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39화 (239/280)

제239화

이번 우리의 뮤직비디오는 디즈니 공주가 서울에 온다는 컨셉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디즈니 공주와 사랑에 빠지는 ‘실장님’ 컨셉의 드라마 주인공은 재호가 맡기로 이미 결정했다.

남은 것은 재호와 사랑에 빠지는 ‘디즈니 공주’ 역할뿐이었다.

‘이 역할이 아마 제일 중요할 거야.’

우리의 뮤직비디오는, 장르로 치면 로맨틱 코미디다.

남녀 배우의 캐스팅과 둘의 케미가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여배우 섭외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 * *

천채왕의 회의실.

재호와 환희가 팀을 나누어 곡을 쓰고, 편곡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아폴로 빈 감독을 필두로 천채왕 프로듀서 및 배영웅 매니저 등과 함께 뮤직비디오를 논의했다.

아폴로 빈이 빠르게 콘티를 그려놓고 우리에게 컨펌 받았다.

“일단 뮤직비디오 촬영지는 에버랜드로 섭외가 됐습니다. 다행히 딱 하루 가능하더라고요. 하루 만에 다 찍고 편집까지 하려면 빡세겠네요.”

그래도 장소 섭외가 된 게 어딘가 싶었다.

내가 그대로 의견을 개진했다.

“장소는 그래도 좀 디즈니 느낌 나겠네요. 그럼 다음 문제는 여배우인데.”

아폴론이 반색했다.

“그렇죠? 좀 어려울 거 같긴 해요. 애드리아나를 섭외해야 하나.”

애드리아나는 우리와 연이 있는 해외 방송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송인일 뿐, 배우 경력은 없다.

쉽게 가려고 섭외가 쉬운 사람을 섭외해봤자, 최종 결과물이 엉망만 될 뿐이었다.

‘물론 워낙 시간이 없으니까 이해는 하지만….’

나는 그대로 천채왕 프로듀서에게 SOS를 날렸다.

“대표님 혹시 적당한 분 없을까요?”

천채왕이 턱을 긁었다.

“백인 배우… 디즈니 역할을 할 만한 배우라. 한국에는 드물지만 구룡도나 일본에는 좀 있을 거야. 한번 알아볼게.”

“부탁드려요.”

“프로듀싱을 25년 했는데, 이런 상황은 처음 겪어본다. 하여간 다이내믹하네!”

천채왕이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들고 바깥을 나갔다.

이곳저곳 통화를 할 예정인 듯했다.

그가 나가고 나자, 이번에는 아폴로 빈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거, 그건 그렇고 촬영은 또 어쩐다?”

“촬영, 편집 인력 때문이죠?”

“그렇지. 당장 1주일 안에 해야 하는데. 이게 말이 되나? 지금 당장 연락해 보니, 되는 애들이 없다는데?”

아폴로의 표정에 그늘이 잔뜩 드리워 있었다.

나는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딱 한 분, 적당한 분이 있어요.”

나는 어딘가로 통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글로벌 비전에서 우리를 담당했던 이윤강 PD였다.

“PD님 어떻게 지내세요?”

-아휴 말도 마요. 어찌나 바빴는지….

“지금은 쉬고 계신 거예요?”

이 PD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프리가 쉬는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손가락 빨고 있는 거죠.

이윤강 PD는 얼마 전까지 뮤직넷 소속 PD였다.

하지만 처음으로 외주로 글로벌 비전 한국 대표 선발전을 맡았다.

그 말인즉슨, 이미 뮤직넷이라는 음악 전문 케이블 방송사는 퇴사했다는 뜻이다.

아직 방송사의 힘이 강고한 시절, 상당한 도박 수를 둔 셈이었다.

‘이미 그가 최고의 드라마 PD 및 예능 제작자로 성공하겠다고 알고 있는 내가 봐도 무모한 수였지.’

그래서 지금 그가 경제적으로 쪼들릴 거라는 짐작은 했다.

나중에는 그의 선택이 정답으로 밝혀지겠지만 말이다.

슬쩍 그에게 미끼를 던졌다.

“급하게 한 1주일 정도 할 일거리가 있는데요.”

-오? 비원더인가요?

“네.”

-좋죠 좋죠. 뭔가요?

나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형기획사 소속이란 게 이래서 좋았다.

TYB는 잔금은 잘 주기로 소문났다.

이윤강 PD 정도 거물은 밑에 사실상 회사 정도의 방송 인력을 이끌고 다니기 마련이다.

하지만 계약직이라면 TYB는 얼마든지 이를 수용할 수 있었다.

통화가 끝나고, 나는 주저앉아 절망 중인 아폴로 빈에게 말했다.

“편집인력 섭외 완료했습니다.”

아폴로는 한껏 크게 입을 벌렸다.

“뭐? 어디 이상한 데 아니야?”

“베스트 오브 베스트예요. 이윤강 사단이요.”

“뭐 어어? 정말요? 정말? 농담 아니지?”

아폴로가 내 손을 꼭 붙잡고는 소리를 질렀다.

“예에에에 됐어! 됐어! 이제 서광이 비치네!”

뭐 이게 전부는 아닐 테지만 말이다.

* * *

내 걱정보다 뮤비 제작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재호와 키미 프로듀서는 불과 하루 만에 음악 작업을 완성했다.

평소처럼 꼼꼼한 엔지니어링은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다급한 일정 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뮤지컬 트랙이 나왔다.

가사도 베이비 선배의 서포팅 덕분인지, 순조롭게 완성됐다.

그리고 이미 재호와 환희의 작곡, 작사 스타일을 익힌 비원더 멤버들은 거의 멈추지 않고 녹음해 반나절 만에 곡을 완성했다.

기적에 가까운 진행 속도였다.

이대로만 가면 어쩌면 1주일 만에 뮤비를 찍는 기적이 나올 수 있겠다 싶은 순간.

문제가 생겼다.

뮤비 여배우가 섭외되지 않았다.

배영웅 매니저가 어두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단 한 명도 섭외가 안 된다네요. 일본도, 구룡도도, 동남아도, 심지어 러시아 에이전트도 안 된대요.”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배우도 없다고요? 그게 말이 되나요?”

“그러게요.”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었다.

‘…예정 엔터테인먼트 놈들 수작인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 미국에서 배우를 공수해 올 시간도 없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를 위로했다.

“지금 선생님께서 호주의 에이전트들과 협상 중이십니다. 그쪽에는 뭐가 있지 않을까요?”

아마 러시아까지 손을 썼다면 호주에도 손을 썼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뭔가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당장 녹화가 내일이었다.

‘맙소사, 내일 녹화인데 여배우 섭외도 안 됐다니. 진짜 개판이네.’

일단 애드리아나라도 섭외해 둬야 할 판이었다.

아무도 없는 것보다야 누구라도 서 있는 게 나을 테니 말이다.

머리를 긁으며 배영웅 실장에게 질문했다.

“크으! 일단 내일 촬영이니까 컨디션 조절하고 있을게요. 혹시 모르니 애드리아나라도 섭외를.”

“네 해둔 상태입니다. 아 그리고 오늘 스케줄 하나 있어요.”

“곧 뮤비 촬영인데 일정을 잡으셨어요? 컨디션 조절을 하고 싶은데요.”

“어차피 녹음 일정도 끝났으니까요. 후작업은 엔지니어와 재호 아티스트님이 하는 일이고. 게다가 이건 이스트 웨이브의 세계 프로모션 일정이라, 좀 중요하기도 해요.”

“이스트 웨이브가 저를 불렀다고요?”

* * *

이스트 웨이브가 묵고 있는 호텔 스위트 룸으로 갔다.

이스트 웨이브는 글로벌 비전 녹화가 끝났음에도 이곳에 머무르며 음악 작업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일단 여기서 시작한 음악 작업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싶다나?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좀 달랐다.

어두컴컴한 방에 미러볼 조명이 가득했다.

게다가, 이스트 웨이브의 신곡 음악이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루비아이의 메인보컬, 데스티니가 불렀던 이스트 웨이브의 싱글이었다.

내가 배영웅 매니저에게 슬쩍 속삭였다.

‘파티 같네요?’

‘파티 같은 게 아니라 신보 리스닝 파티 같은데요.’

파티처럼 시끄러운 곳은 딱 질색이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미국 아티스트는 파티에서 업무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미국에 갔을 때도 파티에서 미팅하자고 들이댔던 가수가 몇 명 떠올랐다.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쿵쿵대는 베이스 음을 느끼며 룸에 들어가니 이스트 웨이브가 사람들과 어울려 양주를 마시고 있었다.

“왓업! 퐈이어 키드!!!”

내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파티인 줄 몰랐네요. 저 파티 취향 아닌데.”

“그러지 말고 잠시 앉아. 너랑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투성이라고!”

“저랑요? 왜요?”

“퐈이어 키드가 이 구역에서 제일 핫한 남자니까! 퐈이어!”

그리고는 이스트 웨이브가 갑자기 자기 술친구를 한 명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음악 프로듀서부터 금융계 임원, 에이전트까지 다양한 직업의 고위층이었다.

그중 눈에 띄는 젊은 사람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스카티 블랙, 이 파티를 기획한 파티 플래너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냥 TV에서 자주 나온 내게 호기심을 가졌을 뿐인 다른 고위직 임원과는 달리, 스카티는 내게 매우 구체적인 관심을 보였다.

“…노엘은 파티에 관심 없나?”

“저는 별 관심 없는데요.”

“그래? 아쉽군. 노엘이 온다면 지금 당장 침대로 뛰어들 여자들이 한 트럭인데.”

“관심 없습니다.”

당장 뮤비가 발등의 불인데, 무슨 여자 이야기인가!

그런데 스카티가 핫핫 웃으며 조금 흥미가 동하는 말을 날렸다.

“뭐, 그루피만 있는 건 아니야. 진짜 노엘이 궁금한 사람도 있어. 그러고 보니, 어제는 율리아 뵘도 노엘이 궁금하다고 하던데.”

율리아 뵘?

설마 그 율리아 뵘인가?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평소 목소리로 스카티에게 물었다.

“율리아 뵘이라면 그….”

“어 맞어. 본드걸 율리아.”

“그 사람이 한국에 있다고요?”

스카티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아니! 일본에 잠시 휴가차 왔어. 2주 정도 있을걸?”

눈앞이 아찔했다.

아니, 침착하자.

일단 기회를 잡아 놓고, 그다음에 놀라도 됐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스카티에게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가능할까요?”

* * *

다음 날 아침.

비원더의 이번 뮤직비디오의 감독을 맡은 아폴로는 터덜터덜 현장에 왔다.

일단 급하게 한국에서 활동하는 모델 에이전시에 연락을 돌렸지만 허사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다들 일정이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누가 자신을 엿 먹이려고 딱 오늘 하루만 모든 백인 배우들을 다 매점매석 해서 계약한 것 같았다.

덕분에 오늘은, 그냥 방송인 애드리아나를 친분으로 써서 촬영해야 했다.

‘그것도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촬영의 프로가 아닌 사람하고 작업하면 대체 얼마나 걸릴지 감이 안 오는데. 게다가 촬영은 하루밖에 못 하고.’

역대 최악의 촬영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촬영장이 술렁술렁 거렸다.

애드리아나가 아폴론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폴론이 얼떨떨하게 인사했다.

“어 안녕 애드리아나, 오늘 도움 고마워.”

애드리아나가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몽롱한 표정으로 아폴론에게 대답했다.

“저…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오늘은 구경만 할게요.”

“뭐? 왜! 너밖에 주연 없어.”

“무슨 소리예요.”

그러면서 애드리아나는 웅성대는 인파의 중심을 가리켰다.

‘뭔 일 있나?’

아폴로는 인파를 헤치고 가서 중심으로 갔다.

그곳에는 금발의 여성이 한 명 서 있었다.

“오! 섭외가 한 분 됐나 보네. 이봐요~. 반갑습니다.”

아폴로가 악수를 위해 손을 쭉 내밀다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설마? 아니야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아니야 그래도 너무 닮았는데. 그래도 그럴 리가 있나?’

아폴로 앞의 여신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 맞아요. 율리아 뵘.”

“……!”

아폴로가 목이 바짝 타는 걸 간신히 참으며 목소리를 냈다.

“여, 여기에는 어떻게?”

“이번 글로벌 비전 예선 보면서 완전 노엘 팬 됐어요! 노엘이 초대해줘서 왔어요.”

“저희… 는 율리아 님 출연비 맞춰 줄 예산이 없는데요.”

어느새 아폴론의 옆에 다가온 권노을이 귀띔했다.

‘에이전트에 말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냥 무급으로 해주시기로 했습니다. 형식은 카메오예요. 주연으로 출연해주시겠지만.’

아폴론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붕붕 돌렸다.

당황한 권노을이 아폴론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선배?”

“아니 안 괜찮지. 나 잠깐 차로 간다.”

“왜요?”

“콘티하고 스크립트 다 다시 짜야지. 할리우드 최고 디바 모셔놓고 이렇게는 못 찍어. 1시간만 줘. 오늘, 내가 마이클 잭슨 ‘스릴러’ 능가하는 뮤비를 찍고 만다!”

쿠오오오옷!

갑자기 전 스태프들의 의욕이 200% 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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