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재호가 항의했다.
“아니, 갑자기 느닷없이 너무 예의 없는 요구 아니에요? 그냥 아무것도 없이 덜렁 곡을 녹음하라구요?”
로메로가 씨익 미소 지었다.
“편곡할 시간은 없겠지. 자, 비트 주세요. 15분 뒤에 보지. 그럼 굳럭.”
로메로는 바로 녹음실을 나가 버렸다.
비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단 하나의 반주를 가지고 15분 안에 한 곡을 녹음하라는 황당한 요구였다.
하늘이가 손가락을 깨물며 말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요? 아예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 전 모르겠어요. 아 뭐 이딴 경우가….”
재호도 머리를 감싸 쥐었다.
“15분 만에 곡을 써? 엔간한 노래를 연습할 시간도 안 된다구.”
투덜대다 아까운 1분을 낭비했다.
하지만 불평을 해봐야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일단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나는 우선 하늘이의 팔을 잡았다.
“하늘이 너, 혹시 준비된 멜로디 없냐? 아무거나 좋으니까.”
“준비된 멜로디요? 음….”
하늘이가 허밍으로 멜로디를 몇 개 들려주었다.
그중, 괜찮아 보이는 멜로디를 하나 골랐다.
“나나 나나나나 나나. 나나나 나나 나나나. 이 멜로디 좋네. 이 멜로디 중심으로 지금부터 벌스(*verse. 노래의 절.) 짜봐. 시간 없으니까 1절만 짜. CM송 비트 들었지? 상쾌한 느낌이니까 멜로디도 청량한 방식으로. 오케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바로, 재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 재호 너는 방금 멜로디 들었지, 어때?”
“뭐. 캐치하긴 했는데…. 가사도 없구. 이걸로 곡이 나오겠어?”
“그러니까 니가 만들어야지. 자, 벌스는 환희가 만든 단순한 멜로디면 되는데, 코러스는 그러면 안 되잖아? 좀 풍성해야지. 그러니까 지금 빨리 니가 화음 쌓아봐.”
“코러스를 만들라구?”
“그래. 딱 웅장한 느낌이 나게. 포스트 코러스 (* 후렴 바로 뒤에 멜로디를 마무리 짓는 또 하나의 후렴 파트)도 만들면 좋구. 아, 이 곡 같은 ‘마이클 잭슨’의 청량함이 느껴지게 부탁해. 알았지?”
“말은 쉽지… 그래도 알겠어.”
둘이 작업하는 사이에 나는 주 멜로디를 연습했다.
5분이 지났을까, 하늘이가 내게 벌스 파트 멜로디를 들려주었다.
“야 뭐 이리 높아? 1절이 후렴보다 더 높은데?”
“오히려 1절 파트에서 시선을 잔뜩 끌고, 코러스에서는 드랍 (* drop. 곡의 사운드를 갑자기 떨어뜨림.)하면 좋겠다 싶어서요. 이렇게 하면 청량하면서도 좀 달리는 느낌이 나죠. 대신 ‘벌스’ 부분이 어려우니까 노을횽이 좀 잡아줘야겠어요. 후렴을 저희가 하고요.”
그사이 재호가 후렴 화음을 완성해 우리에게 들려줬다.
훌륭했다.
‘재호 이 자식 진짜 천재 아냐? 이 짧은 시간에 이런 코드 진행을 쓴다고? 전혀 평범하지 않은데?’
재호는 짧은 시간에, 전혀 전형적이지 않은, 그러면서도 대중들이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코드 진행을 짜왔다.
바로 재호가 파트를 배분했다.
평소와는 달리 내가 노래의 포문을 열었다.
이후 재호와 환희가 화음을 잡고, 내가 가장 낮은 주 멜로디를 부르기로 했다.
단숨에 노래를 녹음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3분 남짓, 우리에게 녹음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침착하게 환희가 써온 가사와 멜로디를 확인한 후, 바로 녹음에 들어갔다.
[오래전부터 기다려 왔던 밤이야.
너와 함께하는 날이야.
그런 날에 필요한 게 있지.
바로 너와 나 사이 톡 쏘는 케미
불붙여 주는 우리 둘의 민티]
재호와 환희가 코러스로 잔잔하게 화음으로 받쳤다.
후렴에는 가사를 붙일 여유도 없었다.
‘켁!’
갑자기 목에서 재채기가 났다.
필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재채기는 막았지만, 노래는 부를 수 없었다.
그대로 재화와 환희가 ‘나나나’로 노래를 마무리했다.
재호가 만든 경쾌한 마이클 잭슨 풍의 코러스 덕에 산뜻하게 곡이 끝났다.
[나나나 나나나나 나나. 나나나 나나~ 나나나!]
녹음을 마치자 딱 15분이 되어 스톱워치가 울렸다.
녹음이 끝나자마자 참고 있던 재채기가 터졌다.
“켁켁! 켁켁!”
스톱워치가 울리는 그 순간,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로메로가 녹음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됐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메로가 굳은 표정을 풀고, 씨익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합격이야.”
“네?”
“이번 미션, 퀄리티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15분 안에 곡 녹음하라는, 좀 무례한 부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진짜 녹음하느냐 여부지.”
그냥 해내기만 하면 합격이란 뜻이었다.
하늘이가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연기를 못 할 정도로 빡쳤군.’
“그런 미션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괜히 참가자 괴롭히는 거 같은데요. 저희 정말 똥줄 타면서 녹음했는데요.”
로메로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팝 시장의 기회란 건 그런 거야. 갑자기 5분 안에 새 곡을 만들어 봐라. 지금 당장 오프닝 액트가 비었는데 공연해줄 수 있느냐. 그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찾아오지.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지 여부는 평소에 얼마나 준비되었는지에 달렸어. 이번 미션은 바로 그런 ‘준비성’을 확인해 본 거라고 생각해 줘.”
재호랑 환희가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질문했다.
“그럼 이제, 끝난 건가요?”
“가도 좋아. 합격이니까. 탈락이었으면 온갖 귀찮은 패널티니, 서브 미션으로 귀찮게 했을 텐데. 통과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나도 편해졌네.”
재호랑 환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나도 뒤따라갔다.
그러다 문득, 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려 미스터 로메로에게 말했다.
“로메로.”
“왜?”
“저희가 녹음한 곡 좀 꼭 들어주시고, 나중에 제작진 통해서 코멘트 좀 해주세요. 이왕 만든 곡이니까, 제작자 관점에서 피드백 듣고 싶네요.”
“이 곡을 나보고 피드백해 달라고? 하!”
“네.”
로메로가 혀를 찼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알겠어. 가봐.”
나는 꾸벅, 인사하고 녹음실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 * *
권노을이 나가고, 미스터 로메로 혼자 녹음실에 남았다.
‘재미있는 친구야.’
일부러 신경을 긁는 미션을 주었다.
그런데 노엘, 이 친구는 그러거나 말거나 도움을 청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더 많은 배움을 갈구한다.
미스터 로메로가 본 거물 가수들은 모두 저런 성격 특성을 갖고 있었다.
‘뭔가 코리아까지 와서 엄청난 새끼 호랑이 한 마리를 만난 느낌인데. 하지만 뭐, 15분 만에 쓴 곡이 완성도가 있어 봤자기는 하지. 그래도 부탁받았으니 한 번 들어나 볼까?”
미스터 로메로는 가벼운 마음으로 비원더의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그리고, 노래를 다 들은 후 미스터 로메로는 너무 놀라 자신이 쓴 모자를 떨어뜨렸다.
“뭐야 이건?”
얼핏 들으면 흥겨운, 마이클 잭슨 풍의 평범한 팝이다.
길이도 불과 1분 30초 남짓.
하지만 전문적인 음악 지식을 가진 로메로에게 이 곡은 전혀 다르게 들렸다.
마이너 코드를 써서, 메이저 코드 같은 밝은 느낌을 만들었다.
덕분에, 굉장히 대중적이면서도 뻔하게 들리지 않는 노래가 완성됐다.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완성도는 뭐야? 15분 만에 이런 곡을 만들었다고? 디테일한 기술도 기술이지만, 이렇게 빠르게 곡 전체의 그림을 그리는 결단력이라니.’
생각보다 이 팀, 좋은 리더가 있는 게 분명했다.
거기다가, 믹싱할 시간도 없었을 텐데 깔끔한 백그라운드 보컬들이 맛깔스럽게 곡 전체를 잡아주었다.
기계로 노래를 만질 시간도 없었다.
이건 3인 멤버 모두가 완벽에 가까운 가창력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이것조차 끝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메인보컬의 노래였다.
1절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존재감으로 청자의 귀를 휘어잡았다.
흥겨운 팝 음악은 가창력을 뽐내기에 적합한 장르가 아니다.
되려, 가창력 좋은 가수도 신나니까 대충 노래 잘하는 티도 안 나기 마련이었다.
권노을은 이런 가벼운 음악에서도 완전히 음악을 장악했다.
스타카토에 가까운 악센트를 찍어줘서, 곡의 리듬감을 듣는 사람의 뇌리에 박아 넣었다.
거기다가 시원한 보컬로, 마치 탄산음료와 같은 청량함을 한 모금 추가했다.
1분 30초가 지난 후, 로메로는 큰 좌절감을 느꼈다.
우선, 이 곡이 벌써 끝났다는 점이 아쉬웠다.
‘더 듣고 싶어.’
4분짜리 완성된 버전이 미치도록 궁금했다.
더욱 큰 감정은 ‘절망’이었다.
이번 미션을 시키긴 했지만, 사실 로메로는 뮤지션이 아니었다.
15일 만에 곡을 하나 만들어라, 라고 하면 로메로는 다양한 직원을 동원하여 결과물을 뽑아낼 것이다.
하지만 15분 만에 이런 곡을 쓸 재주는 그에게는 없다.
로메로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거, 예선이 점점 더 재미있어지겠는걸?”
* * *
한편, 비원더는 오랜만에 전문 안무가 노자경을 안무 연습실에 초대했다.
권노을의 아이디어였다.
‘이번 무대는, 이전 무대처럼 강렬한 간주가 핵심이야. 하지만 이전 무대에서 이미 코러스를 써버렸지. 또 같은 방식을 반복하는 건 너무 뻔해.’
다른 무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고민 끝내 떠올린 것이 안무였다.
이전에 내가 안무가 노자경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 인연으로, 몇 번인가 우리 비원더의 안무를 맡아준 적이 있었다.
이번 무대에서도 노자경에게 비원더 3인이 소화할 수 있는 안무를 짜달라 부탁했다.
한마디로 우리에겐 강렬한 ‘댄스 브레이크’가 필요했다.
노자경이 성큼 앉아서 내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요새 거의 뭐, 얼굴도 못 보겠는데!”
“죄송해요. 너무 바빠서.”
“에휴, 뭐 괜찮아요. 이렇게라도 얼굴 보니까 좋네. 뭐 무슨 용건이 있어서?”
내가 이번 곡 컨셉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내용을 다 들은 후, 노자경이 눈을 살짝 감으며 물었다.
“이거, 그냥 말만으로는 감이 안 오네! 곡 좀 틀어 줄 수 있어요?”
미도리와 재호가 만든 데모 비트를 들려주었다.
기타와 어쿠스틱 드럼이 만든, 적당히 비트가 가미된 음악이었다.
다행히도,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던 노자경이 곧 어깨를 들썩거리며 리듬을 탔다.
노래가 끝나자 노자경이 감탄했다.
“이야~ 이런 편곡을 다 보네. 처음에는 통기타 곡에 무슨 춤이야 싶었는데. 다 들으니까 이해가 된다고. 이거 좋은데요. 한 번 안무 만들어 봅시다! 언제까지 줘야 해요?”
“…오늘 내면 제일 좋은데요.”
내 대답을 들은 노자경이 조용히 한숨을 쉬며 되물었다.
“오늘?”
“시간이 없어서요. 저희 무대가 다음 주인데. 저희가 노래 연습하면서 안무 연습 병행하려면 오늘 내로는 안무가 나와야 좋을 거 같습니다.”
머리를 긁적거리던 노자경이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저희 같이 레슨해 봅시다. 세분 수준을 보면서 해야 할 거 같아요.”
* * *
춤 연습 1시간째.
재호와 나는 순식간에 녹초가 되어 땅바닥에 엎드려 버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아이돌 연습생이던 환희만 그나마 두 다리로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노자경이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 이 정도는 소화할 수 있어야 하는데! 확실히 환희 씨가 다르긴 다르네요. 아이돌 하려고 했을 만해! 춤도 기본기가 좋네요. 리듬감 좋고, 아이솔 레이션 깔끔하고.”
환희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발라드 가수인데요 뭐. 소용없죠.”
“아아니! 무슨 소리예요. 당장 이번 무대에서도 쓸모가 있는데. 지금 춤을 환희 씨만 춰야 할 판이야. 나머지 두 멤버 수준에 맞추기엔 환희 씨가 너무 아까워.”
“하지만….”
환희가 나와 재호 눈치를 봤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야야. 춤 니가 잘 추면, 너 혼자 댄스 브레이크 할 수도 있지. 우린 춤 분량 걱정 없어. 그지?”
재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재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춤… 분량은… 헉헉! 제발! 헉… 가져가면… 좋겠다!”
그렇게 나와 재호는 간단한 안무를 하고, 환희가 제대로 된 댄스 브레이크를 하는 것으로 댄스 분량을 전격 합의했다.
노자경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면 좀 해볼 만하지! 10분만 쉬고 개인 연습 들어갑시다.”
우리는 노자경이 가져온 주스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벽에 쓰러지듯 기대어 쉬고 있는데, 노자경이 슬쩍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노을 씨, 김지태 씨 그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이요?’
노자경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반응 보니, 모르시는구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