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예정 엔터 임원들이 유독 외국계 기업하고 친해요. 민티도 그중 하나고, 거기 이사 중 한 명이 맨날 민티의 오너 가문들하고 골프 치러 다닌다던데?”
그 말인즉슨, 예정 엔터테인먼트는 ‘글로벌 비전’의 스폰서랑 뭔가 내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야 이상하게 김종윤이 대회 스폰서의 비호를 받았던 게 이해가 갔다.
김종윤 또한 예정 엔터 소속 가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예정 엔터 소속의 가수가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김지태였다.
내가 노자경에게 물었다.
“소문이란 게 그러면?”
“예정 엔터가 자기 소속 가수를 우승자로 내정했다는 거지 뭐겠어요? 나도 잘 몰라요. 내 첫 회사 상사였던 소인중 대표가 예정 엔터 실장 출신이라 소식이 좀 들려요. 이 바닥이란 게 워낙 좁으니까. 게다가 난 가수도 아니니까 다들 긴장도 풀고.”
“마당발이시네요 은근히.”
“안무가란 게 뻘하게 돌아다녀야 간신히 먹고 사는 직업이다 보니 그런 거지 뭐. 여튼 예정 엔터 가수를 조심해요. 자자, 그럼 연습 다시 시작합시다!”
노자경에게 감사를 표하고 다시 안무 연습으로 돌아갔다.
왠지 무엇을 알아봐야 하는지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 * *
그때부터, 조금씩 김지태와 예정 엔터테인먼트에 대해 리서치를 시작했다.
다행히, 다른 멤버들이 곡을 쓰는 타이밍이라 조금 비는 시간이 있어, 조사를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음악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과 최대한 많이 접촉해 정보를 얻어냈다.
그리고 그 정보들과 내 원생의 기억을 대조해보니 금방 내용이 정리되었다.
충분히 정리되었으니, 이제는 실행을 위해 배영웅에게 부탁할 차례였다.
그날 점심 식사 후, 배영웅 실장과 잠시 티타임을 가졌다.
배영웅 실장이 능숙하게 커피를 끓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윤강 PD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이윤강 PD는 특별한 용무 없이 출연자에게 먼저 연락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무슨 용건이었나요?”
“좋은 소식이에요. 로메로 심사위원이 비원더가 15분 만에 녹음한 ‘민티’ CM송이 너무 인상적이었다고 하네요.”
“피드백은요?”
“지금 당장 진짜로 써도 되냐 문의했데요. 그게 피드백이래요. 괜찮나요?”
딱히 지적할 게 없다는 뜻이었다.
“저야 다른 멤버들이 괜찮다면… 저작권자는 재호랑 환희니까요.”
재호랑 환희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 중이었다.
새벽 운동을 좋아하는 나와 달리 재호랑 환희는 오후 운동을 좋아했다.
배영웅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권노을 아티스트는 찬성으로 알겠습니다. 잘됐네요?”
“근데, 혹시 좀 수상한 부분은 없나요?”
“수상하다니요?”
폭탄 발언을 하기 전, 일단 주변을 확인했다.
다행히 녹음실에는 나와 배영웅 둘뿐이었다.
슬쩍, 내가 알려준 정보를 배영웅 매니저에게 공유했다.
“예정 엔터테인먼트가, 글로벌 비전의 스폰서인 ‘민티’와 상당히 친한 관계라고 합니다. 예정 엔터테인먼트 백진우 이사가 특히 민티의 오너 집안과 그렇게 친하다고 들었어요.”
놀랍게도, 배영웅 매니저는 침착했다.
“사실, 저도 이전부터 들었던 소문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연예계 바닥이 워낙 헛소문이 많아서, 그냥 가십거리라 생각했는데요.”
배영웅과 달리, 나는 이 소문의 근원지를 더 살펴보기로 했다.
이전 생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다행히, 회귀하자마자 노트에다 이전에 있었던 일을 모두 적어놓은 덕분에, 예정 엔터에 대한 기억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예정 엔터 백진우 이사, 익숙한 이름이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보기 드문 해외통 매니저였다.
그러다 스포츠 도박과 승부 조작 스캔들에 엮여서 몰락했다.
알고 보니 그가 해외 임원들과 친했던 이유는 불법 도박 및 승부 조작을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노자경의 이야기를 들은 후, 나름대로 여러 소스를 통해 물어봤다.
예정 엔터에서 민티의 오너 가문과 접점을 가진 매니저를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백진우 이사였다.
백진우 이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기억한 이상, 더 이상한 일이 생길 거라 보는 게 맞았다.
“강민정 선배에서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강민정 님도 저와 똑같은 테스트를 했다고 합니다. 15분 만에 곡을 녹음하라니 당황하긴 했지만 어떻게 잘 넘어가셨다고 하더라고요. 문제는 강민정 님이 아니라 김지태입니다.”
“김지태 님이요? 여기서 그분이 왜 나오죠?”
“강민정 님은 우연히 김지태 님과 함께 미션을 진행하셨다고 해요. 바네사 심사위원이 미션을 전달했고요. 그런데, 김지태 님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네요. 곡도 부드럽게 써서 냈고요. 마치 미션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미션이… 유출되었다는 말씀이신가요?”
강민정은 내게 더욱 의미심장한 말을 했었다.
[김지태 선배, 성악 미션이란 걸 알기 전부터 성악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기억나요? 저희랑 같이 등산하다 우연히 만난 날. 클래식 성악곡을 부르고 있었잖아요? ‘마치 곧 성악 미션이 있을 걸 아는 것처럼’.]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음… 이건 대응이 어려운데요. 솔직히 ‘내가 미션을 알았습니다.’라고 말해줄 리도 없고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제 그 대응책을 한번 논의해보고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일단 생각해둔 대응 방법이 있었다.
* * *
미국 뉴욕.
가수 권노을과 코러스 조민하의 친구이자 미국 방송작가인 메리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
동네 레스토랑에서 갓 구운 빵으로 만든 브런치를 먹기 위해서였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비원더 글로벌 비전 ‘첫 라이브 공연’]
“아차!”
방송 시간을 잘못 알고 있었다.
시차 때문에, 한국 시각으로 밤에 진행하는 방송을 보려면 시카고 기준으로는 아침이었다.
글로벌 비전은 전 세계인의 큰 관심사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미국의 소규모 케이블 방송사에서 한국의 글로벌 비전 지역 예선을 방송하기로 했다.
그래서 메리는 라이브로 자신 친구 권노을과 조민하의 공연을 보려 계획을 세워 두었다.
그 시간을 지금 놓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집으로 돌아가 TV를 켜서 방송을 확인하기에는 너무 멀리 걸어왔다.
‘어쩔 수 없지. 이미 브런치를 시켜 버렸으니까. 밥 먹고 집 가서 바로 녹화 방송으로 보자.’
메리는 빠르게 체념한 후, 레스토랑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메리의 눈을 사로잡는 광경이 펼쳐졌다.
메리의 단골 레스토랑에는 대형 스크린이 꼭 있었다.
저녁에는 스포츠 펍으로 변해, 야구나 풋볼 등 대형 스포츠 경기를 온 손님들이 함께 관람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스크린에서, 이번에는 놀랍게도 한국의 ‘글로벌 비전’ 예선을 틀어주고 있었다.
미국의 레스토랑에서 한국의 오디션 프로를 틀어주다니, 아무리 글로벌 오디션의 지역 예선이라고 해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메리가 웨이터에게 질문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저 방송, 어떻게 알고 보고 있어요?”
웨이터가 무슨 소리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몰라요? 난리가 났는데. 참가자 한 명이 아주 물건이에요.”
“물건이요?”
“이스트 웨이브가 발견한 보석이 한국에 있다고 소문이 쫙 퍼졌어요.”
영화 대본 마감을 끝낸 이후 메리가 1~2주 정도 뉴스와 담을 쌓기는 했다.
그사이, 엄청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바 테이블 옆에 누군가 보고 던져놓은 타블로이드 잡지가 있었다.
그곳에는, 정식 언론에서 진행한 이스트 웨이브의 인터뷰를 무단으로 펌한 싸구려 기사가 실려 있었다.
헤드라인이 메리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제목: 이스트 웨이브, 동양에서 진주를 발견하다!
메리는 홀린 듯이 타블로이드 잡지를 집어, 이스트 웨이브의 기사를 확인했다.
본문: 이스트 웨이브의 신보 발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최근 스타 가수의 앨범에 참여는 물론, ‘글로벌 비전’에 심사위원으로 종횡무진 활약 중인 이스트 웨이브.
그의 첫 싱글의 목소리의 주인공이 의외의 인물이라 해서 화제다. 그 인물의 정체는 한국의 알앤비 그룹 ‘B1The’의 메인보컬 권노을이다.
그게 누군데? 라고 묻는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묻고 싶었다! 그래서 뉴욕타임스가 이스트 웨이브에게 직접 물었다. 이스트 웨이브의 대답은 이랬다.
“코리아에서 난, 뭐랄까, 진주를 발견했지. 세상에서 가장 큰 왕 진주 말이야. You know? 확신해. 이 친구는 머지않아 세계 제일의 보컬리스트가 될 거야. 그리고 그 첫 행보는 내 싱글이지. 곧 발매될 테니 퐈이어 키드의 행보를 기대하라구.”
도대체 그는 어떤 목소리를 가진 가수일까? 그의 정체가 궁금한 사람은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 한국 예선을 확인해보자.
“…….”
메리의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미국은 정말 보수적인 나라다.
다른 나라의 가수 따위, 관심이 없다.
그게 유럽도 아니고, 동양의 남자 가수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지금 현재 미국 최고의 프로듀서, 이스트 웨이브가 ‘비원더의 권노을’을 당당하게 추천했다.
미래의 ‘세계 제일을 보컬리스트’라는 엄청난 수사까지 넣어서 말이다.
비슷한 일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메리가 웨이터에게 고개를 돌려 질문했다.
“그럼, 이 노엘이란 사람을 보기 위해서 글로벌 비전 한국 예선을 틀어놓은 거란 말이에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뭐 딱히 틀어놓을 스포츠 경기도 없고 말야. 아침이니까.”
어딘가에서 ‘시작한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펍에서 울려 퍼지던 배경음악이 잦아들더니, 레스토랑의 모든 손님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메리의 친구, 권노을이 무대에 우뚝 서 있었다.
메리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화이팅…!’
[닿지 못해. 너의 본모습을.
내가 나를 보여주지 못하니까.
알잖아.]
노래가 시작되고, 모두 숨죽여 무대를 감상했다.
스티비 원더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휭크(Funk) 알앤비 음악이었다.
가사부터 연주까지, 모두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건 권노을의 보컬이었다.
시큰둥하게 스크린을 지켜보던 관객들이 권노을이 입을 열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의 소리를 냈다.
결정타는 간주였다.
간주에서는 메리의 룸메이트였던 조민하가 화려하게 애드립했다.
레스토랑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마무리는, 권노을의 마지막 후렴이었다.
[놓지 못해. 지금 잡은 손을.
너의 마음속 깊은 곳이 보여.
알잖아.
지금의 우리는 하나란 걸.
흠이 있기에 완성됐단 걸.]
사람들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저 친구 대체 누구야?”
“이스트 웨이브가 홀딱 반할 만한데. 그 녀석 운 좋구만.”
“저 사람 싱글 언제 나온 데?”
“너무 잘생겼다.”
“얼굴이? 그냥 노래에 반한 게 아니구?”
메리는 이미 차게 식어버린 빵을 입에 구겨 넣었다.
뭔가 집어넣어야 머릿속이 정리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권노을의 무대가 미국 한복판 레스토랑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젊은이부터, 70대 노인층까지, 모두에게 폭넓은 지지를 얻는 노래를 보여주었다.
적어도 이 레스토랑의 모든 손님이 권노을의 팬이 되었다.
심지어 방송이 끝나고, 이스트 웨이브가 미리 녹화해 놓은 인터뷰까지 방송에 나왔다.
[봤지! 이게 퐈이어 키드야. 내 이번 새 앨범에 첫 싱글의 주인공이지. 이 친구는 내 자랑거리가 될 거야. 세계 제일의 가수가 될 거니까. 두고 보라고.]
‘노엘. 보고 있어요…?’
메리는 점점 권노을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