐랄까, 압도적인 자연재해를 목격하고 난 후에 겸허해진 듯한 기분이랄까?
노래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노래로 한 방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어질어질한 정신머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적당히 말했다.
“뭐… 뭐… 뭐… 열심히 하면 될 수도 있겠군.”
노래를 찢어버린 노엘, 권노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사실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말론의 마음속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End Of The Road’, 그에게는 특별한 노래였다.
아내에게 프러포즈했을 때 틀어 두었던 BGM이었기 때문.
그의 인생 최고의 러브송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그 노래의 원곡의 강렬함을, 지금 권노을이 휘발시켜 버렸다.
정확히는, 더 강력한 감정으로 원곡을 능가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노래를 청각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체 볼륨이 얼마나 큰 거야. 이게 사람의 성량이야?’
게다가 기계처럼 완벽한 테크닉까지.
어안이 벙벙했다.
말을 잇지 못한 채, 말론 웨이는 적당히 방송을 종료했다.
속으로 그는 이렇게 중얼댔다.
‘보이즈 투맨? 니들은 브라이언 맥나잇, 스티비 원더가 될 놈이다!’
세계 최고의 가수가 될 거란 뜻이었다.
* * *
이스트 웨이브의 LA 사무실.
이스트 웨이브는 골치 아픈 통화를 받고 있었다.
말론 웨이의 전화였다.
-…그러니까 말야! 지금 정도의 프로모션은 비원더를 무시하는 처사라 이거야. 미국 대표가 이 정도 관심을 받았어 봐! 이브닝 프라임 타임 토크쇼에 출연해 줬을걸?
이스트 웨이브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랬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니까! 이 정도 인기에, 이 정도 관심에. 이 정도 실력을 가진 그룹을 이렇게 적당히, 참가자 중 원오브뎀으로 홍보한다는 거 자체가 인종적인 선입견에 사로잡힌 거라고. 말콤 엑스가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브로!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뭐 어쩌자고?”
말론 웨이는 비원더를 방송에서 홍보해 줄 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제작진에게 이야기 해봤는데 스폰서 놈들이 꿈쩍도 안 한다는 하소연과 함께.
이스트 웨이브는 적당히 통화를 끊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말론 그놈이 외국 가수를 다 밀어주네. 미국 백인 가수도 남이라고 싫어하던 흑인 순혈주의자 놈이.”
이스트 웨이브 옆에서 토니가 큭큭 웃으며 말을 거들었다.
“뭐, 노엘의 노래를 들었나 보지. 그건… 듣는 게 아니라 체험이니까.”
이스트 웨이브가 묘한 표정으로 토니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토니 너도 그랬지? 사사건건 나한테 퐈이어 키드랑 너무 친하게 지낸다고 뭐라 하더니. 노래 들어 본 다음에는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서는.”
“벼락이 치는 느낌이니까.”
이스트 웨이브가 만족스러운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자기 생각보다도 순조롭게 비원더는 쭉쭉 세계 팝 시장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중이었다.
하지만, 세계는 넓었다.
이제 시작일 따름이었다.
“게다가 그 첫 관문이… 설마 거기일 줄이야.”
이스트 웨이브가 글로벌 비전 1차전 대본을 보며 쓱 미소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