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천채왕은 여유만만이었다.
“너희가 알아서 해봐.”
“네?”
“너희들, 싱어송라이터잖아. 게다가 너희 기획으로 한국 대표까지 됐고. 이젠 우리가 알려줄 게 없어.”
아니 그건 좀.
하지만 천채왕의 스탠스는 확고했다.
[기획은 너희가 해라!]
[우리는 아낌없는 인력과 재력 지원으로 너희들의 비전 구현을 돕겠다.]
뭐 고마운 말이긴 한데, 지금처럼 갑자기 1주일 만에 뮤비를 찍어오란 황당한 미션이 있을 때는 매우 원망스러운 말이기도 했다.
‘그냥 척척 남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데. 잘할 수 있는데!’
처음으로 퇴사 두 글자가 머릿속에 아른거렸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도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뮤직비디오 회의를 해야 했다.
내가 모두에게 통보했다.
“그럼 조금 고민해보고 바로 오늘 저녁 7시에 연습실에서 회의하죠. 천채왕 선생님, 키미 프로듀서님과 베이비 선배님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아, 아폴로 빈 감독님도 섭외해주세요.”
배영웅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곤 섭외를 시작했다.
호흡을 맞춰볼 시간이 없었다.
당장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이미 일해본 사람들이 필요했다.
키미 프로듀서는 우리 소속사의 대표 프로듀서 중 하나.
멤버인 재호 다음으로 많은 곡을 담당해서 비원더의 곡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베이비 선배는 오디션 심사위원을 인연이 된 동 소속사 가수 선배이자 작사가였다.
우리 팀의 작사를 역시나 환희 다음으로 많이 담당했었다.
마지막으로 아폴로 빈은 우리의 뮤직비디오 다수를 촬영했던 뮤비 감독이자 동 소속사 선배였다.
당연히 우리가 믿고 맡길 수 있는 파트너였다.
당장 1주일 안에 뮤비를 완성하려면 이 정도 인력은 필수였다.
아니, 이보다 더 필요할지도 몰랐다.
나는 회사에 요구해야 할 사항들을 조목조목 적기 시작했다.
* * *
3시간 후, 멤버들과 내가 요청한 인력들이 연습실에 모였다.
자주 만나던 사이들이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만난 건 처음이었다.
천채왕 프로듀서가 오늘 모인 이유를 제시했다.
“1주일 안에 뮤비를 만들어 오래. 그것도 신곡을.”
방 안의 모두가 탄식했다.
아폴로 빈이 삐죽 입을 내밀며 말했다.
“솔직히 이거, 한국 가수에게만 늦게 알려준 걸 거 같네요. 미국이나 유럽 시스템상, 그쪽이 1주일 만에 뮤비 찍는다는 건 불가능해요. 자기들과 친한 이들만 뮤비를 미리 찍으라고 했겠죠.”
천채왕도 선선히 그 의견에 동의했다.
“아마 맞을 거야. 일본 대표 베이즈만 해도 벌써 뮤비 찍고 있다는 첩보가 왔으니까. 곡 작업을 이렇게 빨리했을 리가 없지. 말도 안 되는 미션을 줘서, 주최 측과 친해서 미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쪽만 자연스럽게 유리하게 만드는 거지.”
당해보니 상당히 불쾌했다.
하지만 짜증 낼 시간도 없었다.
바로 내가 사람들에게 요청했다.
“저희, 시간이 너무 없어서요. 작곡을 맨땅에서 시작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재호와 키미 작곡가님께서 갖고 계신 곡 중에 저희랑 맞는 곡 어디 없을까요?”
천채왕이 말을 덧붙였다.
“뮤비가 자연스레 그려지는 음악이면 더 좋을 거 같네요.”
재호와 키미 프로듀서가 다양한 곡을 들려주었다.
그중 두 곡 정도가 특히 귀에 감겼다.
A곡은 재호가 쓴 정통 알앤비 발라드였다.
일단 노래 자체가 나쁘지 않고 흡입력이 있었다.
가창력이 있는 비원더에게는 안전빵으로 먹어주는 곡.
게다가 누가 봐도 사랑 노래라 가사를 쓰거나 뮤직비디오 컨셉을 정하기도 수월했다.
그래서일까.
멤버들은 물론 배영웅 매니저까지도 이 곡을 듣고는 표정이 밝아졌다.
방의 다수가 이 노래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B곡은 좀 독특했다.
키미 프로듀서가 작곡한 이 곡은 가요라기보다는… 뮤지컬 같았다.
그것도, 디즈니 뮤지컬 느낌이었다.
클래시컬한 선율에 달콤 로맨틱한 느낌까지, 마치 노래를 듣다 보면 디즈니월드에 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곡은 사실 작업이 쉽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가사가 딱 붙지 않는다.
거기다가 우리가 평소 부르던 알앤비 방식의 멜로디 구조가 아니다 보니, 노래를 부르기에도 살짝 난감했다.
하지만 이 곡은 무엇보다 화면이 상상되는 곡이었다.
뮤직비디오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게다가, 미래를 알고 있는 내게는 더 좋은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슬쩍 분위기를 확인해봤다.
아무래도 방 안의 분위기를 보니 대세는 A곡이었다.
키미 프로듀서가 특히 이 곡을 마음에 들어 했다.
“정통 알앤비 발라드라, 비원더가 가장 자신 있게 부를 수 있어요, 게다가 뮤직비디오 컨셉도 확실하고요. 슬픈 이별을 노래하는 뮤직비디오, 우리 얼마나 많이 찍어봤나요? 이 곡이면 1주일 만에 작업할 수 있어요.”
재호와 환희도 거들었다.
‘음, 이대로 두면 그냥 스무스하게 B곡은 사장 당하겠는데?’
썩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었다.
왜냐면 회귀자인 나는, 이 두 곡의 결과를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A곡은 깔끔하게 묻히고, B곡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게다가 나는 내 기억 속의 B곡 원래 뮤직비디오보다 더 기가 막힌 컨셉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애초에 이 곡 자체가 뮤직비디오를 만들기 너무 좋은 기획이었다.
내가 슬쩍 운을 뗐다.
“저는 B곡도 좋은데요.”
키미 프로듀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가창력을 발휘하기에는 A곡이 더 나아 보여서 노을 군은 이걸 고를 거 같았는데.”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기 나름이죠. B곡도 나름대로 고음 파트는 있으니까요.”
재호가 망설였다.
“글쎄. 우리가 자주 했던 스타일의 곡은 아닌 거 같은데? 이런 걸 도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은 거 아닐까?
“아니지, 지금 A곡의 장점은 ‘쉽다’는 거야. 쉬운 길을 택하는 건 좋은 게 아니야. 옳은 길을 택해야지.”
“시간이 없잖아.”
“B곡도 시간은 줄일 수 있어.”
“어떻게?”
“뮤직비디오 촬영 기획을 줄일 수 있거든.”
뮤직비디오라는 단어가 나오자 아폴론 감독이 급히 내게 시선을 돌렸다.
“뮤직비디오?”
“네 선배. 이 곡을 듣고 바로 제가 뮤직비디오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들어봐 주세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브리핑을 시작했다.
“눈의 여왕이라는 캐릭터가 있습니다. 안데르센 동화 속 여왕인데요. 이 여왕이 대한민국 서울에 옵니다. 거기서 동화도, 사랑도 믿지 않는 냉정한 여의도 금융맨, 원재호와 사랑에 빠지는 거죠. 그러면서 대한민국 서울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환상의 나라가 되어가는 로맨스 이야기입니다.”
간단하게 내가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다.
여의도의 빌딩 숲이 눈의 여왕의 마법을 통해 얼음 궁정이 되는 이미지부터, 서울에 난립한 고양이들이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동물처럼 눈의 여왕의 노래에 맞춰 단체 군무를 추는 장면까지.
그림을 보자 회의 참여자들이 폭소했다.
분위기를 주도한 건 천채왕이었다.
“야 이거 너무 재밌는데? 그림 그려져. 컨셉 확실하네.”
천채왕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B로 넘어갔다.
키미 프로듀서가 내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래요. 사실 이게 정답일지 몰라. 이미 전 세계가 디즈니는 아니까. 아직 우리는 신인급이니까 세계 시장이 이미 잘 아는 걸 가지고 승부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아무래도 분위기는 완전히 B곡으로 넘어간 듯했다.
아폴로가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런 특수효과는 1주일 만에 만드는 건 불가능합니다.”
내가 아폴로 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냥 그런 파트는 뮤비를 만들지 말죠.”
“뭐? 그럼 어쩌자고?”
아폴로 빈이 되물었다.
“디즈니 풍으로 그림을 그려서 그 그림을 덧붙이는 거죠. ‘이런 느낌입니다.’라고요. 애니메이션과 현실을 합치는 거예요.”
“애니메이션은 더 시간이 오래 걸려!”
“진짜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림만 덧붙이자니까요?”
“그게… 부드럽게 될까?”
“도전해보는 거죠. 아니면 정 안 되면 약간 장난같이, 인형극으로 넣을 수도 있고.”
천채왕이 반색했다.
“그래… 어차피 디즈니인 거. 아예 장난처럼 가보는 거야. 영어 마을하고 놀이공원 공연팀 빌려서 찍어보자.”
아폴로 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넵!”
베이비 선배도 재호와 환희에게 시선을 보내며 넌지시 제안했다.
“그럼 재호 군은 키미 씨와, 환희 군은 저와 작업을 하죠. 재호 군은 편곡, 환희 군은 가사와 멜로디를 맡아주세요. 어차피 편곡과 멜로디의 틀은 잡혀 있으니 빠를수록 좋을 거 같습니다.”
“네!”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일이 착착 진행되기 시작했다.
속으로 나는 쾌재를 불렀다.
방금 내가 만든 아이디어는 아직 현재 개봉하지 않은 두 개의 영화를 섞은 기획이었다.
‘뭐 둘 다 섞었으니까, 원 영화에는 타격이 없겠지.’
일단 이제는 뮤비 촬영 때까지 달릴 차례였다.
그때였다.
내 가수 동료 앤젤이 국제통화로 내게 전화했다.
일단 회의는 일단락된 분위기였다.
당장 내가 할 일도 없어 보여 슬쩍 바깥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기로 앤젤이 꽥 소리를 질렀다.
-왜 이렇게 통화를 안 받아!
“깜짝이야. 회의 중이었어. 왜?”
-너한테 엄청나게 도움 될 이야기야.
“뭔데?”
-지금 여기 도쿄 오다이바인데.
“오 부럽다.”
앤젤은 현재 일본 활동 중이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구! 지금 베이즈가 여기서 뮤직비디오 찍고 있다 야. 거의 오다이바 전세 낸 수준인데?
“벌써?”
천채왕 프로듀서가 말한 대로였다.
아무래도 주최 측과 친한 쪽은 미리 정보를 흘려준 모양이었다.
비원더 같은 음악 약소국 출신들은 시간이 다 되기 직전에 공식적으로 알려주었다.
앤젤은 일본 현지 상황을 그대로 계속 알려주었다.
-말도 마. 어마어마한 인파야. 관람차 주변에 너무 많아서 근처에 가지도 못할 지경이야.
나는 앤젤에게 정보 공유에 감사를 표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때였다.
환희가 나처럼 바깥에 나와서 통화를 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통화가 끝났는지, 핸드폰을 집어넣은 채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왜?”
“지금 구룡도에 애드리아나가 있다는데요.”
애드리아나, 나와 예능 프로에 몇 번 만난 후 친해진 한국의 외국인 방송인이었다.
그녀는 늘 휴가 때마다 영어가 통하는 구룡도에 간다고 나도 알고 있었다.
예전에도 뮤직비디오를 찍기 위해 구룡도에 갔다가 그녀를 우연히 만났던 적이 있었으니까.
“근데 너는 애드리아나랑 앙숙 아니었냐? 갑자기 웬 통화?”
“중요한 게 그게 아니라요! 지금 글로벌 비전 중국 대표 메이가 구룡도에 와있데요!”
메이는 주로 오페라 위주로 활동하는 정통 클래식 오페라 가수였다.
이번에 급작스럽게 글로벌 비전 중국 대표로 선발되었다.
“근데 지금 구룡도에? 왜?”
설마….
“뮤직비디오를 찍고 있다는데요.”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 생각보다 먼저 미션이 유출된 모양이었다.
FM대로 1주일밖에 남지 않은 우리만 바보가 될 판이었다.
“정말이지. 그렇다면 이 비밀무기를 쓸 수밖에….”
내게 딱 하나, 이 상황을 반전시킬 아이디어가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