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내가 손짓하자 턱시도를 입은 4인의 서양인이 걸어 들어왔다.
흑인과 백인, 남자와 여자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합친 독특한 구성의 그룹이었다.
재호와 환희의 얼굴에 당혹감이 퍼졌다.
재호가 내게 물었다.
“저분들 누구셔?”
내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바로, 4인의 그룹이 말도 없이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를 들은 재호와 환희의 얼굴에는 더더욱 놀람이 번졌다.
얼굴도 모르는 외국인 4인이 우리 비원더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시작은 오명, 이후에는 ‘음식 남녀’ 그리고 ‘현기증’까지.
그동안 우리가 불렀던 대표곡들을 아카펠라로 불렀다.
아무 악기도 없이, 그저 네 명의 목소리만으로도 풍성하게 곡을 채웠다.
나는 4인의 노래를 보기보다는 이에 반응하고 있는 재호와 환희의 표정을 관찰했다.
점점 둘의 표정이 놀람에서 경악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준 힌트를 캐치한 모양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그제야 4인의 외국인들이 밝은 표정으로 우리에게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비원더, 반갑습니다. 우리는 빅4라고 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팬입니다. 노래 잘 봤습니다.”
재호랑 환희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재호와 환희에게 말을 이어갔다.
“이분들은 작년에 글로벌 비전 본선에 출전하셨던 아카펠라 그룹이야. 아일랜드 대표로 출전하셨지. 몇 위까지 가셨죠 케이트?”
흑인 여성이 대답했다.
“8강까지 갔어요.”
“그래, 8강. 이게 8강의 팀이야. 어떤 거 같아?”
재호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어… 음 그러니까… 굉장히 재미있네요. 아니, 결과적으로 굉장히 압도적인 무대였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재호가 예의 바르게 말했지만, 대충 어떤 말을 숨겼는지는 알 것 같았다.
케이트가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사실 우리 개개인은 비원더만큼 유려한 보컬은 아니에요.”
백인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노엘. 노엘 군과는 비슷한 레벨의 가수도 없죠.”
환희가 슬쩍 물었다.
“하지만 이 무대는… 비원더에 밀린 거 같지는 않았는데요.”
‘이제 환희는 아예 하늘이 성격으로 가기로 했구만?’
아무래도 스캔들에, 팬과의 고백에, 여러 일을 겪으며 완전히 두 인격이 통합된 모양이었다.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내가 환희에게 대답했다.
“그게 팀워크의 힘이야. 그렇죠?”
흑인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요. 이 팀의 하모니를 담당하는 것은 재호 군이죠? 좋은 편곡이에요. 특히 노엘의 압도적인 보컬 기량을 잘 보여주더군요. 그게 비원더 스타일이죠. 저희 빅4는 좀 다르게 가요. 저는 비트박스를 담당하지만. 절대 비트박스가 돋보이게 하지 않아요. 정확히는 아무 파트도 일정 이상 돋보이지 못 하게 하죠. 팀의 합 위주로 가는 게 제 취향이라.”
재호가 질문했다.
“이거, 편곡을 어떻게 하시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그냥 녹음만 딸 수 있어도 엄청난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그걸 위해서 저희가 왔어요.”
재호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이걸 위해서요?”
내가 슬쩍 말을 끼어들었다.
“내가 회사에 부탁해서 섭외한 거야. 한 달간 이분들과 함께 연습하기로 했어.”
“한 달이면 대회까지 시간 전부잖아?”
“그래. 한 달 동안 팀워크를 키워 보자고. 글로벌 비전은 사실 막 20~30년씩 함께 해온 팀들이 많이 참여해. 솔로 가수라고 해도 그들이 대동하는 밴드 등은 10년 넘게 함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지금 1~2년 함께 한 비원더가 좀 서로 친한 편이라 해도 한계가 있어. 그래서 팀워크를 키우기 위해 이 팀을 섭외한 거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글로벌 비전 경험이 있고, 우리가 배울 만한 모범적인 팀 중, 우리가 섭외할 수 있는 팀을 데려와야 했으니까.
다행히도, 비주류 장르인 아카펠라 팀인 ‘빅4’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작년에 글로벌 비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지금은 도쿄 디즈니랜드를 거점으로 해서 다양한 아카펠라 활동하고 있었지만, 다른 팀에 비해서는 시간을 빼기 수월했다.
어찌 되었든 아카펠라는 비인기 종목이었으니까.
게다가 아카펠라라면 3인조 보컬 그룹인 비원더가 배울 점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그들의 무대를 확인해보니 우리의 코치로 딱 적합한 사람들이었다.
“앞으로 팀워크 관련해서 다양한 걸 알려주실 예정이야.”
재호랑 환희는 얼떨결에 악수하였다.
빅4 멤버는 백인 남성 1인을 제외하고 모두 내일 보자며 숙소를 나갔다.
재호는 빅4의 무대를 상세하게 영상으로 살펴보더니만 내게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편곡이 정말 우리랑 다르네. 게다가 인간의 목소리만 가지고 한다는 제약이 있어서 그런지, 밴드 편곡 위주인 나보다 훨씬 더 도전적인 편곡으로 가득해.”
“당연하지. 오히려 그 제약이 창의성을 가져다줬다니까?”
“이 편곡은 배워야겠어. 근데 다른 거 배울 게 있을까? 실력 문제가 아니라 장르가 너무 다르잖아.”
가만히 우리 둘을 지켜보던 환희도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저희는 아카펠라 그룹은 아닌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둘의 말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그건 차차 알게 될 거야. 참고로 말하자면, 글로벌 비전 주최 측에서 평가하는 우리 레벨은 C-야.
“C-…!”
재호와 환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리 대한민국이 세계 시장에서 딱히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시절이라지만, 너무 저평가였다.
환희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잘못된 평가네요. 구글 검색어 상위권을 휩쓸고 있는 노을형이 있는 팀인데.”
나는 허허 웃었다.
“고마워.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긴 한데. 여하튼 지금 본사 주최 측의 평은 그렇다는 이야기야. 우린 얕보이고 있어. 참고로 지금 빅4. 이 팀은 평가가 B+였어. 우리보다 위 등급의 팀이야.”
내 말을 들은 재호와 환희가 나와 시선을 맞췄다.
둘의 눈이 승부욕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빅4의 레벨은 ‘소수 장르 쿼터’의 덕분이긴 했겠지만.’
내가 노린 것은 둘의 승부욕 자극이었다.
그리고 내 노림수는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내가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이거 일단 B 수준까지는 만들어보….”
재호가 언성을 높였다.
“야! 무슨 B야. 우승해야지.”
환희도 말을 보탰다.
“본때를 보여줘야죠.”
갑자기 두 사람이 파이팅하기 시작했다.
좋은 일이었다.
앞으로 엄청난 트레이닝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빅4 중 유일하게 숙소에 남은 백인 남성에게 말했다.
“부탁드려요 존.”
* * *
엉뚱하게도, 빅4에서 베이스를 담당하는 ‘존’이 우리에게 알려줄 부분은 체력이었다.
“저는 베이시스트입니다. 악기가 아닌 목소리로 베이스 음을 만들죠. 아카펠라에서는 저음을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비원더에는 딱히 필요가 없습니다.”
재호가 동의했다.
“비원더는 기본적으로 악기 연주로 베이스 음을 잡으니까요.”
빅4는 악기가 없이, 베이스와 비트박스가 악기를 담당했다.
비원더가 따라 할 수는 없는 방식이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베이스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걸 알려드리려 합니다. 글로벌 비전 본선에서 활약하려면 꼭 필요한 능력입니다.”
환희가 서둘러 재촉했다.
“그게… 뭔가요?”
“그건 바로. 체력입니다.”
재호랑 환희 눈빛에서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가수가 체력 단련이 중요하다는 건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존이 말하고자 하는 체력은 그 수준이 아니었다.
존이 내게 되물었다.
“노을 군.”
“네.”
“글로벌 비전 본선이 몇 번 치러지는지 알아요?”
“128강이니까… 7번이네요?”
“맞습니다. 왜 7번이냐.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미, 남미, 오세아니아. 총 7개 지역에서 대회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2주에 한 번씩, 말도 안 되게 타이트한 스케줄이죠. 시차 적응조차 어렵습니다.”
재호가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글로벌 비전 맨날 봤는데.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결마다 대륙이 바뀌었어요. 상상도 못 했네요.”
존이 말을 계속했다.
“이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내가 대답했다.
“체력전이 되겠군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타이트하게 경쟁해야 하니까. 게다가 매번 1:1 대결이라, 엄청나게 정신력과 체력이 소모될 테고요. 가수는 그렇다 치고, 스태프들까지 녹초가 되겠는데요?”
당장 하우스 밴드는 물론 매니저들까지, 스태프들의 건강이 심히 염려되었다.
존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를 표했다.
“맞습니다.”
환희가 투덜댔다.
“그냥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매번 한 장소에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일부러 고생시키려는 거도 아니고요.”
내가 환희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그건 아니야.”
“왜죠?”
“월드 스타는 실제로 늘 그런 스케줄을 소화하니까.
재호와 환희가 허에 찔린 듯, ‘아’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말을 이어갔다.
“존, 존도 그러시죠?”
“그렇죠. 저희야 뭐 대단한 스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글로벌 비전 덕에 아카펠라 그룹치고는 인지도가 생겼으니까요. 보통 디즈니랜드 투어를 다니죠. 그곳에는 아카펠라 그룹 니즈가 있어서. 그 외에도 전 세계 아카펠라 축제도 다니고. 앨범을 내면 월드 투어도 합니다. 한번 시작하면 한 1년 정도 집에 못 들어가는 거 같네요?”
환희가 깜짝 놀란 듯 입을 크게 벌리며 되물었다.
“1년씩이나요??”
“미국 유럽만 돌아도 반년은 넘게 걸리니까요. 구룡도, 호주, 중남미 도시 하나 정도 추가하면 그냥 1년이에요.”
내가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가 ‘월드 스타’가 된다면, 이 정도 스케줄은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거야. 그러자면 단순히 달리기나 헬스를 열심히 하는 정도의 체력으로는 안 돼. 시차 적응 잘하고. 비행기에서 12시간을 보내도 체력을 유지할 수 있고, 절대 아프지 않고! 이런 종류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거지. 그걸 존이 알려주실 거야. 그렇죠 존?”
싱글싱글 웃고 있던 존이 갑자기 웃음을 거두며 대답했다.
“그럼요. 다양한 관리를 해야죠. 그럼 일단 시작해 볼까요? 한 달이면 체력을 부치기엔 시간이 빠듯합니다. 편한 복장 입고 나오세요.”
* * *
예정 엔터 백진우 이사는 분노에 가득 차 씩씩대고 있었다.
자신이 갖은 애를 써서 글로벌 비전 한국 대표로 만들려 했던 ‘김지태’가 계약 파기 통보를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운전사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있었다.
차종은 벤츠 500, 백진우 본인이 자신처럼 성공 가도를 달리는 남자에게 어울리는 차는 이 정도라며 회사에 우겨 리스로 구한 회사 차였다.
화가 잔뜩 난 그가 가지고 있던 노트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
퍽!
노트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혔다.
백진우 이사가 씩씩대며 메고 있던 넥타이를 벗어 앞 좌석에 던져 버렸다.
늘 메고 있던 은갈치 색 양복에 붉은 넥타이, 그리고 실크 셔츠까지.
모두 최고급이지만, 너무 최고급만 모아 놓아서 되려 고급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백진우 의사가 읊조렸다.
“설마 김지태 이 자식이 회사를 나갈 줄이야. 미리 조져 버렸어야 했는데.”
백진우는 김지태에게 잔혹한 보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지태는 이미 가요계에 미련이 없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연예계에 뜻이 없다면 복수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진짜 복수할 대상은 김지태가 아니라, 비원더일지 모르지.’
비원더는 사사건건 자신의 계획에 방해를 놓더니만, 결국 자신이 차지하려 했던 글로벌 비전 한국 지역 예선 우승을 해버렸다.
무엇보다, 김지태와는 달리 비원더는 앞으로도 연예계에서 앞일이 창창했고, 야망도 있었다.
그러니, 부숴버릴 보람이 있었다.
비원더를 쓰러뜨릴 방법은 있었다.
‘그 녀석이라면… 충분하겠어. 비원더를 파멸시킬 최종병기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