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재호와 함께 합주실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재호가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했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재호 군 노으루 군!”
이번에 우리가 초대한 사람은 우리 밴드의 기타리스트 미도리였다.
미도리가 방 안을 살폈다.
다른 멤버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왜 저만 불렀어요?”
재호가 입을 열었다.
“이번 노래가, 좀 기타가 특별해서요. 우선 미도리 상이랑 기타 리프를 짜고 싶었어요. 저 혼자 상상으로 편곡하기보다는, 괜찮아요?”
“오~. 어떤 컨셉이길래 그래요? 한 번 보여줘요.”
내가 컴퓨터를 켜서 엘비스의 노래를 틀었다.
미도리가 ‘오호~’ 하고 감탄하며 곡을 평했다.
“되에게 올드한 노래네요.”
다행히 이 노래를 알고 있다니, 반가웠다.
내가 물었다.
“이 노래 아세요?”
“그럼요. 엘비스를 모르면 말이 되나요? 팝스타 중의 팝스타잖아요!”
이미 곡을 알고 있다면 더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곡이 사실 이탈리아 가곡이 원곡이라. 미션 곡으로 딱 맞는 거 같아요!”
“오 스고이! 그러네요. 게다가 어쨌든 흑인음악 베이스니까, 비원더의 느낌도 살릴 수 있겠어요.”
재호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조심스럽게 미도리에게 질문했다.
“이거 혹시, 어떻게 편곡하면 좋을까요?”
“프로듀서는 재호 군이잖아요? 재호 군의 의견은 어때요?”
재호가 슬쩍 나를 쳐다보더니 미도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막 아주 서던록. 아주 루츠록에 가까운 딥한 음악을 하고 싶은데. 블루스 수준으로요. 그게 엘비스 음악이잖아요. 근데 이런 식의 연주도 혹, 가능해요? 너무 어려운 요구인가 싶어서.”
미도리가 피식 웃더니만, 기타 케이스를 꺼냈다.
일렉 기타 세팅을 척척 바꾸더니만, 연주를 시작했다.
서던록 정도가 아니라 거의 남진의 트로트에 가까운 토속적인 음악이 흘러나왔다.
재호가 탄성을 질렀다.
“와~ 거이 ‘엔카’(* 트로트와 비슷한 일본의 전통 가요) 수준의 연주네요!”
“엘비스 느낌의 연주라면 이런 거죠? 약간 느끼하지만, 또 은근히 중독성 있는.”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보탰다.
“이런 음악도 잘하시네요? 일본은 재즈 기타리스트는 재즈, 엔카 기타리스트는 엔카, 록 기타리스트는 록, 이렇게 전문적으로 연주해서 다른 장르는 잘하지 못하잖아요? 미도리 상은 당연히 팝 기타리스트라 이런 부탁은 어려울 거 같았어요. 심지어 서던록, 블루스 같은 매니악한 음악인데요.”
미도리가 고개를 저었다.
“저, 일본 기타리스트 아니에요. 일본 국적의 기타리스트일 뿐이라구요 노으루 군! 루아랑 같이 활동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한국이 제 거점이에요. 일본은 피곤해요. 일본에 가기만 하면 부모님은 결혼하라 성화셔서, 좀 싫어요!”
그렇게 말하며 미도리는 혀를 내밀며 웃어 보였다.
그건 음악이랑은 좀 상관없는 거 같긴 한데, 뭐 여튼 상관없었다.
편곡이 수월할 것 같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나와 재호가 어떤 음악을 원하는지 감을 잡은 미도리가 술술 블루스풍의 기타 리프를 새로 짜기 시작했다.
‘오 솔레 미오’의 멜로디에, 우리가 바라는 찐득한 로큰롤 음악이 가미된 연주가 흘러나왔다.
재호가 감탄했다.
“와… 설마, 이게 되네요. 이제 그냥 여기에 다른 악기 화성 얹기만 하면 돼요. 제가 뭐 할 것도 없겠네요!”
내가 정정했다.
“아니, 퍼커션하고 브라스도 이번에는 깔아야 해. 이번 주 내에 되겠어?”
“야, 그렇게 쉽게 되냐.”
“재호 너는 2일이면 되잖아. 아니야?”
“그렇긴 하지. 에헴!”
은근슬쩍 재호 기를 세워주고 시선을 미도리에게 돌렸다.
미도리는 어느새 기타 편곡을 거의 마무리했다.
하지만 미도리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뭐 문제 있나요?”
“이걸로… 되겠어요 정말로? 미국 중장년층 대상으로 하는 공연이 아니잖아요? 한국 관객들과 최신 트렌드 음악을 만드는 심사위원들한테 이런 올드팝 타입의 노래로 괜찮을까요?”
“좀 지루한 감이 있죠?”
“네!”
미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생각을 이미 했었다.
분명 훌륭한 원곡이었다.
하지만 너무 올드했다.
거의 50년 전 노래이니, 당연히 지금 기준에는 너무 자극이 부족했다.
심지어 고루하고 뻔하게 느껴졌다.
‘이전 라운드에서 깨달은 게 있어. 서로 다른 두 개의 곡을 적절하게 부딪치면 엄청난 효과를 낸다는 거.’
지난 라운드에서 비원더는 똑같은 곡을 부르다, 전주 부분에만 독특한 느낌의 코러스를 넣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장르의 곡을 섞어서 전혀 다른 자극을 주는, 케이팝 특유의 전략이었다.
이번에도 이런 방식을 활용해보려 했다.
“한 곡을 더 만들 거예요.”
“더 만든다고요? 왜 그런 짓을 해요? 어차피 무대에서는 한 곡밖에 못 하는데.”
“두 곡을 섞어서 한 곡으로 만들려고요. 전혀 다른 곡이면 더 좋겠죠. 그래, 올드한 록과 상반된, 살사 리듬의 남미 음악이 섞이면 어떨까요? 살사 리듬으로 기타 쳐주실 수 있나요?”
미도리는 잠시 고민하더니만, 자연스럽게 블루스에서 살사로 넘어가 연주를 시작했다.
마치 원래 한 곡인 것처럼 스르륵 곡이 넘어갔다.
그녀의 연주를 듣자마자 재호와 내 머릿속에는 곡 전체가 그려졌다.
남미 느낌 가득한 키보드에, 재호가 카리브해까지 가서 사 온 전통 타악기, 거기에다 드럼까지 더하면 훌륭한 살사 음악이 될 터였다.
“이거다!”
재호도 엄지를 들어 보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이거거덩!”
“야 원재호, 빨리 그러지 말고 악보 따자. 우선 퍼커션부터, 드럼하고 피아노야 연주자분들 부탁하면 되니까.”
“오케이 오케이!”
정신없이 음악 작업에 들어가는 우리를 보면서 미도리가 피식 웃었다.
“나는 더 할 거 없어요?”
“이렇게 그대로 한 번만 가녹음할게요. 감사합니다.”
“두 분 진짜 대단해요. 어떻게 이렇게 순발력 있게 편곡 아이디어가 척척 나와요? 저는 1주일 안에 이런 어려운 미션 풀어내라 그러면 그냥 주저앉아 울어 버릴 거 같은데.”
재호가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저는, 배운 대로 하는 타입입니다. 순발력은 자신 없어요. 환희도 지나치게 디테일을 연구해서, 딱히 빠르진 않아요. 앨범 작업은 되레 느립니다. 다 노을이 덕분이에요. 기가 막힌다니까요? 어찌나 빠르게 순간적으로 판단해서 답을 말하는지. 무슨, 언제나 정답을 갖고 있는 사람 같아요.”
“하하 아닙니다. 다 같이 하는 거죠. 팀이라서 다행이에요. 게다가 하우스 밴드 멤버도 너무 훌륭하고요. 미도리 상처럼, 다들 많은 도움을 주고 계셔서 가능하죠.”
미도리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재호 군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우리 팀 만든 거도 다 노으루 군이잖아요! 저도 노으루 군이 데려왔고. 덕분에 재미있는 경험 많이 해서 좋아요. 꼭 롤러코스터 같아요.”
재호도 내게 눈빛을 맞추며 말했다.
“너무 어렵죠! 매번 추락하는 기분이에요. 뭐 그래도 저 녀석이라면 어떻게 해주지 않을까요?”
“하하.”
사실 15년간 음악을 해왔던 회귀자인 나에게 아직은 이 정도 문제 풀이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음악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그만큼 깊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글로벌 비전’에 참여하면서, 스케일이 전 세계적으로 커지면서 점점 대회 미션이 내 예상과 어긋나는 일이 생겼다.
‘뭐, 내 15년의 경험으로 어떻게 해봐야지. 왠지 내일쯤, 또 하나 황당한 미션이 나올 거 같은데?’
* * *
‘안 좋은 예감은 이렇게 맨날 안 들어맞아도 괜찮은데.’
갑자기 느닷없이 제작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인 미스터 로메로가 비원더를 부른다는 호출이었다.
서둘러 배영웅 실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지정받은 장소로 갔다.
지정받은 곳은 어마어마한 느낌의 녹음실이었다.
환희가 내게 속삭였다.
‘횽, 여기는 무슨 녹음실이 이래요? 죄다 허옇고 곡선인데여? 꼭 미래 도시 같아여.’
‘뭐 좀 독특하기는 하네.’
여지까지의 녹음실이 이케아 같은 원목의 느낌이었다면, 이 녹음실은 마치 애플 스토어 같은 금속성의 느낌이 있었다.
미스터 로메로가 껄렁껄렁 걸어 나왔다.
가뜩이나 큰 체형의 사람이 하와이안 셔츠를 입으니 한층 더 커 보였다.
“왔나?”
“안녕하세요.”
미스터 로메로가 우리를 자리로 초대했다.
3명이 나란히 붉은 입술 모양의 고급 소파에 앉았다.
미스터 로메로는 굳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서성거리며 독백에 가까운 연설을 시작했다.
“비원더! 이스트 웨이브하고는 좀 인연이 있다고 했었지. 말 많이 들었어. 그에 반해 나는… 비원더와는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지. 아쉽게도 말이야.”
그러고 보면, 심사위원장 바네사와 세계 최고의 프로듀서 이스트 웨이브와 달리, 미스터 로메로는 확실히 좀 캐릭터가 흐릿했다.
대단치 않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이라서였다.
환희가 해맑게 물었다.
“어떤 일 하시는 분이신가요?”
재호가 환희 입을 급하게 막았다.
“야!”
“왜여? 모를 수도 있져.”
미스터 로메로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크하하! 미스터 주 말이 맞아. 난 프로듀서야.”
“편곡자요?”
“미스터 원이나 이스트 웨이브처럼 편곡을 하는 프로듀서는 아니지. 노, 그게 아니라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Excecutive Producer). 제작자란 뜻이야. 보통 브라질, 카리브해, 그리고 스페인 위주로 활동했으니 모를 만해. 스페인어를 모르면 더더욱.”
“그러시군여….”
환희가 납득이 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그렇고. 내 프로필을 읊으려 온 게 아니야. 그런 건 몰라도 상관없어. 머리숱 많은 심사위원, 그 정도로 나를 생각해도 충분해. 그보다 궁금한 건, 자네들이야. 대체 자네들은 누구야? 왜 이런 작은 나라에 자네들 같은 사람들이 있는 거지?”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희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요?”
“미스터 주! 매주마다 송라이터로서 멜로디를 만들고, 심지어 영어 가사를 만들어 와. 영어 가사를 직접 써서 발표하는 팀은 이번 한국 예선에선 비원더밖에 없어. 그래서인지 비원더는 유독 해외 반응이 좋지. 게다가 그게 다가 아니야, 무대에서 관객을 몰입시키는 끼! 그야말로 압도적이지.”
환희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땅으로 피했다.
“헤헤, 감사해여.”
역시나 미스터 로메로 또한 만만찮은 프로듀서였다.
한 번에, 내가 재호를 영입했던 이유를 꿰뚫어 봤다.
특히 무대 위에서의 ‘에너지’는 환희가 꼭 필요했던 이유였다.
환희는 특유의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캐릭터를 ‘연기’하는 일에 달인이었다.
관객의 심장을 달구고, 폭파시켜 버렸다.
미스터 로메로가 말을 이어갔다.
“미스터 원도 놀랍지. 매주 이런 훌륭한 곡을 프로듀싱해 오다니.”
“감사합니다.”
“게다가 대 전략이 좋아. 늘 가장 본인이 가진 최선을 보여주는 편곡을 짜지. 누가 전체 전략을 짜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호가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대부분 전체 전략은 노을이가 짭니다.”
미스터 로메로의 시선이 내게로 고정됐다.
“노엘, 이스트 웨이브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 자기 타이틀곡을 맡겼다면서 말야. 솔직히 좀 허풍인 거 같았어. 하지만 라이브를 들어보니 달랐지. 99.9%의 가수는 75% 완성도의 노래를 불러. 근데 노엘의 노래는 100, 아니 150%야. 이런 가수는 역사에 남게 되지. 이런 가수를 동양의 작은 국가서 보게 될 줄은.”
“감사합니다.”
미스터 로메로가 슬쩍 눈웃음을 지으며 폭탄 발언을 했다.
“그러니 자네들이라면 이번 미션도 해내리라 믿네. 당장 ‘민티’ 로고송을 녹음해. 15분 주지.”
음악을 15분 만에 만들라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