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3화
“저에게는 애인이 있습니다.”
화면 속 김지태가 진지하게 자신의 열애설을 고백하고 있었다.
애인의 얼굴은 블러 처리되어 있었지만, 이야기는 가감 없이 모두 나왔다.
코러스 시절 알고 있었고, 이제는 싱글맘이 된 애인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였다.
매운맛 동영상에 관객들은 경악했다.
이미 기사로 다 발표된 이야기였지만, 편집된 영상으로 직접 김지태의 입을 통해 전달되니 훨씬 더 임팩트가 생겼다.
어제, 김지태와 통화했다.
김지태는 예정 엔터의 수많은 반칙에 질려, 회사를 나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뚱맞게 내게 ‘선물’을 주겠다고 말했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선물이란 게 뭔가요?”
“참고로. 사퇴는 안 합니다. 권노을 후배가 원하지 않으니까. 아름다운 대결을 원하니까. 대결을 원하면 상대해 줘야지!”
“그러면….”
“내가 애인 공개 하겠습니다.”
“……! 의혹 기사가 사실이었나요?”
나는 짐짓 시치미를 뗐다.
“그렇게 됐습니다. 어차피 이 회사 나가면 다 걸릴 거예요. 회사는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제는 알려져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곧 알려질 거, 하루 이틀 먼저 알려진 들 제겐 상관없습니다.”
‘이혼소송이 끝났기 때문이군.’
여자친구의 신변이 정리된 그에게는 더는 거칠 것이 없었다.
김지태가 말을 이어갔다.
“주환희 후배가 곤란해졌으니까. 이걸로 공평하게 한번 붙죠. 이게 제 선물입니다. 이걸로 대결은 공평해진 겁니다?”
* * *
지금 우리는 김지태가 준 ‘선물’을 수령한 셈이었다.
그리고 영상 이후 바로 그가 준비한 무대가 이어졌다.
역시나, 힙합 댄서 출신다운 깊이 있는 장르 이해도의 무대였다.
항상 선글라스를 끼던 그가, 스냅백에 힙합 패션을 걸치고 오니 미친 듯이 잘 어울렸다.
게다가 그는 깔끔하게 바운스로 리듬을 타면서 곡을 소화했다.
알앤비 보컬이었지만, 랩 못지않은 쫀득한 리듬감이 돋보였다.
‘그냥, 사퇴해달라고 할 걸 그랬나?’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재호가 나를 톡 건드렸다.
“야, 우리도 잘했어.”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래.”
어차피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이보다 더 잘할 방법은 없었다.
이제는, 그냥 운명에 맡길 뿐이었다.
다음은, 미리 준비했던 단체 곡 차례였다.
사실, 득표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간벌기용 무대로 얼핏 보이는 무대다.
하지만 의외로 이 단체 곡이 중요했다.
이 단체 곡이 또 은근 성스러워지는 떼창이었다.
프로그램을 깔끔하게 마무리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이 곡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부분이 내게 주어졌다.
문제는, 그 전에 후렴을 김지태가 너무 기가 막히게 불러 버렸다는 점이었다.
진짜 혀를 내두르게 하는 완벽한 테크닉이었다.
하지만 나도 질 수 없었다.
어차피 득표와는 관계없는 무대건만, 왠지 김지태에게는 지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랑 너무 비슷한 느낌이야.’
조금 전 무대도 깜짝 놀랐다.
내가 경력을 쌓아, 솔로 가수가 된다면 ‘이렇게 하고 싶다!’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더랬다.
그 느낌을 그대로 살린 무대를 김지태가 보여주었다.
솔직히 소름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지기 싫었다.
‘권노을 후배 당신에게는 질 수 없습니다’라고 매번 앵무새처럼 반복했던 김지태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 * *
무대가 끝나고, 드디어 결과 발표의 시간이 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 제게는 결과표가 나와 있습니다.”
심사위원장 바네사가 대본을 들고 무대 한가운데에 섰다.
한 명씩 차례대로 발표했다.
‘음… 아마도 우리는, 그래도?’
“4위는 바질 리스크입니다!”
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아쉽지만, 인정합니다. 마지막 두 무대는 저희에게 익숙한 장르가 아니기도 했고. 솔직히 고전했습니다. 그래도 세계무대를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세계 여러분들, 보고 계시죠? 곧 찾아가겠습니다.”
윙크로 마무리했다.
깔끔한 무대인사였다.
다음 차례는 3위였다.
“3위는… 강민정!”
강민정 선배는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소감을 발표했다.
모두 감사했고, 앞으로는 새로운 캐릭터로 뮤지컬 무대에서 다시 찾아뵙겠다는 정석 멘트였다.
여기까지는, 내 예상대로였다.
확실히 두 사람의 결승 무대는 우리 보다 밀렸다.
하지만 김지태의 무대만은 자신하기 어려웠다.
우리가 더 신선했지만, 김지태가 더 안정적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취향 차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순위를 발표하는 심사위원장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건….”
관객이 웅성거렸다.
“우우!”
“빨리 발표해 시간 끌지 말고.”
“생방송이라 시간 다 정해져 있는 거 알아요.”
바네사가 대본을 접더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마지막 1위 후보! 김지태와 비원더는 완전히 동점입니다!”
비원더와 김지태는 물론, 제작진까지도 깜짝 놀랐다.
바로 눈앞에 있던 PD는 사색이 되어 마이크로 어딘가에 따따부따 외치고 있었다.
아마 이런 상황에 대비한 매뉴얼대로 진행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듯했다.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인 후, 발표를 이어갔다.
“그래서, 이미 저희가 발표했던 룰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의거하면 완전 동점인 경우, 심사위원 3인의 의사로 순위를 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 먼저, 이스트 웨이브.”
“왓? 나부터야?”
이스트 웨이브는 진심으로 당황한 듯, 인상을 구겼다.
심사위원장 바네사가 재촉했다.
“시간 없어요!”
“오케이! 오케이! 좋아. 둘 다 훌륭했어. 하지만… 이건 미스터 킴이야. 둘 다 훌륭했지만. 킴의 리듬감이 너무 압도적이었어. 리듬 타는 방식만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고 봐.”
믿고 있었던 이스트 웨이브 표를 잃어버렸다.
대회 시작부터 비원더에 주목했고, 우리를 이 대회에 영업한 대표적인 ‘친 비원더’인 이스트 웨이브마저 김지태를 선택했다.
‘이거는… 끝난 건가?’
다음 순서는 미스터 로메로였다.
미스터 로메로는 잠시 고민하더니, 눈을 번뜩 뜨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미스터 로메로는 우리와 거의 접점이 없었다.
여태껏 멘트에서도 은근히 김지태가 가장 기본기가 좋다며, 그를 띄워주었다.
아무래도 결승을 이기기는 그른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비원더로 하겠어.”
“그렇지!”
하늘이가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나도 어안이 벙벙했다.
미스터 로메로가 말을 이어갔다.
“힙합은 애티튜드야. 삶의 방식이지. 음악 자체가 좀 거친 느낌이었을지언정. 비원더는 좀 더 힙합적인 태도였어. 특히 미스터 주.”
“네넵!”
“진솔한 가사, 나이스야. 그게 힙합이지. 킵 잇 리얼. 마치 내 머리카락처럼 말이야. 이건 비원더의 승리야.”
뭔가 좀 이상한 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결론이 우리 마음에 들었으니 흡족했다.
졸지에 바톤이 심사위원장 바네사에게로 넘어갔다.
바네사가 눈을 질끈 감고 살짝 짜증을 냈다.
“아… 하필 또 왜 나야.”
별수 없었다.
심사위원장이 최후의 결론을 내려야 하는 순간.
그녀가 김지태와 비원더 3명과 시선을 맞추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짜 어려웠어. 딱 대등한 무대라고 생각해. 왜 관객 표가 딱 똑같이 나왔는지 알겠어. 이럴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그만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무대라는 거지. 그렇다면….”
재호가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아우. 그냥 빨리 좀 결론 말해주면 어디 덧나? 심장에 안 좋다구.’
재호가 그러거나 말거나, 바네사는 무대 위를 어슬렁거리면서 김지태를 쳐다봤다.
“완성도는 김지태야. 의심할 여지가 없어. 우리가 아는 정통 서던 힙합 리듬에, 알앤비를 강렬하게 더했지. 이렇게 훌륭한 힙합 솔로곡은 미국에서도 찾기 힘들 거야.”
아, 이렇게 나가리인가.
뭐, 어떻게 우승을 못 하더라도, 글로벌 비전에서의 경력을 가지고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할 수는 있을 터였다.
다만, 좀 돌아갈 터였다.
입맛이 썼다.
그때였다.
바네사가 갑자기 홱 몸을 돌리더니만, 비원더를 응시했다.
아니, 정확히는 나와 시선을 맞췄다.
“하. 지. 만. 권노을은, 비원더는. 이 나라에서밖에 볼 수 없는 무대를 보여줬어. 동양적인 스케일이 강조된 음악, 철저하게 한국적인 무대와 의상, 그러면서도 전 세계 팬들을 배려한 영어 가사,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연출까지! 이런 무대는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을 거야.”
‘그럼 우리라는 뜻인가?’
바네사는 다시 고개를 돌려 무대 중앙에 우뚝 섰다.
그리고는 대본을 던져 버리고, 발표를 시작했다.
“우리는 동양의 소국 코리아에 왔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빛나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야.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곳만의’ 느낌을 보여준 건 비원더야. 이 대회를 빛내줄 대한민국 대표는… 축하해. 비! 원! 더!”
“와!”
재호가 펄쩍 뛰어 어퍼컷을 날렸다.
재호 인생 가장 감정적인 순간일 터였다.
하늘이는 아예 무릎을 꿇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부들부들 떠는 게, 아무래도 얘 우는 거 같다.
나 또한, 어안이 벙벙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김지태와 바질 리스크, 강민정은 우리에게 악수하고는 무대 뒤로 비켜주었다.
바네사가 어느새 우리에게 다가왔다.
마이크는 먼저 오늘의 화제의 인물, 주환희에게로 갔다.
아니, 정확히는 ‘주하늘’로서 첫 인터뷰를 했다.
너무 기뻐서 도저히 연기를 할 틈이 없었다.
“너무너무 너무 좋구요! 잠도 자지 못하고 준비했던 멤버들 노력이 보상받은 거 같아 기분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팬분들.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갚겠습니다. 저 원래 머리도 내리고, 안경 끼고, 옷도 못 입고. 진짜 음악밖에 모르는, 그런 찌질한 사람이에요. 진짜 딴 데 한 눈 안 피우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환희는 흥분한 채로 소감 인터뷰를 마쳤다.
팬들은 뭐, 제법 좋아할 거 같은 인터뷰였다.
‘근데 너… 가족 이야기는 안 했다? 엄마가 제법 무서웠던 거 같은데….’
다음 소감 차례는 원재호였다.
“가족들, 팬들, 부모님, 스태프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회사 분들도 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푹 쉬고 좋은 모습으로 뵐게요.”
역시나 원재호.
깔끔하게 빠진 부분 없이 인터뷰를 끝냈다.
다음 인터뷰는 내 차례였다.
바네사가 마이크를 내게 가져다 댔다.
“자! 마지막으로 노엘?”
“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말을 시작했다.
“동생에게 감사합니다. 제가 노래하는 이유입니다. 팬분들 너무 감사하고요.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부모님, 감사합니다.”
그 외에도 우리를 도왔던 스태프들까지 하나하나 호명했다.
그리고 또 빼먹어선 안 될 조력자가 있었다.
“그리고 뒤에 서 계신 TOP4 3팀들! 멋진 경쟁자가 돼 주셔서 최선을 다해 무대를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대한민국, 글로벌 비전 첫 진출로 알고 있는데요. 멋지게 보여주고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얼떨떨하게 소감을 마무리했다.
방송을 마무리하려는 순간, 갑자기 바네사가 마이크를 다시 집었다.
“잠깐!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뭐지?’
비원더 3인 모두 바네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바네사가 흥분으로 씨이익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글로벌 비전 한국 대표팀에게는 특별 포상이 주어집니다. 민티에서 직접 쏘는 거니 감사하며 받아 가세요.”
‘…또 PPL이냐.’
한숨이 나왔다.
또 뭐, 민티 음료가 가득 담긴 작은 냉장고 같은 거겠지 뭐.
“포상은… 민트색 부가티 1대!”
뭐라고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