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화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그런 찌라시를 봤던 기억이 났다.
“실력파 발라드 가수로 늦게 인정받아 많은 인기를 얻은 가수 A는 40살이 넘은 지금도 미혼이다.”
여기까지만 봐도, 누가 봐도 김지태일 확률이 높았다.
저런 가수는 한국에는 김지태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후 찌라시 내용이 더욱더 가관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문란한 여자관계로 유명하다 한다. 특히 가수 지망생, 배우 지망생, 스튜어디스 등을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 데이트를 즐긴다는 소문.”
솔직히, 처음에 찌라시를 봤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나도 연예계 종사자여서 그런지, 이런 부류의 기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받았다.
경험상, 이런 부류의 소문이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의 대상이 되고는 했으니까.
다만, 이렇게 내가 현실에서 찌라시와 딱 맞아떨어지는 ‘근거’를 마주해버리고 나니, 혹시나 소문이 맞는 것은 아닐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사실 김지태의 사생활은 알 바 아니었다.
다만 사생활이 이렇다면, 매니저나 주변인에게 크나큰 약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생각 정리할 겸, 커피나 한잔 사갈까?’
숙소에 들어가기 전, 집 근처 카페에 슬쩍 들렀다.
그러고 보니,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안 챙겼다.
‘뭐, 얼굴은 안 보이니까.’
그냥 적당히 모자를 눌러 쓴 후 카운터 앞에 섰다.
“뭐 드시겠어요.”
“아메리카노하고 파운드케이크 하나 포장해주세요.”
그런데, 카페 아주머니가 내 목소리를 듣더니 화들짝 놀랐다.
“어라? 그 목소리, 권노을 씨 아니세요? 어머 어머 요즘 글로벌 비전 너무 잘 보고 있어요!”
갑자기 뒤에서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 권노을 씨.”
“싸인해줘요 싸인!”
카페 안의 모든 손님이 내게 달려들었다.
‘이거… 큰일 난 거 같은데?’
* * *
간신히 카페에서 나를 끄집어 온 배영웅 실장이 내게 잔소리했다.
“앞으로 절대 혼자 단독행동 하지 마세요! 선글라스하고 마스크는 항상 가지고 다니시고. 그래도 외출은 저나, 로드 매니저랑 함께 가세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컸네요. …그래도 평소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나름 솔로 앨범을 100만 장까지 팔아 본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적은 없었다.
메이크업을 지우고, 모자를 푹 눌러 쓰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된 모양이다.
배영웅 실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글로벌 비전이 한국에서 예선을 진행한 게 이번이 처음이에요. 지금 시청률이 얼마인 줄 아세요? 20%입니다. 20%. 엔간한 탑 드라마 시청률이라구요. 예전에는 유명 가수 정도였다면, 이제는 온 국민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존재가 됐어요. 이제는 로드도 더 투입할 겁니다. 안전이 중요하니까요. 게다가.”
“게다가.”
배영웅 실장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내게 ‘강민정 표 특제 건강 주스’를 건네며 말했다.
“우리 우승할 거니까. 한국 대표로 선정되면 해외에서는 더더욱 안전 이슈가 문제가 됩니다. 예전에는 서구권에서는 무명이었으니까 자유롭게 돌아다녔는데, 이제 절대 안 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저희랑 같이 다니셔야 해요.”
“그 정도인가요.”
“어제 자 라이브 방송이 동 시간대 미국 시청률 2위 했어요. 경쟁 프로가 드문 아침이긴 하지만 초대박이죠. 게다가 저희가 그 회차에서 1위를 차지했고요. 심지어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인 엘비스를 커버했어요. 그전에는 스티비 원더 풍의 노래를, 할리우드 감독 히치콕의 영화와 조합해서 불렀고요. 반응이 안 오는 게 되려 이상하죠.”
세계인의 취향까지 생각하면서 무대를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한 주 한 주, 살아남기 위해 주어진 무대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무대들이 해외 팬들에게 내 예상보다 더 좋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우승하면 물론이고, 설사 석패하더라도 해외 시장 진출은 한결 수월해지겠는데?’
해외 진출이 점점 가시화되고 있었다.
* * *
김지태의 말대로, 생방송 녹화 전, 제작진이 참가자를 소집해 마지막 소 미션인 ‘파트 쟁탈전’을 제시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대결은 아니고, 마지막 대결을 맞아 TOP4가 단체 곡을 하나 선정해 다 함께 부른다는 훈훈한 미션일 따름이었다.
무대 구성은 프로듀서인 로메로가 맡았고, 보컬 코치로는 왕년의 전설의 가수인 바네사가 나섰다.
이스트 웨이브는 마이클 잭슨의 원곡 ‘힐 더 월드’의 재편곡을 맡았다.
심사위원들이 꾸미는 무대인 셈이었다.
바네사가 참가자들 사이에 서서 인사했다.
“반가워요. 오늘은 보컬 코치를 맡은 바네사입니다. 여러분들의 실력이야 이미 잘 알고 있죠. 이번 주 단체 곡 무대도 기대가 큽니다. 온 세계가 한국 예선에 주목하고 있어요. 세상을 놀래켜 봐요.”
스케일이 다른 바네사의 말에 참가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들 워낙 개성 넘치는 보컬이라. 어떻게 노래 파트를 배분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혀요. 오늘 노래를 보고 파트를 결정할 테니, 좀 신경 써서 불러주시면 결정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바네사가, 슬쩍 태연한 표정으로 참가자들에게 폭탄을 투하했다.
지금 보여주는 실력에 따라 전 세계인이 보고 있는 글로벌 비전 지역 예선 마지막 단체 곡 무대에서의 파트 배분을 정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참가자들 귀에는 저 말이 이렇게 들렸다.
“잘 불러 봐요. 여하에 따라 전 세계인 앞에서 킬링 파트를 부를 기회를 줄지도 모르니까.”
순식간에 녹음실이 경쟁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 * *
마이클 잭슨의 ‘힐 더 월드’.
온 세상 가수들이 하나 되어, 서로 돕고 살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원조 떼창 곡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명의로 발표하긴 했지만, 온갖 팝가수가 힘을 합쳐 초호화 콰이어가 되어 부른 곡이기도 했다.
바네사가 이 곡의 보컬 코치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이 곡 원곡에 참여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10대 가수이던 시절, 기라성 같은 명가수들과 함께 이 곡을 녹음했다.
MJ의 곡에 참여한 사람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니, 새삼 글로벌 비전 심사위원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실감이 났다.
그야말로 리빙 레전드들이었다.
사실은 순위나 시청률을 제쳐 두고라도, 이런 심사위원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축복일지 몰랐다.
‘썩 마음에 안 드는 불청객도 있지만 말이지.’
스폰서 오너 가문의 끄나풀인 론이 뚱한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뒤에는 여동생 마리까지 대동한 채였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우선 요한이 1절을 불렀다.
“……!”
요한의 보컬이 이렇게 임팩트가 있었나?
진중한 저음으로 조곤조곤 부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어떤 갈급함이 느껴졌다.
숨소리 하나만으로도 노래에 긴박감을 더했다.
자꾸자꾸 듣고 싶은, 긴장감 넘치는 좋은 보컬이었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초연한 듯 미션에 신경 쓰지 않던 바질 리스크 멤버들도 신경을 써서 편성한 어쿠스틱 악기들로 편곡에 힘을 보탰다.
다음 차례는 강민정이었다.
“워어어어!”
바질 리스크 요한이 생각보다 빡센 노래를 불러서 긴장감을 불어 넣어서였을까.
강민정의 노래도 평소보다 바짝 날이 서 있었다.
품격 있는 비브라토를 넣으니, 팝, 알앤비로 알고 있던 ‘힐 더 월드’가 격조 있는 오페라 아리아로 변신했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놀라운 건 김지태의 무대였다.
흉성도, 두성도, 가성도 모두 좋은 창법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마스터하고, 순간순간 팔색조처럼 창법을 바꿔가며 부르기는 어렵다.
순간적으로 성대의 접촉면을 바꾸면서 노래를 이어가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김지태는 그걸 해냈다.
음절마다 창법을 바꿔 가는 괴물 같은 실력이었다.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테크닉이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 테크닉을 테크닉 과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함께 치유하자’는 감정 전달을 위해서 온전히 활용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너의 불행은 나의 불행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니, 우리가 함께 힘을 합치자.
담백한 김지태의 절규를 통해 곡의 메시지가 심장에 팍팍 꽂혔다.
심사위원 바네사도 감탄한 듯 휘파람을 불었다.
재호와 환희도 나름대로 신경 써서 노래를 준비해 왔지만, 김지태의 존재감에는 역부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김지태 얼굴 보면 이제 팬티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내 순서가 찾아왔다.
* * *
권노을은 김지태와 함께 이번 글로벌 비전 한국 예선에서도 가장 가창력에서 극찬받고 있는 참가자였다.
그만큼, 스텝들도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권노을의 노래를 들었다.
하지만… 권노을의 노래는 그들의 기대치를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가느다랗게 불러야 할 부분은 마치 명주실처럼 가느다란 가성으로 간드러지게 표현했고, 진중하게 감정을 쌓아야 할 저음 파트에서는 충실하게 가사를 전달했다.
두 눈을 감고 집중해서 노래를 감상 중이던 바네사는 권노을의 노래만의 강점을 곧 깨달았다.
‘이게 뭐지? 왜 노래가 랩처럼 통통 튀는 느낌이지? 마치 곡이 쭉쭉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기분 좋은 리듬감이 느껴져.’
요한이 저음 파트에서 몰입감으로 긴장감을 줬다면, 권노을의 벌스에는 바운스가 있었다.
공처럼 통통 튀기는 그 느낌 덕에, 곡 전체의 리듬감이 살아났다.
그리고 그의 바운스는 그대로 프리 코러스~ 코러스까지 쭉쭉 이어졌다.
하나의 바운스를 주는 덕분에 멜로디가 끊임없이 바뀜에도 순식간에 곡에 훅 몰입할 수 있었다.
그렇게 권노을 특유의 리듬감을 따라 기분 좋게 도착한 후렴에는, 어마어마한 고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거다’라고 바네사는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TOP4의 다른 참가자들 모두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해 고음을 내뿜었다.
하지만 그렇게 뽑아낸 고음은 왠지 ‘힐 더 월드’ 답지 않았다.
하지만 권노을의 후렴은 다른 이들 못지않게 강렬하면서도 억지가 없었다.
굳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보다는 곡 자체의 맛을 살리는 걸 택했다.
하지만, 되려 개성을 버렸기에 버려도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그만의 개성이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만의 방식으로 뿜어내는 보컬이 하늘을 갈랐다.
* * *
“저 친구는, 너무 노래를 자기 맘대로 바꾸는 거 아닌가.”
모두의 노래가 끝난 후, 론이 슬쩍 바네사에게 다가가 권노을의 노래를 지적했다.
다른 가수들은 모두 원곡 악보대로 노래를 불렀는데, 왠지 권노을의 노래는 다르게 들렸다.
바네사가 갑자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게 진짜 원곡이에요. 나머지 사람들은 그걸 살리는 데 실패한 거죠.”
“뭐.”
“이게 원작자의 의도라고. 잘 들어봐요. 원곡 가수들은 모두 자기 특유의 박자로 리듬을 탔어요. ‘바운스’를 줬지. 그래서 정박으로 노래를 부르면서도 미묘하게 약간 밀려 나가는 느낌을 줬어요. 그 특유의 어긋나는 리듬감이 ‘세이브 디 어스’의 핵심이야. 그걸 해낸 건 권노을밖에 없었어요.”
“그, 그래도 역시 고음 부분에서는 미스터 김 지태의 고음이….”
“맞아! 그거야! 김지태는 자기식으로 불렀는데 권노을만은 원곡 느낌이 났단 말이죠? 대체 권노을 이 친구는 어떻게 저런 고음을 낸 거지? 일반적인 고음 뽑는 것과는 아예 달랐던 거 같은데. 한 번 가서 물어봐야겠어요.”
론이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김지태에게 최고의 파트를 줄 수 없었다.
이미 심사위원의 안중에는 권노을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