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18화 (218/280)

제218화

비원더의 코러스, 조민하가 무대 뒤에서 노래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조민하는 거울을 본 채로 차분하게 발성 연습을 했다.

매번 무대 전 하는 루틴이었다.

하지만 왠지 이번에는 평소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자꾸 딴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날의 기억인가….’

조민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권노을이 걸어 들어왔다.

“준비되셨어요?”

언제나처럼, 속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민하는 왠지 심술이 나서 툭 말을 쏘아붙였다.

“모르겠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누구 덕분에 말도 안 되게 큰일을 맡아 버렸잖아요. 저는 코러스인데. 코러스에게 곡의 중심부를 떡 하니 맡겨 버리다니, 제정신이에요?”

권노을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코러스가 가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냥 다른 직업인 거 아닐까요? 조민하 선배님처럼 훌륭한 코러스가, 형편없는 가수보다 나아요.”

“아….”

권노을의 말을 듣는 순간, 속이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권노을의 눈이 동그래졌다.

“선배? 무슨 일 있으세요?”

조민하는 슬쩍 얼굴을 가렸다.

누구에게도 지금 자기 얼굴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대신 그녀는 슬쩍 말을 다른 주제로 돌렸다.

“내가 왜 코러스 그만뒀는지 알아요?”

“코러스라는 일에 회의를 느끼셨다고 하셨죠? 아무도 코러스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래요. 그 결정적인 계기가 김종윤이었어요.”

“뭐라구요?”

권노을이 깜짝 놀라 언성을 높였다.

“별 이야기 아니에요. 김종윤은 매번 코러스를 무시했죠. 폭언을 일삼은 게 아니라 그냥 2류 취급을 한 거예요. 뭐 그건 괜찮았어요. 그 사람만 그런 건 아니니까.”

“그래도 별로네요.”

“진짜 화난 건 연습이었어요. 그 사람, 지금처럼 연습 때마다 음을 틀리는 거예요. 목소리가 좋고, 성량이 좋고,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음을 틀리는데. 기본도 안 된 노래였어요.”

“지금도 좀 그렇기는 하죠.”

“그러면서, 연습하려는 시늉도 안 하잖아요? 너무 화가 나서, 진짜 마이크를 던져버리고 싶었어요.”

그녀에게 저 스포트라이트는, 꿈과 같은 존재였다.

한 번쯤은 가보고 싶지만, 닿을 수 없었던 그런 유토피아였다.

그런데 그것을, 김종윤은 너무도 하찮게 보고 있었다.

자기를 과시하려 무리한 고음을 내다, 기초적인 음정조차 틀리는 노래를 불러댔다.

당연히 조민하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권노을이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선배. 이번이 기회예요.”

“무슨 기회요?”

“김종윤에게 한 방 먹여주는 거예요. 형편없는 메인 보컬보다는, 훌륭한 코러스가 낫다는 걸 보여주자고요.”

“그 말 자꾸 반복할 거예요?”

말은 날카로웠지만, 어느새 조민하의 입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느새 무대에 올라갈 시간이 되었다.

“자! 가시죠.”

“안 그래도 갈 거예요.”

조민하가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챙겼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 혹시 몰라 핸드폰을 꺼두려 했는데,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메리의 문자였다.

-라이브 지금 보고 있어. 화이팅 민~.

큭큭 웃음이 나왔다.

“언제 ‘파이팅’ 같은 콩글리시까지 배웠데?”

메리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 * *

얼마 후, 조민하는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 위에 섰다.

이번에는 특별히, 조민하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게 자리를 조정했다.

조민하에게 간주 애드립 솔로 부분이 있다고 하자 무대 감독과 이윤강 PD가 무대 세팅을 바꿔 주었다.

조민하에게는 엄청나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연출이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처음이야. 여지까지는 카메라에 슬쩍 스치기만 했는데.’

진짜 실력을 보여줄 좋은 기회였다.

비원더의 무대가 시작됐다.

오늘의 첫 번째 무대였다.

보통 마지막 무대가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다.

되려, 첫 무대가 중간 무대보다는 나을 수 있었다.

특히, 다음 순서로 무대에 서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무대를 보여준다면 더더욱 효과가 컸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키는 조민하가 쥐고 있었다.

소닉 독의 신시사이저 베이스 연주로 경쾌하게 음악이 시작됐다.

밴드 마스터의 신디사이저 소리가 겹쳐지면서 풍성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제나처럼 꼼꼼하게 곡 전체를 지휘하는 박찬용의 드럼이 추가되었다.

얼핏 계속 같은 연주가 반복되는 루프지만, 절묘하게 다양한 소리가 어긋나고, 변주되어 지루하지 않았다.

노래는 영화 ‘현기증’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여주인공 주디의 입장에서 쓰여 있었다.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사랑하는 연인에게, 제발 이제는 내 ‘진짜 모습’을 사랑해달라는 가사였다.

1절의 화자는 꾸며낸 자기 모습으로 연인과 사랑을 빠지는 모습을 담았다.

[닿지 못해. 너의 본모습을.

내가 나를 보여주지 못하니까.

알잖아.

지금 내 모습이 전부가 아니란 걸.

나는 완벽하지 않단 걸.]

원재호는 나직하게 중저음만으로 복잡한 감정을 표현했다.

거짓된 자신을 사랑하는 연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좋아해서 기쁘면서도, 내 본모습을 알면 연인이 나를 차버릴까 두려워하는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2절에서는 화자가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주환희는 이 부분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잊지 못해. 그날을. 그때를.

내가 처음 나를 보여주던 순간.

알았잖아.

너는 그냥 떠나 버릴 거란 걸.

이 모습으론 안 된단 걸.]

그렇게 2절까지 찬찬히 쌓였던 노래가 드디어 브릿지를 넘어 절정의 30초가 넘는 간주로 넘어갔다.

조민하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쳤다.

‘눈부셔….’

무대 리허설에서 한번 받아봤지만, 실제 무대에서는 처음 받아보는 롱 핀 조명이었다.

카메라도 모두 조민하를 주시했다.

그때까지 조민하의 머릿속은 온갖 종류의 음악적 계산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 그 모든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오로지 조민하 본인의 멜로디도 떠오를 뿐이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현란한 멜로디 라인의 스캣(* 재즈에서 흔히 사용하는 보컬 애드립.)이 이어졌다.

관중들의 경탄 소리가 끓어오르듯 서서히 커지더니 결국 비명으로 바뀌었다.

“우와!!!! 뭐야 이거.”

“영원히 듣고 싶어! 왜 멈추는 거야!”

“언니 날 가져요.”

온몸을 아드레날린으로 샤워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조민하는 감동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사 하나 없는, 그저 애드립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 곡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처음에 애인의 잘 모르던 어두운 면을 보고 당황하던 여성은, 서서히 남자의 진짜 모습을 느끼게 된다.

여지까지는 애인과 함께하는 행동이 좋았다면, 이제는 애인 그 자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뒤틀리는 듯한 불협화음으로 시작했던 노래가 점점 환희에 가득 찬 송가로 바뀌었다.

멜로디도 단조였던 것이 절묘하게 장조로 변주되었다.

마지막 단 1번의 후렴은 권노을의 몫이었다.

[놓지 못해. 지금 잡은 손을.

너의 마음속 깊은 곳이 보여.

알잖아.

지금의 우리는 하나란 걸.

흠이 있기에 완성됐단 걸]

역시나 권노을은 권노을이었다.

듣기만 해도 심장이 턱 막히는 압도적인 고음의 후렴을 깔끔하게 소화했다.

여태껏 다른 멤버들이 불렀던 후렴과 같은 멜로디였지만, 차원이 다른 존재감을 노래에 더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이례적으로 10초를 넘어, 1분이 다 되도록 박수가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조민하는 느꼈다.

여지까지와는 달리 본인도 주목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뜨거운 환호가 그녀에게 쏟아졌다.

“브라보! 브라보!”

“언니 너무 멋있어요.”

“어떻게 노래를 저렇게 현란하게 하지?”

조민하는 두 손을 번쩍 들어 관객에게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관객에게 감사했고, 이런 기회를 준 권노을에게 감사했다.

조민하에게 있어 평생 가장 아름다운 밤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박수가 그칠 줄 모르자 심사위원장 바네사가 손짓으로 관객을 진정시켰다.

이윽고, 미스터 로메로가 벌떡 일어나 심사평을 시작했다.

“뷰우우티풀~. 저 코러스 대체 누구야? 어떻게 저런 존재감을 뿜어내지? 믿기지가 않네.”

바네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코러스는 메인 보컬보다 노래를 못하는 게 아니야. 그냥 맡은 롤이 다른 거지. 그런 말 실례라는 거 알아줬으면 해 로메로. 상처라구.”

“그냥 메인 보컬도 아니야. 완전 정통 재즈 보컬 수준이야. 저 소울풀한 멜로디 하며, 단조로 시작해서 장조로 자연스럽게 끝내는 디테일, 게다가 그러면서도 곡 전체의 균형감을 유지하는 센스까지, 대체 어디서 이런 코러스가 나온 거야? 꼬레아, 대체 어떤 나라야 이거?”

바네사가 깔깔대며 말을 덧붙였다.

“물어봐 어떤 나라냐고.”

권노을이 마이크를 잡았다.

“조민하 선배는 이 나라 최고의 코러스입니다. 또 훌륭한 프로듀서기도 하지요. 최근에 역주행한 걸그룹 곡 ‘오늘 밤에’의 멜로디를 작곡한 송라이터이기도 합니다.”

조민하가 깜짝 놀랐다.

지금, 전 세계로 송출되고 있는 음악 오디션 생방송에서 권노을이 귀중한 시간을 나 자신을 홍보해주고 있었다.

억만금을 줘도 해줄 수 없는 선물이었다.

이스트 웨이브가 손뼉을 쳤다.

“파이어 키드! 대단한 동료를 뒀구먼. 설마 애드립 멜로디도 코러스 본인이 쓴 건가? 연락처 좀 줘요. 이번 앨범에 딱 저런 코러스가 필요한데….”

바네사가 이스트 웨이브에게 핀잔을 줬다.

“영업은 나중에 해요, 이스트!”

조민하의 머릿속에 하얘졌다.

‘세계적인 프로듀서 이스트 웨이브가… 나랑 같이 음악 작업을?’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을 만큼 기쁜 날이었다.

* * *

무대가 끝나고, 비원더 3인은 세트장에 남았다.

다른 가수들의 무대 리액션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조민하는 다른 밴드 멤버들과 함께 무대 뒤로 들어갔다.

무대는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무대가 끝난 다음의 허전함도 더 했다.

평소보다 훨씬 행복했던 만큼, 무대 후유증도 훨씬 클 것 같았다.

조민하는 휘유~하고 한숨을 쉬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대비해서 평소보다 훨씬 힘줘서 했던 분장도 지워야 할 차례였다.

박찬용 드러머가 어느새 조민하 옆에 앉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왜 그리 한숨을 쉬나?”

“아, 선배님.”

“좋은 무대였는데 너무 우울해하는 거 같아서.”

“아, 아닙니다. 너무 엄청난 기회를 권노을 군이 줘서. 덕분에 행복했어요. 물론 권노을 군 노래였지만요.”

박찬용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그런 건 아닐세. 물론 이번 무대에서 최고의 마무리를 보여준 건 노을 군이야. 우울하고 음침했던 노래를 마지막에 뒤엎었으니까. 하지만 그 마지막 결말로 이끌어준 건 민하 양 자네일세. 게다가 본인이 직접 만든 멜로디고 말이야.”

조민하는 양심고백을 했다.

“사실… 소닉 독의 베이스라인을 본뜬 거예요. 노을 군의 추천이었어요. 가스펠 콰이어를 보니까, 마치 악기처럼 목소리를 활용하는 걸 보고. 이를 그대로 맞춰보기 위해서 소닉 독이 연주하는 베이스라인을 따서 불렀어요. 저는 조금 애드립을 가미했을 뿐이고. 제 것이 아니에요!”

조민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왠지 선배에게 부끄러운 비밀을 들킨 느낌이었다.

정작, 박찬용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네?”

“그런 현란한 베이스라인을 그대로 본뜰 수 있는 코러스가 민하 양 말고 있나? 게다가, 애드립이 많이 가미되지 않았나. 나도 진즉에 소닉 독의 베이스라인을 참고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 누군가에게 영감을 받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감사합니다.”

“우리 같은 연주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일이 적지. 그래서 자존심이 중요한 걸세. 자존심! 우리가 우리 노래에 만족하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그렇기는 하지만….”

밴드 마스터가 말을 거들었다.

“아암! 나도 너 같은 코러스는 처음이다. 앞으로도 코러스 필요한 일 있으면, 맨 민하만 추천할 거다. 괜찮지?”

“여, 영광입니다!”

조민하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갑자기 겹경사가 일어나다니,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권노을 말대로 되고 있어…? 내 커리어가 쭉쭉 펴지고 있어!’

그때였다.

갑자기 무대 위에서 ‘끼야아!’ 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조민하는 저도 모르게 대기실 안에 설치된 모니터링용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깜짝 놀랄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