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무대를 마친 강민정이 뚜벅뚜벅 무대를 내려왔다.
평소라면 노래가 끝나자마자 바로 대기실로 틀어박혀 컨디션 조절을 했겠지만, 이번에는 관객석에 자리 잡았다.
마지막 순서인 비원더의 무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비원더는 특출난 보컬리스트 팀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메인 보컬 권노을은 성악가마저 긴장하게 할 정도의 테크닉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강민정은 자신이 있었다.
대학교 성악과 입시를 준비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렇게, 몇백 년간 쌓아온 클래식 성악의 전통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시간만은 제아무리 재능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성악 미션에서만은 권노을이나 김지태에게 지지 않을 거라 확인했다.
‘실제로 김지태 선배의 무대는…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별거 없기도 했고.’
강민정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사이, 경쾌한 클래식 기타 연주와 함께 비원더의 무대가 시작됐다.
노래를 들으며 강민정이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비원더의 선곡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고고 리듬에 맞춰 남미 음악 느낌으로 편곡한 ‘오 솔레 미오’였다.
빌보드 1위까지 했던 곡이니만큼, 강민정도 알고 있었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성악곡이면서도 자신의 색깔을 유지했어. 엘비스는 결국 흑인음악 가수니까. 머리를 잘 썼는데?’
이전 무대에서 바질리스크는 지나치게 자신들의 장르인 펑크록을 고집하다 원곡의 맛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반대로 김지태는 성악이라는 미션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둘 다 치명적이었다.
비원더는 두 팀이 저지른 실수를 가볍게 회피했다.
성악의 맛을 살린 원곡을 고르되, 알앤비 가수의 버전을 편곡해 본인들만의 개성도 유지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뭔가 아쉽다 느낄 즈음, 주환희가 바로 노래를 이어받았다.
후렴이었다.
주환희가 힘 있게 후렴을 불렀고, 권노을과 원재호가 코러스로 보좌했다.
‘이럴 수가…!’
가면 갈수록 비원더의 코러스 실력은 물이 오르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그 수준을 매번 무대 때마다 뛰어넘었다.
이제는 거의 팝 그룹을 넘어, 프로 아카펠라 그룹의 경지에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
후렴의 후반부는 권노을이 잔잔하게 마무리했다.
주환희는 랩처럼 내레이션으로 권노을의 노래를 더블링(*같은 파트를 같은 리듬으로 함께 부름) 해주었고, 원재호는 탄탄한 코러스 실력을 보여주며 화음을 넣었다.
코러스의 편곡의 묘 덕분에 반복되는 후렴 속에도 자연스럽게 감정이 쌓였다.
그리고 그 감정은 2절이 지나, 간주 부분에서 폭발했다.
투두둥 탕! 콰쾅!!
드러머의 화려한 연주와 함께, 곡이 돌변했다.
갑자기 리듬이 2배로 빨라지면서, 격한 살사 리듬의 춤곡이 되었다.
어느새 비원더는 3각 대형으로 무대 위에 섰다.
아이돌 연습생 출신으로, 출중한 댄스 실력을 갖춘 주하늘이 센터에서 과감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권노을과 원재호는 댄스 연습생이었던 적도 없을 텐데, 놀랍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둘은 자기 수준을 알고, 딱 자기 수준에 맞는 어렵지 않은 안무를 과하지 않게 소화했다.
어려운 댄스 브레이크는 주환희의 몫이었다.
‘느닷없이 웬 춤이야?’
강민정은 당황했다.
성악에서 춤이라니, 정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관중들은 열광했다.
“끼야아아아 환희 오빠!”
“노을이 왜 이렇게 춤도 잘 춰.”
“우윳빛깔 원재호!”
정적인 성악 노래를 연속으로 들었던 관객들이, 약간 강렬한 비트와 안무가 담긴 댄스 브레이크에 격렬히 반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정석 따위 신경 쓰지 않는 파격, 파격, 또 파격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 무대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권노을이었다.
춤이 끝나자마자 권노을은 숨 쉴 틈도 없이 후렴을 한 번 더 불러 젖혔다.
성악가 못지않은 성량이었다.
일종의 성악에 가까울 정도로 잘 발성되어 나온 고음이었지만 전혀 성악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노래의 핵심인 첫 음과 끝 음 처리를 완벽하게 권노을식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곡의 모든 프레이즈마다 권노을은 자신만의 느낌으로 리듬감 있게 음을 끊었다.
덕분에 관객들은 성악에 가까운 풍성한 성량이 실린 권노을의 노래에서도 기가 막힌 그루브와 리듬감을 느꼈다.
마지막까지 권노을은 계속해서 파격적으로 전통을 깨고 있었다.
강민정에게는 생소했다.
하지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주변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이 권노을의 방식이 옳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전통은 익혀야 했다, 그것도 철저하게.
하지만 일단 전통의 마스터가 되고 나면 과감히 버릴 수도 있어야 했다.
전통을 배우는 것을 넘어, 전통을 넘어서서 도전하는 자만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 관객을 뜨겁게 열광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권노을의 노래였다.
* * *
“퐈이어! 퐈이어! 퐈이어어어!”
비원더의 무대가 끝나자마자 심사위원 이스트 웨이브가 거칠게 절규했다.
그가 책상을 탕탕 치자 바네사가 가늘게 눈을 떴다.
“문장을 말해. 단어만 뱉지 말고. 말만 들어도 짜증이 솟구쳐. 밀크 쉐이크 땡겨. 살찌는 기분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이스트 웨이브는 거침없었다.
“이거야 이거. 성악을 가져오되 비원더만의 느낌을 살려라! 이 미션이 뭘 요구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줬어. 우리가 바란 것이 바로 이거라구!”
“미션을 이해한 건 비원더뿐인 거 같긴 하네.”
로메로가 슬쩍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미스 캉의 무대도 훌륭했어. 오페라 하우스에서나 볼 수 있는 고품질 무대였고.”
심사위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정과 권노을이 동점, 김지태와 바질리스크는 둘보다 조금 더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이스트 웨이브가 말을 덧붙였다.
“장르 자체가 민정 참가자에게 유리했을 뿐. 나는 비원더의 노래가 마음에 들었어. 앞으로도 계속 기억에 남을 노래야.”
바네사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스트 웨이브가 슬쩍 바네사를 노려봤다.
“무슨 소용.”
바네사가 피식 웃었다.
“뭐, 결국 기억에 남는 가수가 우승하긴 하겠지만.”
그제서야 이스트 웨이브가 표정을 풀었다.
* * *
“그렇지!”
점수가 발표되자마자 라이브 밴드와 비원더 멤버들이 서로 하이 파이브를 하며 기뻐했다.
성악 미션이었는데 프로 성악가인 강민정과 함께 공동 1위라니, 생각보다 훨씬 선방했다.
게다가 지난 무대에서는 우리가 바질리스크 다음, 2위를 했기 때문에 일단 점수상으로는 근소한 차이로 비원더가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지금 가장 낮은 점수인 김지태조차도, 우리와 점수 차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얼마든지 역전이 가능했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강민정에게 내가 슬쩍 축하 메시지를 건넸다.
“축하드려요.”
“뭐가요.”
“1위 하셨잖아요.”
강민정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하! 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건 성악이잖아요? 여기서 비원더랑 동점이라니.”
“에이 너무 그렇게 보지 마시고.”
그때, 우리 사이를 김지태가 뚫고 지나갔다.
굳은 표정으로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깐 확인해볼까?’
나는 슬쩍 김지태를 좇았다.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시간’ ‘부족’ ‘나만 왜?’ 등의 키워드가 오갔다.
김지태는 대기실 앞에서 통화를 끊고는 내게 물었다.
“권노을 후배.”
“네.”
“후배님들은 이번 미션 언제 알았어요.”
“1주일 전에 알았는데요. 공식 방송에서 알려줘서 알게 됐습니다.”
“그전에는.”
“전혀 몰랐습니다.
김지태가 혀 차는 소리를 냈다.
“허 참! 나는 분명히 방송국이 참가자들에게 미션을 한 달 전에 알려줬다고 들었거든요? 당신들도 미션 아는 줄 알았어요. 근데 오늘 라이브 방송을 보는데. 다들 1주일 전까지 미션 내용을 몰랐다는 거야. 이게 말이 돼? 나만 특혜를 받은 건가.”
“김지태 선배는 모르셨나 보군요.”
“이게 무슨 경우인지 참.”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매니저조차 없는 걸 확인하고 김지태에게 김종윤이 저질렀던 반칙 행위를 알려주었다.
김지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까지요.”
“선배님 소속사에서는 정말로 글로벌 비전 최초 한국 대표를 자신의 기획사에서 배출하고 싶은 거 같습니다.”
“그래도 정도가 있지. 이건 옳지 않죠. 나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욕 안 먹는다는 자부심으로 산 사람이에요. 그런 나한테 이런 경우를 보이다니. 이거 함께 못 하겠구만.”
가장 큰 연예 기획사 중 하나인 ‘예정 엔터’를 그만두겠다니, 파격 선언이었다.
내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제가 괜한 걸 알려드린 게 아닌지….”
김지태가 손을 내저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이번 글로벌 비전 일본 대표도 예정 엔터 소속이에요. 정확히는 일본 사무소와 협업해서 만든 회사 소속이지. 나 하나가 떨어진다고 글로벌 비전에 예정 엔터 출신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란 거야.”
그건 또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만약 세계 대회 본선에 진출해도 또 저렇게 비열한 짓을 저지르는 녀석을 만나야 한다 생각하니 살짝 머리가 아파왔다.
김지태가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말했다.
“여튼 마지막 한 주 잘해 봅시다. 이 일은 이 일이고. 대결은 대결이지. 노을 씨 같은 ‘가인’ 하고 제대로 붙어볼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요? 이번 한 주라도 제대로 해봐야지. 행인지 불행인지, 이번 미션은 아예 준비 못 했어요. 우승이 내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거짓말하는 걸로 보이진 않았다.
“그러셨군요.”
“아! 소 미션은 미리 알려줄 수 있겠네. 내일 제작진이 갑자기 우리들 부를 거예요. 다음 주 마지막 공연에서 TOP4가 같이 부를 노래 부른다고.”
오디션 프로의 국룰인 ‘단체곡’ 공연이었다.
“설마 그게 전부가 아니겠죠.”
“역시 후배님. 눈치가 빨라. 분량 뺏기 배틀이에요. 노래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노래 분량을 정하겠다 이거지. 최종 결과에는 영향을 못 미치겠지만 제법 재미있는 장치 아니에요.”
“잔혹하네요.”
“우리 내기할까요? 누가 더 분량 많이 나오는지. 멤버들 빼고. 계급장 빼고. 딱 둘이서.”
“뭘 걸면 되죠.”
“여태껏 내가 나도 모르게 반칙으로 이득을 챙겼으니까. 노을 군이 지면 벌칙은 없는 걸로 하죠. 만약 내가 노을 군한테 지면 내 차를 줄게요. 꽤 좋은 차예요.”
차에 관심이 없어서 무슨 차인 줄은 몰랐지만, 얼핏 기억에도 엄청 좋은 차였던 것 같았다.
“저는 지면 아무것도 안 잃고요.”
“명예를 잃는 거죠. 나한테 지는 거니까. 나는 그거로도 지금은 충분해요. 지금 나, 좀 상처받았거든. 상처받은 야수의 한풀이 내기라고 생각해. 받아 주겠어요.”
나야 뭐 잃을 게 없었다.
선배 자동차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0원은 아닐 것 아닌가?
“좋습니다.”
그렇게 분량 뺏기 배틀의 막이 열렸다.
* * *
김지태와 대화를 끝내고 우리 팀 대기실로 돌아갔다.
어느새, 밴드 멤버들은 모두 사라지고 재호와 환희, 배영웅 실장 그리고 강민정의 일행만 남아 있었다.
내가 배영웅 실장에게 물었다.
“밴드 멤버들은요.”
“자꾸 무대 끝나고 술자리를 가지니까 너무 피곤하다고 오늘은 다들 일찍 퇴근했어요.”
재호가 말을 보탰다.
“이번 곡이 쉬워 보여도, 사실상 두 곡이 합쳐진 구성이라 밴드 입장에서는 두 배로 힘들었을 거예요. 피로를 풀어야죠.”
“그럼 우리도 그만 집에 갈까요.”
강민정이 내게 물었다.
“같이 갈래요? 피로 풀기 딱인 곳이 있어요.”
“피로 풀기 딱 맞는 곳이라니… 이 야심한 시간에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