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우리 앞에는 어마어마한 미녀가 서 있었다.
금발 벽안의 외국인 여성이었다.
환희는 창 바깥을 통해 마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공주같이 생겼네여!”
“…그래서 좋냐? 어차피 우리가 할 일은 똑같은데.”
“민티 마시는 거요? 저 사람 앞에서라면 한번… 마셔볼 만두?”
“됐다. 됐어.”
내가 먼저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섰다.
1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카메라 앞에 세팅되어 있었다.
소위 미국식 리얼리티쇼 느낌의 야외 세트였다.
“안녕하세요.”
금발의 여인이 내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빈틈없는 정장 차림에, 프로페셔널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누구시죠?”
“민티에서 온 마리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참가자들이 민티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미션 공개’ 리액션 영상을 찍을까 합니다. 부담 안 가지셔도 되니 한 모금씩만 마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마리는 다른 참가자를 확인하러 가겠다며 사라졌다.
환희는 계속 고개를 돌려 마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서라 아서.”
재호도 한마디를 날렸다.
“외국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제가 언제여!”
“됐다 됐어.”
배영웅 매니저가 슬쩍 다가와 우리에게 귀띔했다.
“저분이 민티 오너 가문의 차녀라고 하네요.”
그 말인즉, 우리의 방송에서 늘 훼방을 놓는 ‘민티’ 가문의 끄나풀, ‘론’의 여동생이란 뜻이었다.
아니 근데, 한 명이면 됐지, 아무리 스폰서라지만 한국 예선에 오너 가문 자식을 두 명이나 붙인단 말인가?
뭔가 이상했다.
“하하. 패밀리 비즈니스인가 보네요. 근데 한국 예선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오너 집안사람이 둘이나 방문하다니.”
배영웅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한국 시장이 중요합니다. 미국이랑 비슷한 취향이면서도 시장이 적당히 작아서요. 게다가 한국은 민티 점유율이 0%에 가깝기도 하고요. 한국 시장에 신경을 쓰는 것 아닐까요?”
“흠.”
일단 오너 집안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는 건, 도가 지나친 관심을 의미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 * *
아니나 다를까, 나쁜 느낌이 적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질리스크, 강민정, 그리고 김지태까지, TOP4가 모두 도착했다.
심사위원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윤강 PD 등 한국인 제작진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오직 외국인들, 그중에서도 스폰서인 ‘민티’ 쪽 사람밖에 없다는 뜻이다.
론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강민정이 물었다.
“미션 공개는 언제 하나요. 이미 우리는 내용은 다 알고 있지만.”
“연출을 해야 하니까 좀 이해해 줘. 그것보다, 촬영 전에 해야 할 게 있어. 민티를 마시는 샷을 찍어줘야겠어. 어이!”
스태프가 산더미처럼 ‘민티’ 캔을 가져왔다.
론의 지시로 스태프가 모든 참가자에게 민티 캔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그냥 한 모금 마시고 말 분위기가 아니었다.
“자자. 시원~하게 마시는 장면 보여줘. 이거 다 녹음되기 전까지는 심사위원 안 부를 거야. 그러면 미션 공개 녹화 못 찍는다고. 캬! 너무 시원해! 이런 표정으로.”
우리가 대꾸할 틈도 없이, 무작정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스폰서의 요구니 어쩔 수 없었다.
다들 떨떠름한 표정으로, 민티 캔을 집어 들었다.
사람마다 반응이 달랐다.
김지태는 평소처럼 느끼한 반응이었다.
“캬! 조오타! 이 민트 향기. 아름다워.”
내가 재호에게 속삭였다.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라 그런가? 너무 자연스럽네. 배우인 줄 알았어.’
재호도 툴툴댔다.
‘CF 배우를 가수보다 잘할 거 같다구 저 사람. 너무 가식적인 거 아니야?’
한편, 도저히 연기를 못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TOP4 중 유일하게 직업이 ‘배우’인 강민정이 제일 고생했다.
“아! 맛있다!”
말로는 맛있다고 말했지만, 미간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론이 ‘컷!’을 외쳤다.
“미스 캉! 얼굴 좀 피고 마셔요. 독약이야?”
강민정이 ‘나한테는 독약이야 마찬가지지’라고 속삭였다.
재호가 내게 귓속말했다.
‘나도 마찬가지라구. 탄산이라니! 차라리 사약을 줘.’
저런.
“아! 맛있어! 맛이써! 나 잘하고 있져 마리?”
…환희처럼 눈치 없이 벌컥벌컥 민티를 들이켜는 놈도 있었지만 말이다.
강민정도 강민정이지만, 무엇보다 재호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민티 캔을 쥔 재호의 손이 벌벌 떨렸다.
슬쩍 내가 일어섰다.
론이 손가락으로 나를 삿대질했다.
“거기! 왜 일어섰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 그래 뭐… 물 빼고 와. 그래야 더 많이 민티를 시원~하게 마실 수 있지. 고!”
화장실에 가자마자 메시지로 누군가에 연락했다.
그리고는 10분 정도, 일부러 시간을 끌며 세트로 돌아갔다.
돌아가자 론과 강민정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싫어요! 이 정도면 됐잖아요. 10번은 넘게 찍었어요. 그냥 이걸로 넘겨요. 나보고 10캔씩 마시라고 할 셈이에요?”
“그럼 좀 맛있게 마시던가! 있는 입맛도 떨어지게 해놓고서는.”
마리가 론을 팔로 잡아끌었다.
“그만해 오빠! 이 정도면 됐잖아. 여자들은 원래 탄산 한 캔 이상 마시기 어려워.”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이건 일이라고 일! 일에서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구니까 후계자가 될 수 없는 거야.”
‘얼씨구? 미국 재벌 가족이 한국까지 와서 아침드라마 찍으려 그러나?’
마리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PPL은 자연스러워야 해. 이렇게 찍어봐야 소용없어. 시청자가 바본 줄 알아? 다 알아봐. 진심으로 좋아하게 만들어야지. 이게 뭐야? 그러니까 장남이 아직도 확실히 인정을 못 받지.”
“뭐야?”
강민정 포함, 가수들이 멍하니 ‘민티’ 가문의 집안싸움을 지켜봤다.
그때였다.
“컷! 거기까지. 이제 다 찍었죠. 바로 미션 소개 가요.”
심사위원들과 한국인 제작진들이 들어왔다.
론이 중얼거렸다.
“분명히… 내가 이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는 심사위원들에게 공지하지 말라 했을 텐데?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나지.’
내가 재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슬쩍 말했다.
‘야 다행이다. 너 탄산 안 마셔도 되겠네.’
재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하… 다행이다 진짜.”
“야 뭐 탄산 먹으면 죽냐?”
“나는 심리적으로 죽거덩?”
“…그래 니 말이 맞다.”
적당히 재호 말을 맞춰주면서 다음 촬영을 준비했다.
제작진이 그동안 출연진들이 마셨던 ‘민티’ 캔들을 수거해갔다.
나는 시선을 론에게 돌렸다.
표정이 환해 보이는 마리와는 달리, 똥 씹은 표정이었다.
론 앞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에는 민티 캔으로 가득했다.
내가 재호에게 슬쩍 물었다.
‘야 론 저 사람, 대체 민티를 몇 캔 마신 거야?’
재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캔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어이구, 딱 봐도 스무 캔은 되는데?”
“촬영 시작한 지 1시간도 안 됐는데? 스무 캔을 마신다고? 말이 돼?”
재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기 상품에 자신이 있나 보지? 정직하긴 하네.”
뭔가 의심스러웠다.
* * *
다행히 이후 ‘미션 공개’는 별일 없이, 무난하게 마쳤다.
이미 우리가 알다시피, 미션은 ‘성악 미션’이었다.
클래식 곡, 그중에서도 성악곡 중 아무거나 골라서 부르는 미션이었다.
하지만, 촬영하기가 쉬운 거지, 선곡은 죽음의 난이도였다.
집에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밴드 합주실에 앉아 선곡 회의를 했다.
하지만 도저히 생각나는 곡이 없었다.
‘공주는 잠 못 이루고’ 같은 유묭 아리아는 너무 고음이었다.
그래, 그런 곡을 하면 내가 마지막에 하이라이트 고음을 한 번 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무런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곡이 돼버렸다.
그렇다고 합창곡을 부르자니, 합창곡은 너무 분위기가 성스럽고, 박자도 정적이라 ‘비원더’의 정체성에 하나도 맞지 않았다.
내가 소파에 쓰러지듯 앉으며 불평을 토해냈다.
“아! 뭐 이딴 미션이 다 있어. 클래식 성악곡이라니. 이럴 거면 콩쿠르를 나가지.”
하늘이가 동의했다.
“맞아요. 이건 뭐 특정 장르 편애 아니에요? 실장님한테 항의라도 넣어 달라 해볼까요?”
재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거도 일리가 있다구. 클래식 음악은 팝 음악이 뜨기 전, 그냥 ‘서구 음악’은 다 클래식 음악이었잖아. 과거로 돌아가자 이거지. 실제로, 클래식 음악 베이스의 팝페라 가수가 ‘글로벌 비전’에서 우승한 경우가 많다니깐?”
“확실히 클래식 팬답게 클래식 음악의 장점을 잘 아네. 그럼 좀 선곡해 봐! 아무도 아이디어가 없잖아?”
내가 핀잔을 주자, 재호가 여러 아이디어를 냈다.
재즈 오페라부터, 요새 나온 클래식 베이스의 뮤지컬까지, 주로 대중음악과 타협한 클래식 음악들이었다.
다들 나쁘지 않았다.
내가 시험 삼아 불러보니 제법 괜찮은 곡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이걸론 안 돼. 이건 미션을 회피하는 거야. 무엇보다, 이런 적당한 선곡으로 강민정 선배를 어떻게 이길 거야? 뮤지컬 배우를 뮤지컬 선곡으로 이기자고?”
“그러네?”
다들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하늘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투덜댔다.
“뭐 이딴 미션이 다 있어요?”
재호가 맞받아쳤다.
“아니거덩? 일리가 있다니까? 예전에는 ‘즐거운 나의 집’ 뭐 그런 류의 동요 같은 곡이 미국에서 최고 히트곡이었어. 그전에는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팝뮤직 스타였고! 클래식이라고 해도 딱딱한 게 아니라, 그냥 유행하던 음악이야. 재즈 음악이 히트하기 전엔 그랬지. 그다음에는 엘비스가 록 음악으로 히트했구. 그렇게 지금 우리가 하는 리듬 앤 블루스 음악이 뜬 거라구. 그냥 과거로 돌아가 보자는 거야. 거기서 새로운 게 나오니까.”
“잠깐만. 재호야. 방금 너 뭐라 그랬냐?”
“리듬 앤 블루스?”
“아니 그 전에.”
뭔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엘비스가 록 음악으로 히트?”
“바로 그거야! 엘비스! 팝 음악계의 첫 스타!”
재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 다들 아는 거잖아. 그게 뭐 어쨌다구?”
“그게 말이지… 그렇지가 않아.”
나는 음원사이트에 들어가 곡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비스의 노래 중 한 곡을 틀었다.
‘It's Now or Never’란 제목의 슬로우 록이었다.
엘비스의 간드러진 창법이 제대로 두드러지는 노래였다.
어쩐지 라틴풍의 밝음이 느껴지는 피아노와 퍼커션도 썩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 곡의 진가는 다른 데 있었다.
노래를 들은 재호가 반색을 표했다.
“이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곡. 이탈리아 가곡 ‘오 솔레 미오’의 번안곡이야. 물론 성악곡이지. 이번 미션에 쓸 수 있다는 뜻이야. 하지만 노래 자체는 엘비스가 자기 스타일로 편곡한 덕에, 비원더가 충분히 소화할 수 있어.”
평소 비원더가 부르는 세련된 최신 알앤비와는 좀 달랐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시도해볼 수 있어 보였다.
재호가 손뼉을 쳤다.
“됐어! 이제 밴드 내일 모셔서 편곡 시작하자. 이거 가사를 그대로 쓸 수는 없지? 환희 네가 영어 가사 만들어줘.”
내가 재호의 말을 끊었다.
“잠깐 재호야, 이 정도 작전으로는 안 돼. 노래는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곡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엄청나게 임팩트 있는 곡은 아니잖아?”
재호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
엘비스라는 팝스타의 매력으로 가는 곡이지 노래 자체로 관객을 뒤집어 버릴 만한 곡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가 더 필요해. 그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