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자꾸 자기가 제작자인 마냥 방송을 리딩하려 한데요. 그래서 스트레스받는다고 하더라고요?”
“방송 리딩이요?”
“출연자 분량 조절하고, 섭외 자기가 마음대로 하고, MC인 본인 활동 홍보하는 장면 마음대로 집어넣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MC 권한으로 그게 가능해요?”
“한국에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가능한가 봅니다. 이 사람,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이거든요. 영화 작가, SNL 작가 등도 해봤고, 다재다능해요. 그러니까 이런 일을 하겠죠.”
에고가 너무 크면 다재다능함도 오히려 골칫거리가 된다.
자기 마음대로 방송을 진행하는 MC라니.
그런 사람이 촬영을 주도하면 방송에 큰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아마 제작진은 웬만하면 팀 소개 분량은 모든 팀에게 공평하게 먹여주려 할 것이었다.
128개 팀이나 되는데 누군 적게 나오게 하기도 우스웠다.
하지만 말론 웨이와 같은, 제작진조차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 방송을 진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분량이 커지거나, 혹은 줄어들거나.
그야말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좋은 변수가 돼주길 기대해야 하나?’
* * *
진행자이자 영화배우이자 영화 제작자이자 각본가인 말론 웨이가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긴 여행이었지만, 일등석을 탄 덕에 큰 데미지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비로소 그의 옷차림이 드러났다.
검은 가죽점퍼에 링이 가득 달린 가죽바지.
20대 래퍼에게나 어울릴 법한 차림이었다.
50살 정도 됐지만 몸이 잘 단련되어 있고, 동안이라 10대 패션이 크게 안 어울리지는 않았다.
다만 ‘젊어 보이려 애쓰는 듯’한 느낌이 들 뿐.
스트레칭을 끝낸 말론이 옆에서 자는 매니저를 툭 쳐서 깨웠다.
“야 자멕 일어나. 도쿄야.”
입을 헤 벌리고 자던 매니저가 벌떡 일어났다.
매니저는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는 말론에게 파일 하나를 전달했다.
“오늘 촬영할 동북아시아 그룹들 정보야. 녹화 전까지 숙지해줘.”
“뭐 별거 있겠어?”
말론은 시큰둥했다.
동양에서 뭐 대단한 가수가 있을까?
대중음악은 결국 서양에서 나왔다.
유럽의 클래식 음악에 아프리카의 리듬이 결합한 것이 결국 팝이니까.
말론처럼 인종 차별을 싫어한다고 자부하는 흑인도 아시아의 가수에게는 큰 기대가 되지 않았다.
매니저가 파일 중 한 페이지를 콕 찍어 강조했다.
“말론, 이 친구들은 좀 반응 괜찮던데? 뮤직비디오가 미국 대표 ‘루비아이’ 만큼 나왔어.”
“팬이 좀 있나 보지. 뭐 별거 있겠어?”
말론은 시큰둥하게 파일을 쳐다봤다.
구글에서 압도적인 검색량을 보유한 알앤비 보컬 트리오라고 적혀 있었다.
“동양에서 알앤비 트리오?”
말론이 ‘풋!’하고 소리 내서 웃었다.
그래, 뭐 팝 음악이나 댄스 음악은 동양인이 할 수 있다 치자.
흑인의 소울과 성대가 필요한 알앤비를 동양인이 할 수 있을까?
메인스트림을 장악한 백인들조차 알앤비는 흑인들에게 한 수 접어주는 장르였다.
게다가 그중에서도 보컬 그룹이라니.
이 부분만은 그 어떤 백인들도 흑인을 능가하지 못했다.
매니저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대중들 반응이 장난 아니라는데? 요새 구글 트렌드가 빌보드보다 정확하잖아. 빌보드는 라디오 디제이들 인맥질로 오염된 지 오래니까.”
“그게 다 자본의 힘 아닐까? 돈이 곧 힘이잖아. 율리아 뵘을 썼다잖아? 돈으로 배우 캐스팅을 때려 박으면 당연히 관심이 좀 오지. 이런 건 진짜가 아니야.”
“이스트 웨이브가 이 팀 메인보컬 피처링으로 노래를 발표한다는데? 이 정도면 진짜 아니야?”
“왔?(What?)”
말론의 눈썹이 한껏 올라갔다.
현재 가장 핫한 흑인 힙합 프로듀서인 이스트 웨이브와 함께 작업을 하는 동양인 가수가 있다니, 그건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거 봐.”
매니저가 미국 음악 잡지 기사를 보여주었다.
말론은 쓰윽 속독하더니 잡지를 다시 매니저에게 돌려주었다.
“뭐 그냥 운 아닐까? 이스트 웨이브 이 친구는 아직 뉴비니까. 나 같은 O.G(* 오리지널 갱스터. 터줏대감 정도의 어감)의 리얼한 소울을 모른다고! 그러니까 외지인이나 쓰는 거 아니겠어.”
“이스트 웨이브가 뉴비라고? 너보다는 소울 음악 많이 알지 않냐?”
“소울, 알앤비는 흑인의 거라고. 원래 그래 왔어.”
“말론 너 엄마는 독일인 아냐? 엄밀히 말하면 너도 반 흑인….”
말론이 눈을 부라리며 매니저에게 턱짓했다.
“말대답하냐?”
“아, 아냐 말론.”
말론이 매니저에게 서열을 보여준 후, 자기 짐 가방을 매니저에게 휙 던지며 생각했다.
‘이거 돈으로 동양인들이 우리의 소울을 훔쳐 가고 있잖아? 가만둬선 안 되겠는데. 친구들한테 본때를 한번 보여줘 볼까?’
말론 웨이라는 변수가 비원더에게 안 좋은 쪽으로 터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 *
말론 웨이는 예정대로 도쿄의 한 촬영 스튜디오에서 비원더를 만났다.
“왓업. 말론이야.”
“반갑습니다.”
비원더 3인이 생각보다 능숙한 영어로 대답했다.
‘영어를 좀 잘하는데? 하지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중요한 건 이 녀석들이 우리 흑인의 소울을 훔치고 있다는 것!’
말론은 속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눈에 힘을 가득 주고,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을 발사하며 주변을 확인했다.
말론이 슬쩍 물었다.
“우선 인터뷰 전에, 간단한 공연 씬을 찍고 싶은데. 버스킹 되나?”
“네.”
얼굴 하얀 친구(원. 째. 호.라고 발음하던가?)가 호명하자 밴드 멤버들이 걸어 들어왔다.
밴드는 능숙한 움직임으로 무대에 자기 악기들을 세팅했다.
그중에는 말론에게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어? 소닉 독?”
소닉 독이 자신의 예명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더니, 말론 웨이에게 반갑게 포옹했다.
“오 말론! 브라더! 너가 이번 방송 호스트야?”
“그렇게 됐지.”
소닉 독이 동양인 가수의 밴드 멤버가 되다니!
말론은 당황했다.
소닉 독은 말론이 일찌감치 찍어놓은 슈퍼 루키 재즈 베이시스트였다.
길거리 공연이나 뉴욕 재즈 바 공연에서 자연스럽게 만났다.
언젠가 흑인음악 씬을 이끌 존재가 되리라 기대했다.
잘 되면 언젠가 자신이 진행하는 토크쇼의 밴드 멤버로 고용하면 어떨까 하는 공상까지 했던, 그런 뮤지션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동양인 가수 비원더의 밴드 멤버로 활동 중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녹화 재밌게 해 보자구. 예에~”
소닉 독이 내민 주먹을 툭 치며 주먹 인사를 날렸다.
말론이 고개를 돌려 비원더 3인을 쳐다보며 물었다.
“요새 뉴욕 재즈 씬에 없다고 했더니만, 여기 있었어?”
“아 저 친구들 음악이 재미있어서.”
“음악이 재미있어? 동양인이 하는 알앤비가?”
“들어보면 알아. 기대해.”
소닉 독이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말론은 팔짱을 낀 채로 밴드가 손을 푸는 모습을 지켜봤다.
익숙한 멜로디였다.
“설마… 마이클 잭슨?”
노엘이라고 불리는 친구가 말론에게 대답했다.
“네. 마이클 잭슨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이 곡을 준비했는데요. 문제없나요?”
“아니 뭐. 문제는 없고, 잘 해봐.”
“감사합니다.”
하지만 말론은 속으로는 한숨을 쉬었다.
‘마이클 잭슨이라니! 심지어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깡따구도 정도가 있어야지!’
디스코 느낌과 휭크(funk) 비트로 가득한 마이클 잭슨의 초기 곡인 이 곡은 흑인 가수들도 엔간하면 소화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가성과 리듬감, 그리고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곡이다.
심지어 알앤비 곡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복합적인 댄스곡이었다.
이런 곡을 동양인 알앤비 팀이 해낸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뭐 밴드 연주 괜찮으려나? 소닉 독이 밴드 멤버로 있는 거 보면 밴드는 그거는 봐줄 만한 거겠지? 일본에서도 밴드는 간혹 괜찮은 경우가 있으니까.’
말론은 결심했다.
만약 비원더가 너무 노래를 망친다면, 자신이 마이크를 빼앗고 대신 노래를 불러 어떻게든 노래라도 살리겠다고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명곡이었다.
이 곡을 망칠 수는 없었다.
물론 평소라면 큰 결례다.
하지만 말론 웨이는 이미 ‘자신이 무대를 잘 마무리해주려는 배려다’라고 자기 합리화를 마친 상태였다.
말론은 속으로 Don’t Stop Til You Get Enough의 가사를 되새기고 있었다.
언제든지 자신이 난입해서 무대를 마무리 정리할 수 있도록.
그동안 비원더 3인도 서서히 목을 풀었다.
그 중 ‘노엘’이라는 멤버가 목을 푸는데, 뭔가 다른 게 느껴졌다.
‘뭐지?’
노엘은 힘을 하나도 주지 않은 채로 가볍게 음을 가지고 놀았다.
마치 뱀처럼 음이 자유롭게 구부러졌다.
일반적인 도레미파솔라시도로 표현할 수 없는 저 화려한 음 진행은 루이 암스트롱이나 마할리아 잭슨 같은 전설적인 흑인음악 가수의 그것이었다.
말론은 금방 고개를 저었다.
그냥 우연일 것이다.
아마 음 이탈이 우연히 듣기 좋게 들린 거겠지.
그때였다.
소닉 독의 현란한 베이스 연주와 함께 급격히 빠르게 노래가 시작됐다.
후렴에서 권노을의 노래를 듣는 순간, 말론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뭐지 이건???’
알앤비, 소울은 흑인이 잘한다는 본인의 신념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위험하지만, 왠지 이 음악에 맞춰 같이 머리를 흔들고 싶어졌다.
그사이 노래가 끝났다.
하지만 말론은 인정할 수 없었다.
‘흑인 중에 흑인인 내가 이 동양인 소년들의 노래에 마음이 움직이다니. 다른 음악도 아닌 알앤비에서? 이게 가당키나 한가?’
말론은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대 끝났어? 그럼 이제 인터뷰 시작하지.”
* * *
인터뷰는 평범했다.
작가가 써주는 걸 그대로 읽으면 되니까.
권노을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안심했다.
‘다행이군. 별일은 없겠어.’
인터뷰는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말론이 틀에 박힌 질문을 한다.
“미스터 주, 엘비스 춤을 추던데. 잘 추는 비법이 있나?”
그러면 우리 멤버들 또한 뻔한 답변을 했다.
“엘비스의 영상을 보고 연구했습니다. 워낙 뛰어난 댄서라 공부가 어려웠네요.”
이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인터뷰 같은 판에 박힌 인터뷰를 하다 보니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이 뻔한 인터뷰가 우리를 엿 먹이는 걸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인터뷰에서, 방송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질답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되면 정말 아무 가치가 없는 인터뷰가 되거나, 아니면 아예 통째로 편집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진짜 우리를 조직적으로 엿 먹이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기분이 뭔가 안 좋아서 나태하게 인터뷰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방송 분량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결론이 중요할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말론의 톤도 무미건조했다.
“미스터 원. 이번 무대는 어떤 식으로 준비할 생각이지? 최선을 다할 건가?”
“아 네. 열심히 해야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슨 도덕 교과서도 아니고, 저딴 질답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말론이 인터뷰지를 넘기며 말했다.
“마지막 질문이야. 이번 대회를 통해 비원더가 얻고 싶은 건 뭐지?”
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말론 씨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죠?”
“나? 보이즈투맨이지?”
“그럼 보이즈투맨을 능가하는 가수가 되겠습니다.”
“…!!!”
말론의 동공이 흔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