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공연의 마지막 순서를 장식하는 게스트로 초대받은 김종윤은 당황했다.
바로 앞에서, 록밴드 바질 리스크가 압도적인 무대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Make Some Noise!!!]
여지까지 중저음 위주로 노래했던 요한이 강렬한 고음을 뿜어냈다.
한때 김종윤과 같이 팀을 했지만, 요한의 저런 가창력은 처음이었다.
‘저 녀석이 원래 이렇게 부를 수 있었단 말이야? 그럼 굳이 왜 나랑 팀을 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밴드의 매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강렬한 리듬의 펑크록 사운드가 대중적인 고음 사이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김종윤은 또다시 절망했다.
바질 리스크가 무대를 부숴놓은 후, 바로 다음 순서에 처량한 발라드를 불러야 했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과하게 높은 키의 노래를 부르지 않고,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고음의 노래를 불렀다.
대신 노래가 밋밋해졌다.
실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특징도 없어진, 그런 노래였다.
“와~.”
“고생… 했어요?”
김종윤 앞의 관중들은 마지못해 연민의 박수를 보냈다.
조롱과 야유보다도 더 비참한 결말이었다.
* * *
“젠장!”
김종윤은 대기실로 돌아가자마자 주먹으로 문을 쳤다.
분했다.
자신이 원했던 노래를 아예 부르지 못했다.
괜히 옆에 있던 매니저에게 분통을 터트렸다.
“야! 왜 꾸물대고 있어. 빨리 물 가져와. 저런 녀석이랑 같이하니까 컨디션이 안 올라오지 제엔장.”
매니저가 아무 말 없이 생수를 가져다주었다.
김종윤이 대기실 소파에 털썩 걸터앉아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김종윤이 이를 악물고는 말을 이어갔다.
“대체. 그놈들은 어떻게 갑자기 그런 노래를 부른 거야. 설마 립싱크 했다던가? 맞아. 요한 그 녀석이 갑자기 노래가 늘 리가 없지. 수상해, 이건 심사위원들에게 제소해 봐야겠어. 립싱크는 당연히 탈락 감이지.”
그때였다.
문 앞에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김지태 선배가 서 있었다.
같은 ‘예정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인데다, 같은 장르인 발라드 가수라 직계 선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마디로 불편한 선배라는 뜻이다.
김종윤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오셨어요, 선배?”
“후배, 뭔 말을 그렇게 해? 밴드가 아름다운 무대를 보여줬는데. 뭐? 립싱크? 사람이 저렇게 정교하게 핸드 싱크를 할 수 있을 거 같아? 진짜배기 밴드는 그런 거 안 해. 자존심이 있어서. 뭐… 가수도 보통은 그런 거 안 하지만.”
은근슬쩍 립싱크를 했던 김종윤을 비꼬는 말이었지만, 사실이었기에 김종윤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매니저가 ‘오셨습니까? 형님’하고 김지태에게 인사했다.
김지태가 손으로 화답하며 말했다.
“어, 그래그래. 자네도 빨리 승진해서 새끼 달아야지. 언제까지 현장서 구를 거야? 아 그리고 종윤 후배?”
“네넵!”
“후배, 매니저한테 말이 좀 짧더라? 가수들이 솔직히 혼자 뭘 할 줄 알아. 은행 일을 볼 줄 알아, 집안일이 가능해, 매니저 없으면 운전 못 해서 어디 가지도 못하는 게 가수 아냐?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거 아니다? 그러다가 폐기처분 되는 수가 있어. 우리 회사 냉정해.”
김지태가 껌을 찍찍 씹으며 말했다.
김종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김지태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일단 한번 누군가를 적으로 인식하면, 다시는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게다가, 김지태는 베테랑 가수로서, 예정 기획의 고위 임직원과 매우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 X 됐다.’
그에게 밉보인다는 것은, 이제 이 회사 다니기 힘들어졌다는 뜻이었다.
* * *
본선 1차 무대의 순위가 공개되었다.
비원더는 바질 리스크에게 근소한 차이로 밀려 2위를 했다.
그래 봐야 1점 차이였다.
앞으로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정도.
무대가 끝나고, 권노을이 만족스럽게 대기실로 돌아왔다.
들어오자 조민하 선배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왜 이리 기분 좋아요? 우리 졌어요. 1위는 바질 리스크라고요.”
“괜찮습니다.”
“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근소한 차이니까요. 게다가 바질 리스크 선배가 모든 사력을 다할 거란 것도 알고 있었어요. 오늘, 김종윤이 게스트로 왔으니까요. 둘은 악연이 있죠. 저보다 더.”
“그랬겠죠, 김종윤은 바질 리스크 멤버를 잠깐 했으니까. 그것도 이용만 해 먹은 거였지만. 그 사람다운 짓이었어요.”
“저도 조민하 선배도. 김종윤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잖아요? 그건 해냈으니 된 거죠. 승리는 다음에 하면 되고요.”
“한가하네요. 여튼 가요. 오늘도 회식할 거죠?”
“네에….”
사실, 이번에는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고개를 돌려, 소닉 독에게 시선을 향했다.
처음에 소닉 독에게서 우울한 기색을 느끼지는 않았다.
출중한 능력의 멤버들과 함께한다는 것을 신기해했고, 새로운 환경에서 연주한다는 점도 즐거웠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제 슬슬 한국에 온 지 1달이 넘어가자 소닉 독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뒤풀이에서도 음울하게 하늘만 쳐다볼 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따지고 보면 소닉 독은 내가 욕심이 나서 데려온 거니까. 내가 좀 케어해야지.’
나는 조민하 선배와 재호에게 슬쩍 뒤풀이 리딩을 부탁하고는, 소닉 독에게 향했다.
소닉 독이 쓴 초콜릿을 먹은 듯한 복잡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수했다.
“멋진 무대였어요. 땡큐. 이제 뒤풀이죠?”
“오늘은 저랑 가요. 다른 곳으로요.”
소닉 독이 발끈했다.
“왓?(What?) 왜요? 특별 취급할 필요 없어요.”
“그냥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가시죠.”
소닉 독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 * *
생방송 라이브가 끝나자 시간이 벌써 12시가 넘었다.
레스토랑에 가기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과감하게 외식 계획을 접고, 소닉 독과 함께 숙소로 향했다.
매번 연습하는 밴드 합숙실 바로 옆 저택이다.
소닉 독에게 내가 물었다.
“요새 어때요?”
“뭐, 그냥 그렇죠.”
“한국 생활은 괜찮나요? 사실 연주만 계속하니까. 어디 갈 시간은 없긴 하겠지만.”
소닉 독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느릿느릿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거, 글로벌 비전은 영국 거니까 말은 못 하겠는데요. 스케줄 너무해요. 뭐랄까, 미쳤어요. 1주일에 무대 하나씩 가져오라니, 무리라고요. 리디큘러스!”
역시나, 쌓인 게 많아 보였다.
“그래도 연주는 마음껏 할 수 있잖아요? 오늘도 소닉 독 연주가 진짜 큰 역할 했어요. 신시사이저까지 잘하실 줄이야.”
“그런 거야 뭐 기본이죠. 이젠 다 컴퓨터로 작업하는데 뭐. 신시사이저는 당연히 할 줄 알아야 음악인이죠. 별것 아니에요.”
“겸손하시네요.”
사실, 무대를 겪으면서 더 뼈저리게 느꼈다.
소닉 독 이 인간,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천재였다.
괜히 나중에 2010년대를 주름잡는 최고의 베이시스트가 될 인물이 아니다.
그가 베이스를 잡은 뒤로, 우리 팀의 음악 퀄리티가 아예 달라졌다.
재호는 소닉 독의 베이스 연주가 너무 좋아, 매일 녹음한 후, 나중에 듣고 악보로 옮기면서 편곡 공부를 할 정도였다.
내 안목이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그러니, 글로벌 비전에서 우리가 좋은 모습을 계속 보이려면, 소닉 독을 반드시 하우스 밴드에 잡아두어야 했다.
그래서 오늘 이 만찬을 준비했다.
“소닉 독, 사실 소닉 독의 과거를 좀 공부했어요.”
“뭐? 어디서요?”
“검색해보니까 다 나오던데요 뭐. 인터뷰도 하셨더라고요.”
소닉 독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소리 나게 쳤다.
“그런 걸 다 봤어요?”
사실 원생에서 그의 커리어를 다 봤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의외더라고요. 독일계 백인만 사는 줄 알았던 위스콘신주 밀워키 출신이더라고요?”
“북쪽에는 흑인들이 많이 살죠. 좀 가난한 동네예요. 위험하기도 하고. 뱅(Bang).”
그러면서 소닉 독이 장난스럽게 총 흉내를 냈다.
“그래도 악기연주는 학교에서 배우신 거죠?”
“정부 장학생으로 선정된 덕에 백인들이 주로 다니는 사립학교에 갈 수 있었어요. 베이스 연주를 거기서 배웠죠. 뭐, 그때 배운 덕분에 먹고살아요. 근데 그게 왜요?”
“그런 게 있어요.”
내 예상대로였다.
* * *
방에 오자마자 오븐에 시간을 맞춰 둔 음식을 꺼냈다.
음식을 보자마자 소닉 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어떻게 알았어요!”
“이거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오늘 내가 준비한 메뉴는 정통 독일식 식사였다.
“슈바이처 학센! (독일식 족발) 정통 독일식 소시지! 사우어크라우트! (독일식 양배추절임) 거기다가 밀러 맥주까지!”
“마음에 드시니 다행이네요.”
소닉 독이 허겁지겁 상에 앉으며 말했다.
“너무 맘에 들어요! 고향 온 기분이네요.”
그럴 것 같았다.
배영웅 매니저는 나름 신경을 쓴다고 소닉 독을 배려해 소위 ‘흑인 전통 음식’을 매번 공수해 왔다.
보통 흑인 전통 음식이라 하면 프라이드 치킨이나 맥앤치즈 등을 말했다.
하지만 왠지, 볼 때마다 소닉 독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
‘이건 내 음식이 아닌데.’라는 느낌이랄까?
내가 날름 슈바이처 학센을 한 조각 먹었다.
한국 족발과는 달리 굉장히 단단하면서 맛이 좋았다.
“좋은데요?”
“그죠! 야. 진짜 옛날 생각나네. 캬. 맥주도 위스콘신산 밀러 맥주를 가져오고, 센스 굳이에요.”
“고맙습니다.”
다행히 고향 음식을 먹고 소닉 독의 기분이 많이 풀린 듯했다.
사실은 그냥 소닉 독이 했던 인터뷰를 미리 봐둔 덕으로 준비한 거지만.
‘소닉 독의 식성까지 미리 알아 둔 덕을 이렇게 볼 줄은 몰랐네.’
맥주 500CC를 한 번에 들이켠 소닉 독이 바로 다음 캔을 땄다.
“캬! 좋다. 이때 뭐가 필요한지 알아요?”
내가 고개를 저었다.
“음악!”
소닉 독이 MP3를 꺼내 세심하게 음악을 골랐다.
의외의 선곡이 흘러나왔다.
슈베르트의 가곡이었다.
내가 물었다.
“가곡 좋아하세요?”
“오늘은 독일 음식 테마니까. 잘 어울리잖아요? 게다가 다음 미션과도 잘 맞고.”
“그건 그러네요.”
다음 미션은 무려 ‘성악’ 미션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팝페라 명곡을 재해석해서 불러야 했다.
물론, 성악 전공자이자 현역 뮤지컬 디바인 강민정에게 심히 유리한 선곡이다.
알앤비라는 우리만의 장르가 확고하게 있는 비원더로서는 성악을 적용하기가 상당히 난감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빡세네요, 이거. 성악을 하라니. 솔직히 저는 지금 이 곡도 처음 들어봐요.”
“그래요? 노엘은 완전히… 성악가 수준의 호흡을 구사해서 성악도 한 줄 알았는데.”
하하 웃었다.
“성악을 한 게 아니라, 성악식 창법을 배운 거죠. 전혀 다릅니다.”
“그럼 뭐, 상당히 힘들 수도 있겠네요.”
“노래보다는 리듬이 걱정이죠. 클래시컬 음악과 비원더 음악은 리듬을 타는 방식이 아예 다른데. 이걸 어떻게 조화할지 모르겠네요. 우리 밴드도 그렇고. 저희 세 명도 딱 알앤비 음악에 최적화된 팀이라. 어쩔지….”
“뭐 어떻게든 되겠죠. 밀러 맥주만 있다면.”
소닉 독이 기분 좋게 맥주를 내게 내밀었다.
확실히 맥주는 사람 기분을 풀어주는 면이 있다.
게다가, 성악 미션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바로 스폰서 ‘숙제 방송’이었다.
성악 미션 전에, 느닷없이 ‘민티’ 콜라를 마시면서 노래하는 미션이 쑥 끼어들었다.
누가 봐도 광고주 PPL이었다.
* * *
PPL 촬영 로케이션 관계로 우리는 굳이 강원도 계곡으로 갔다.
“정말 억지군.”
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재호가 말을 보탰다.
“말도 마. 이윤강 PD가 배 실장님한테 읍소했다잖아. 막아보려 했는데 완전 이사진이 안하무인이라고.”
“이사진이라면 론, 그 사람인가? 그 키 껑충 커가지고, 굉장히 성격 사나운 사람인 거 같던데. 그 사람이 광고주 측 사람인 거 같았어.”
우리 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환희가 슬쩍 말을 얹었다
“아이고. 그 사람이에여 또? 생각만 해도 지랄인데.”
하지만, 계곡에 도착해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환희가 내게 속삭였다.
“횽.”
“왜?”
“저, 사랑을 찾은 거 같아여.”
“지랄이 짜다 인마. 너 아이돌 기획사 가수야. 정신 차려 이 친구야.”
하지만 환희가 충분히 그럴 만했다. 왜냐면 우리 앞에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