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35화 (235/280)

제235화

그곳에는 ‘민티’의 오너 그룹의 딸, 마리가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못 알아봤다.

늘 프로페셔널한 정장을 입었던 그녀가 비키니 수영복에 셔츠를 걸친 차림이었으니까.

그러나 자세히 보니, 곧 낯익은 얼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알아보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깜짝이야! 미국으로 안 돌아가셨나요?”

“이 파티. 제가 주최한 거예요. 아는 친구 시켜서. 미국 가기 전 마지막 일정이에요.”

“아하.”

부잣집은 뭐 하고 노나 했더니만, 이런 으리으리한 파티를 주최하면서 노는구나 싶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호텔의, 가장 비싼 수영장에서 DJ와 댄서를 불러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일이 취미가 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재벌이란 느낌이군. 하긴 미국 재벌이니까 얼마나 돈이 많겠어.’

나와는 관계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왜 불렀는지 궁금했다.

배영웅 실장의 보고에 따르면, 나를 초대한 것은 이 파티의 주최자였다.

즉 마리란 뜻이다.

내가 그녀에게 질문했다.

“누가 저를 이런 저랑 안 어울리는 행사에 초대했나 했더니, 마리 님이셨군요. 어떤 일로 저를 부르셨나요?”

마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안 어울린다니요? 세계 최고의 오디션에 기적적으로 진출한 기린아! 권노을 님이야말로 파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죠. 컨디션 문제만 아니면 초대 가수를 부탁하고 싶은 정도인데요?”

“사양하겠습니다.”

시끄러운 곳은 질색이었다.

게다가 이미 자경 형이 무대를 찢고 있기도 했고.

이곳 vip룸까지 관객들의 함성이 들려올 정도로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발라드 가수인 나는 이런 분위기에 적응이 잘 안 됐다.

마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게 말을 걸었다.

“수행원에게 들었어요. 대충 얼굴만 가리고 돌아다니다 관객에게 둘러싸였다면서요?”

“네.”

“바보 아니에요? 당신, 월드 스타라고요. 존 레논처럼 팬에게 총이라도 맞고 싶어요? 당연히 철통 방비를 해야죠.”

뒤에서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배영웅이 허리를 굽혔다.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수행 인원을 5~10명으로 늘리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주최 측 입장에서도 글로벌 비전의 슈퍼스타를 잃고 싶지는 않으니까.”

‘내가 글로벌 비전의 슈퍼스타라고?’

닭살 돋는 말이었지만, 솔직히 듣기 싫지는 않았다.

나는 슬쩍 배영웅 실장을 두둔했다.

사실 근본적으로는 우리 측의 잘못만은 아니었기도 했기 때문이다.

“제가 풀 파티를 안 가봐서 이 정도면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게다가 정말 안전이 중요하다면, 저를 굳이 부르실 필요가 없던 거 아닌가요? 만약 부르신다면 직접 경호해주셔도 도움이 됐겠는데요.”

‘본인들이 경호하면 됐다.’라는 부분에서는 정곡을 찔린 듯, 마리가 한발 물러섰다.

“아무튼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배영웅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재빠르게 화제를 다시 내가 궁금하던 질문으로 돌려놓았다.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저를 부르셨나요?”

“그냥, 부탁 좀 드리려고요.”

“부탁이요?”

마리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글로벌 비전은 저희 민티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또 그 이야기인가.

이윤강 PD에 하소연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미국 프로그램은 정말 과할 정도로 스폰서가 하나하나 모든 일에 참견한다는 말이었다.

편집 업무가 한국보다도 몇 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출연 가수인 내 입장에서는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저 한국 방송보다 좀 PPL이 많구나 싶은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닌 거 같았다.

‘민티’ 오너 가문과 친한 예정 엔터의 가수들이 몇 번이나 불공정한 혜택을 받았다.

결국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투표수와 심사위원 득표에 따라 비원더가 우승했긴 했지만.

그러고 보면, 편집을 불공정하게 돌릴지언정 조작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세계 대회에서는 예정 엔터 소속보다 더 민티가 밀어주고 싶은 가수들이 많을 테니,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어도 실력으로 응수해야겠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폰서 측에서 제 발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본선에서는 예정 엔터 소속이 아니라, 우리를 밀어주겠다는 건가?’

내가 이렇게 고민하는 동안, 마리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에게는 스타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을 뒤흔드는 인플루언서들. 그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이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민티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얼핏 좋은 말이었지만, 신기루처럼 알맹이 없는 이야기였다.

“잘 부탁드린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일일이 아이처럼 지시를 드릴 수는 없어요. 저희가 묻지 않더라도. 그쪽에서 먼저 민티를 홍보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회사와 좋은 관계를 맺으면, 대회를 치르기가 훨씬 쉬워질 거예요.”

알아서 꿇어라, 뭐 그런 뜻인가 보다.

사실 크게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다고 마냥 굽신거리기에도 찜찜했다.

“뭐, 최대한 성심성의껏 해보겠습니다. 가능하면요.”

“저희와 함께하시면 본선에서는….”

“잠깐만요.”

마리의 말을 내가 끊었다.

딱 봐도, 이다음부터 마리는 선을 넘을 속셈이었다.

방송 편집을 유리하게 편성한다든지, 다음 미션을 미리 알려준다든지, 유리한 순서에 넣어 준다든지, 아무튼 불공정하게 우리에게 이득을 줄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왠지, 덥석 받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껏 오디션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이었다.

시청자는 제작진이 미는 후보를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엄청난 반감도 함께 얻었다.

정황상 조작도 없는 방송에서, 그런 식으로 민심을 잃었다간 되려 역풍을 세게 맞을 수 있었다.

굳이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내일 신문 1면. 방송국 뉴스에 나와도 되는 말만 해주세요. 그거만 듣겠습니다.”

마리가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서는 살아남기 어려울걸요? 전 세계 최고의 가수들이 모이는 토너먼트 대회인데.”

“상관없습니다.”

마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뭐라구요?”

“어차피 우승한들, 그걸로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요. 게임은 계속되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어차피 늘 과정인데. 과정이라도 제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마리는 마음에 안 드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래도 이제는, 칼 자르듯 싹둑 자르는 게 아니라 적당히 봉합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렇다고 민티랑 싸우자는 건 아니고요. 홍보에 도움을 들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말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재벌가 공주님이라서인가. 거절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군.’

그녀가 나를 눈빛으로 ‘가만 안 두겠어요.’라고 쏘아보는 듯했다.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언제든 초대해주세요.”

마리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간신히 말했다.

“그래요.”

아무래도 이 사람, 한 번도 타인이 자기 뜻을 거스르는 걸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굉장히 조심해서 대화해야 할 타입이군.’

* * *

다음 날 아침, 배영웅 실장과 함께 천채왕의 회의실에서 천채왕과 미팅을 했다.

주요 안건은 물론, 어제의 풀 파티에서 들었던 마리의 제안이었다.

내 말을 다 들은 천채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한 거 같네. 굳이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또 너무 과하게 의심할 필요도 없는 거 같아. 좀 수상한 거 같기는 한데. 그래 봐야 음료 회사가 이상한 짓을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

“그래도 뭔가 너무 분위기가 수상해요. 대놓고 스폰을 제안하다니. 원래 미국 방송은 이런가요?”

“글로벌 비전은 미국 방송도 아니야. 사실 나도, 글로벌 비전은 처음이긴 해. 이런 사이즈의 방송도. 음악 대회도.”

“그러신가요?”

“당연하지! 북미 시장은 우리도 성공해본 적이 없어. 이제 비원더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가수라고. 내가 다 알기엔 너무 컸지 솔직히. 이제는 그냥 우리는 너희의 리딩을 따라서 서포팅만 해줄 뿐이야.”

실제로 천채왕은 요즘은 적극적으로 우리의 방향을 지시하지 않았다.

되도록 우리 의견을 따라주었다.

그보다는 회계부터 마케팅까지, 우리가 실행하고 싶어 하는 계획을 지원하는 데에만 모든 힘을 쏟았다.

내 입장에서는, 자유롭게 내 계획을 시험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나는 수사기관도 아니고, 탐정을 고용할 생각도 없다.

뭔가 대응하려면 천채왕과 배영웅의 힘이 필요했다.

“그래도 뭔가 너무 이상한 거 같습니다. 민티에 대해서 더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나도 그렇긴 해. 알았어. 한번 휴민트를 동원해볼게. 배영웅 실장님도 같이 알아봐 줘요.”

배영웅 실장이 ‘넵!’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천채왕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계속했다.

“뭔가 있다면 이번 주 내로는 알려줄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어제 제가 부탁드렸던 건은 잘됐나요?”

사실은 어제, 방송이 끝나자마자 천채왕 프로듀서에게 요청한 것이 있었다.

글로벌 비전 본선을 대비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였다.

“야 노을이 너는 어떻게 우승한 그 날 바로 다음 트레이닝을 생각하냐. 세상 가수 지망생들이 다 너 같으면 진짜 프로듀싱하기 편할 텐데. 아주 그냥 이뻐 죽겠어.”

“과찬이십니다. 그럼 그분들,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그게 말야….”

* * *

천채왕과 미팅을 마치고, 배영웅 매니저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딱 봐도 보안 인원이 늘어난 것이 느껴졌다.

배영웅 매니저 말에 따르면 무단 잠입을 시도하는 인원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길거리마다 나에게 쏟아지는 시선과 비명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숙소 거실에서는 재호와 하늘이가 비디오테이프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내가 슬쩍 끼어들며 말했다.

“뭘 그리 땅 꺼져라 한숨을 쉬냐?”

재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너무 잘해! 이 사람들.”

스웨덴 대표팀의 무대였다.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전형적인 포크 그룹이었지만, 하모니가 엄청났다.

아바를 연상시키는 상쾌한 화음이 뿜어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단한데?”

하늘이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뭔지 모르겠는데요. 이상하게 저희보다 다들 잘하는 거 같아요.”

“그야, 세계 대회니까 당연한 거 아닐까?”

환희가 혀를 차며 말했다.

“형은 긴장되지도 않아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요?”

“아니 뭐, 긴장은 되는데. 너희 말이 맞으니까. 인정해야지 뭐 어쩌겠어.”

재호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솔직히 노을이 너만큼 노래 잘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아 고맙다.”

“나만큼 작곡을 잘하거나, 환희만큼 가사 센스가 좋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구. 솔직히, 우리 밴드가 연주력도 저 사람들보다 더 좋은 거 같아. 하나하나 따로 떼어 놓으면 모두 우리가 비벼볼 만한 사람이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무대 전체를 놓고 보면 뭔가 부족하단 말야? 이게 뭐가 문제일까?”

“아 그래?”

나는 짐짓 태연한 척 재호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배 실장님에게 우승자들 녹화 테이프를 멤버들에게 보여 달라고 부탁한 보람이 있군.’

나는 이미, 재호와 환희가 깨달은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미국 대표인 ‘루비아이’의 무대를 봤을 때부터 그랬다.

분명, 메인 보컬 애드리아나 정도만 나와 비교될 만한 보컬이었다.

그 외에는 개개인의 실력이 놀랍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들의 합쳐서 만든 무대는 우리보다 압도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어떻게 하면 이를 해결할 수 있을지 오디션을 치르면서도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해답도 찾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해답을 실행하려면, 나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다른 멤버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멤버들이 스스로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게 유도했다.

둘이 문제를 인식한 이상, 내가 해답을 말해 줄 차례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불렀다.

“자! 들어와 주세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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