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4화
이스트 웨이브는 글로벌 비전 한국 오디션 기간 인터컨티넨탈 호텔 스위트 룸을 전세 냈다.
방을 잠시 임의로 개조해서 녹음실로 만들어 음악 작업을 시작했다.
방송 녹음 외에는 두문불출하고 음악 작업만 하기 위해서였다.
세계 톱 작곡가다운 스케줄이었다.
매니저 토니가 이스트 웨이브를 불렀다.
“웨이브! 식사 시간이야.”
이스트 웨이브가 시선을 모니터에서 떼지 않은 채 입으로만 대답했다.
“오케이 오케이. 오늘도 그거야.”
“그거지. 비빔밥.”
이스트 웨이브는 한국에 와서 먹은 수많은 식사 중에도, ‘비빔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스트 웨이브는 글로벌 비전 대회가 끝나면 바로 본격적인 새 앨범 활동을 할 예정이었다.
다이어트가 필요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신기한 음식을 자꾸 먹다 보니 금세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무게가 불었다.
‘그래서 퐈이어 키드에게 부탁했지.’
퐈이어 키드, 권노을은 이스트 웨이브에게 한식 중 ‘비빔밥’을 추천했다.
마이클 잭슨 등 전 세계의 팝스타들이 다이어트 건강식이자, 꿀맛인 음식으로 강력 추천하는 음식이었다.
갖가지 채소, 고기, 계란후라이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 위에 얹었다.
보기에 좋았다.
거기다가 이스트 웨이브의 입맛에도 꼭 맞았다.
덕분에 이스트 웨이브는 하루에 한 끼는 꼭 비빔밥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이스트 웨이브가 한 그릇 뚝딱한 후 외쳤다.
“퐈이어 퐈이어 퐈이어! 퐈이어 키드 이 친구는 음식 추천까지 퐈이어처럼 화끈하군!”
토니가 피식 웃었다.
“또 그 녀석 얘기야.”
“이걸 봐 토니. 너무 맛있고. 채소투성이라 건강에도 좋아. 하루 3끼를 먹어도 질리지 않는데 이것만 먹으면 살이 쭉쭉 빠진다고.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어.”
“하루 3끼 비빔밥을 먹기 전에 자기 전에 때리는 프라이드 치킨을 좀 끊는 게 어때? 그게 나을 텐데.”
이스트 웨이브의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왔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토니가 곧 입을 다물었다.
이스트 웨이브는 고개를 돌려 서울 야경을 바라봤다.
야경, 멋진 음악, 편리한 대중교통, 안전한 치안 등 이 나라에는 보물이 많았다.
하지만 그가 서울에서 찾은 모든 것 중 최고의 보물은 역시 권노을의 보컬이었다.
대회를 거치면서 점점 그는 권노을의 스타성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 보컬 실력은 보장되었는데, 미래의 스타 감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된 것이다.
권노을을 꼭 곧 나오는 본인의 새 앨범의 첫 리드 싱글의 주인공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음반사는 물론 매니지먼트까지, 주변 모두가 그를 만류하고 있었다.
신인인데다, 아무도 모르는 동양인 가수를 리드 싱글로 쓰는 것은 너무 지나친 도박이라는 이유 때문.
하지만 이스트 웨이브는 이제 확신이 생겼다.
이스트 웨이브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토니에게 말을 걸었다.
“토니.”
“왜.”
“역시 퐈이어 키드가 녹음한 노래를 이번 활동 리드 싱글로 삼아야겠어.”
“웨이브….”
이스트 웨이브가 토니의 말을 막았다.
“그래. 음반사도 매니지먼트도. 유통사까지도. 죄다 반대인 거 알아. 미국의 라디오 DJ들이 웬 듣보 동양인 가수의 노래를 틀어줄 거란 우려도 있겠고 말야.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음악 자체로 박살 내면 된다고.”
토니가 뭔가 말을 끼어들려고 입을 열었다.
“웨이브 사실….”
하지만 아직 이스트 웨이브에게는 할 말이 더 남아 있었다.
“노노! 말 끼어들지 말고. 내 말 안 끝났어. 퐈이어 키드의 노래는 진짜 퐈이어야. 너도 들었잖아? 게다가 지금 글로벌 비전에서는 영어 가사로만 노래를 부르고 있어. 이미 스타성도 검증된 친구라구. 게다가 내가 보기에 이 친구는 분명 글로벌 비전 본선에 나오게 될 거야. 일단 세계대회 본선에 이 친구가 나오기만 하면 분명 화제가 돼. 확신한다고. 설사 지금 곡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내게 6개월만 주면 반드시 성공할 거란 확신이 있어. 이 정도 도박은 해볼 만하다고. You know.”
토니가 입을 열었다.
“다 끝났어.”
이스트 웨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가 한숨을 쉬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음반사에서 연락 왔어. 권노을 노래를 리드 싱글로 하자고.”
“왓?(What?) 내가 1주일을 설득해도 들은 척도 안 하더니만.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아. 너 진짜 아예 모르는구나.”
“뭘 몰라.”
“노엘 그 친구, 지금 구글 검색량 가수 중 압도적 1위야. 온 세계 음반사에서 ‘저놈 누구냐’ 라며 찾으려고 비상이라고. 이제는 우리가 오히려 회사가 권노을 노래를 리드 싱글로 해달라고 너한테 부탁해야 할 판이야.”
구글 검색어 1위라니, 어쩌면 빌보드 차트 1위보다도 어려운 성과였다.
이스트 웨이브 등에 식은땀이 다 났다.
“뭐 때문에.”
“뭐긴 뭐야. 글로벌 비전 생방송 때문이지. 구글에 검색해봐.”
이스트 웨이브는 구글에 권노을 이름을 검색해봤다.
‘권노’까지 영어로 입력하자마자 연관 검색어가 쫙 깔렸다.
[권노을 누구.]
[권노을 노래.]
[권노을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
[권노을 잘생김.]
[권노을 가창력.]
[권노을 글로벌 비전 1차 본선 다시 보기.]
[권노을 디즈니 프린스 언제 됨.]
이스트 웨이브는 검색 결과를 살펴보면서 쿡쿡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퐈이어 키드! 벌써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거냐?’
권노을은 한국에서야 100만 장을 팔아 본 슈퍼 가수지만, 세계 시장 기준으로는 아직 노래하나 발표한 적 없는 무명이었다.
하지만 벌써 단 한 번 세계 중계로 가장 주목받는 ‘신인 가수’의 위치에 섰다.
앞으로 그가 대체 어디까지 갈지, 그 가능성은 세계 최고의 작곡가, 이스트 웨이브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 * *
예정 엔터테인먼트 제3 회의실.
은갈치 색 양복 차림의 백진우 이사가 예정 엔터 홍보팀에게 성질을 내고 있었다.
그의 여우 같은 눈에 핏발이 잔뜩 섰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홧김에 백진우 이사가 재떨이를 던졌다.
사람은 없는 곳에 명중했지만, 회의실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홍보팀장이 벌벌 떨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저, 저희도… 최대한 김지태 님 위주로 뽑아달라고 관계 언론사에 연락했는데.”
“했는데.”
“잘 안 먹히더라고요.”
“잘 안 먹혀? 그걸 말이라고 하나? 우리가 언론사에 먹인 게 얼마인데. 광고를 빼 온다고 협박을 하든, 대스타 기자회견에 초대를 안 한다고 겁박하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김지태 기사 말곤 다 밟아버려야 할 거 아냐? 이런 걸 내가 다 일일이 설명해줘야 해? 애냐.”
홍보팀장이 고개를 떨궜다.
백진우 이사의 말은 누가 봐도 과했다.
아무리 대형 기획사라고 해도, 다른 참가팀도 엄연한 중견 가수 혹은 대형 가수들이었다.
함부로 무리수를 뒀다가는 되려 예정 엔터가 찍히게 된다.
백진우 이사의 말은 냉정한 전략이라기보다는 자기 뜻대로 상황이 이루어지지 않자 부리는 어린아이의 ‘짜증’에 가까웠다.
하지만 백진우 이사는 상사다.
상사의 말에 토를 다는 순간 직장생활은 피곤해지기 마련.
그 상사가 해외 인맥 덕분에 회사의 실세로 자리 잡고 있는 백진우 이사와 같은 존재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해서, 홍보팀장은 백진우 이사의 관심을 돌리기로 했다.
“다음 미션을 기대해 보시죠.”
“다음 미션.”
“이사님이 자연스럽게 김지태 님에게 다음 미션 알려 주셨잖습니까? 마치 모든 가수가 다 아는 것처럼 꾸며서요. 전설의 보컬리스트 김지태가 남보다 두 배는 오래 준비했으니 충분히 압살하지 않을까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자인 법이니까요.”
김지태는 거의 한 달 전부터 성악 미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리 성악 트레이닝을 받아 두었다.
지금 김지태는, 유명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노래를 리메이크해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백진우가 아무리 고민해 봐도, 김지태가 질 경우의 수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
“권노을. 마음껏 웃어 둬라. 이제 김지태가 1등을 차지할 테니까!”
백진우의 둔탁한 웃음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려 퍼졌다.
* * *
드디어 본선 2차 경연의 날이 밝았다.
권노을은 비원더 멤버들과 함께 긴장된 마음을 안고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서 다른 경쟁자들의 표정을 슬쩍 확인했다.
‘딱 봐도 다들 마음가짐이 다르네.’
김지태도, 강민정도, 바질리스크까지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전의를 가다듬고 있었다.
모두 칼을 갈고 온 모양이었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우리를 긴장하게 만드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강민정.
뮤지컬 디바인데다, 성악을 전공했다.
그녀의 압도적인 성악 가창력은 이미 내가 직접 뮤지컬 무대에서 확인한 바 있었다.
그야말로 이번 성악 미션 우승 0순위 후보였다.
김지태 또한 요주의 인물이었다.
김지태는 분명 미션을 미리 알고 준비하고 있었다.
예감을 넘어서서 확신이 있었다.
배영웅 실장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김지태가 주도해서 부정행위를 하는 건 아니고, 백진우 이사가 몸통으로 보인다고 했다.
실제로 김지태는 딱히 부정행위를 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주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
게다가 그는 전설의 보컬리스트였다.
가장 나와 스타일 적으로 비슷한 가수기도 했다.
우선 바질리스크와 강민정의 무대가 먼저 나왔다.
강민정의 무대는 그야말로 전율이었다.
자신의 특기를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듯, 일부러 트로트에 가까운 노래를 선곡했다.
그리고 정통 성악 창법으로 말 그대로 무대를 찢어 버렸다.
무대가 끝날 때, 멤버들조차 저도 모르게 대기실에서 기립박수를 쳤을 정도였다.
재호가 고개를 저으며 내게 말했다.
“만점짜리 노랜데.”
“그러게. 뭐 아무런 흠 잡을 게 없네.”
긴장감이 확 느껴졌다.
다음 무대는 어쩌면 강민정보다 더 걱정되는 사람이었다.
김지태의 무대였다.
김지태가 팬덤 가면에 턱시도를 한 채로 무대에 나타났다.
그야말로 팬텀다운 모습이었다.
익숙한 모습에 관객들이 환호했다.
김지태는 들고 있던 붉은 장미를 관객에게 던졌다.
관객들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김지태는 그대로 자세를 유지한 채 노래를 시작했다.
그의 도입부를 듣자마자 재호와 환희의 표정이 바뀌었다.
나도 조금은 놀랐다.
‘창법이… 바뀌었어?’
김지태의 노래에서는 가요 창법이 아닌 성악 창법 특유의 압도적인 성량이 느껴졌다.
서서히 리듬에 맞춰 고조된 음악의 마지막에서, 김지태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고음을 뽑아냈다.
오페라 가수와 같은 강렬한 볼륨감의 고음이었다.
관객들의 갈채가 쏟아졌다.
나도 관객과 함께 박수를 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좀 여유가 있었다.
재호가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야 박수 칠 때냐.”
“왜.”
“저걸 어떻게 이겨.”
내가 피식 웃었다.
“저 노래는 노래 자체는 훌륭하지.”
“훌륭한 정도가 아닌데? 완벽했잖아? 아니야.”
내가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노래를 부르면 안 되지. 초보적인 실수야.”
“무슨 소리야 완벽한 성악 창법 노래인데.”
“그게 문제지.”
김지태가 우리보다 유리한 점이 뭘까?
이미 10년 넘게 활동한 우리나라 최고 가수라는 경력이 그의 최고의 무기였다.
김지태는 스스로 본인의 아이덴티티인 창법을 이번 무대에서 버렸다.
이건 그냥 신인 성악가의 무대지 김지태의 무대가 아니다.
“눈 감고 들어봐, 이거 일반인은 김지태 무대인지도 모를걸? 이건 실패야. 그것도 엄청난 ‘폭망’ 무대.”
초보적인 실수였다.
지식의 저주랄까?
자기만의 뚜렷한 음악 세계가 있고, 이를 발판으로 인기를 이미 얻은 기성 가수라면 자기 색깔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김지태는 너무 미션에 몰입했다.
반칙으로 미션을 일찍 알게 된 덕에 준비할 시간이 ‘너무’ 길었다.
성악 레슨을 오랜 기간 받다 보니 자신의 음악과 성악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은 것이리라.
그 결과, 그의 노래는 레전드 가수 김지태의 노래가 아닌, 보통 성악가의 노래가 돼버렸다.
‘이 정도라면 우리에게 충분한 가능성이 있겠어.’
이제 김지태에게, 프로 가수가 성악곡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 보여줄 차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