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17화 (217/280)

제217화

다행히도 하우스 밴드의 회식은 12시가 지나기 전에 끝났다.

재호 같은 아침형 인간이 멤버였으니 일찍 모임이 파할 수밖에 없었다.

멤버들과 인사하고 숙소로 돌아가려 하는데,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누구세요?”

고개를 돌려보니 조민하 선배였다.

“어쩌자고 그런 아이디어를 냈어요? 코러스라니. 완전히 내가 덤터기 썼잖아요?”

내가 손짓으로 우선 재호와 환희, 배영웅 매니저를 보냈다.

어차피 숙소 바로 앞이니까.

“덤터기라뇨. 선배님 덕에 제안할 수 있던 건데요. 재호는 곡 쓰느라 정신이 없고. 저는 메인 멜로디를 불러야 해서 코러스까지는 할 수 없는데. 선배님뿐이 없어요.”

조민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하루 만에 코러스 파트를 쓰냐고요. 내일, 아니 벌써 오늘 오후 연습 전까지는 써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없어요.”

“그래 봐야 딱 하나의 루프가 반복되는 구간만 20~30초 정도 채우면 되잖아요?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거 같은데.”

“이 곡, 악보 제대로 본 적 없죠?”

* * *

조민하가 씩씩거리며 나를 데리고 연습실로 갔다.

조민하와 함께 곡 전체를 확인했다.

자세하게 음악을 들어보니 조민하 선배의 말도 이해가 됐다.

“제 생각보다 재호가 더 꽉 차게 곡을 썼네요. 하나하나가 너무 치밀해서 건드릴 구석이 하나도 없는 느낌이에요.”

“그렇다니까요! 수학 공식처럼 꽉 짜여진 곡인데, 무엇 하나 섣부르게 얹었다가는 곡 전체가 망가져요. 웬만하면 편곡을 건드려선 안 되는 곡이죠. 근데 거기에서, 그것도 클라이맥스로 가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의, 이 중요한 부분 코러스를 갑자기 저한테 쓰라고 하면 이게 되냐구요. 제가 쓴 곡도 아닌데.”

분명 난제였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반드시 정답이 있기 마련이다.

“일단 한 번 더 들어보시죠. 노래 속에 답이 있지 않을까요?”

“백 번을 들어봐도 마찬가지일걸요.”

계속해서 노래를 듣고, 듣고, 또 들어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조민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봐요! 내 말이 맞죠? 뭘 넣어도 애매하다니까요. 차라리 비워져 있는 게 제일 깔끔해요.”

“여기가 비어있으면 뭔가 너무 허전하니 무언가 추가해보자고 박찬용 선배가 제안하셔서 여기까지 이야기가 되어 왔던 거니까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벌써 새벽 3시예요. 슬슬 자야 내일 오후 연습에 안 늦는데.”

“그러게요. 후… 일단 잠깐만 좀 쉴까요? 어차피 이야기해 봤자 진전도 없고.”

“정신 승리예요? 뭐 좋아요. 어차피 더 이야기할 것도 없으니까.”

조민하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쭈우욱 팔다리를 뻗으며 스트레칭했다.

나는 슬쩍 야식으로 어제 환희가 사 온 치즈케이크를 내놓았다.

조민하 선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치즈케이크네? 어디서 났어요?”

“여기 바로 옆이 코스트코여서요. 미국 맛이랑 얼추 비슷해요.”

“대박!!”

조민하 선배는 연신 감탄하며 포크로 치즈케이크를 파먹었다.

너무 잘 먹어서 나까지 배고파질 정도였다.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둘이서 케이크를 절반 가까이 먹어 버렸다.

“아이고. 이제 그만 드시죠. 너무 배부르네요.”

“에이~. 남자가 왜 그래요? 미국에 있을 때는 메리랑 단둘이서 케이크 한 판도 거뜬했는데!”

“아이고. 그거 건강에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맛있는 건 0칼로리, 몰라요? 평소에는 그렇게 먹지는 않고요. 메리가 한창 마감으로 힘들 때나, 남자한테 바람맞았을, 그럴 때 먹었어요.”

“마감이라… 지금 같은 상황이네요.”

다음 연습까지 12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견디고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

메리도 아마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터였다.

조민하 선배가 고민을 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영화가 특히 힘들어요. 워낙 여러 사람이 만드니까. 의견도 많고 수정도 많이 당하죠. 촬영 중에는 감독이 바꿔, 영화 끝나면 편집권 가진 제작자가 바꿔, 본인 생각하고 전혀 다른 영화가 나와 버린다니까요. ‘러브 액츄얼리’처럼 각본가가 감독까지 맡아 버리든지 해야지.”

조민하 선배의 말을 듣다 보니 갑자기 머릿속에서 영화 ‘러브 액츄얼리’가 펼쳐졌다.

문득, 그중 한 장면을 상기하다 보니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바로 컴퓨터에 들어가 런던의 한 흑인 합창단을 검색했다.

조민하 선배가 내 등 뒤에서 화면을 살펴봤다.

“누구예요?”

“러브 액츄얼리 하니까 떠올랐어요. 이 합창단, ‘All You Need Is Love’ 흑인 가스펠 버전으로 부르는 그 명장면 있잖아요. 이 합창단이 그거 부른 합창단이에요.”

“저 그 장면 너무 좋아해요!”

검색해보니 이 팀은 보통 찬송가나, 전형적인 콰이어 레퍼토리를 부르는 ‘합창단’이었다.

심지어 프로만으로 구성된 곳도 아닌, 지역의 아마추어 합창단이었다.

노래를 몇 곡 더 들어보기 시작했다.

3번째 곡을 다 들었을 때쯤 조민하가 내게 물었다.

“좋긴 하네요. 그런데 이걸 왜 듣고 있는 거예요?”

“저희가 지금 고민하는 부분에 이런 느낌을 넣어보면 어떨까요? 굉장히, 아마추어 같지만 에너지가 넘치잖아요? 과감하고! 이런 걸 넣어보면 새로운 느낌이 들 거 같습니다.”

“여지까지의 꽉 짜인 프로다운 연주와는 너무 다르잖아요. 이렇게 하면 전체 곡의 느낌하고 너무 부딪쳐요.”

“어떻게 되는지 지금 한번 확인해 볼까요?”

나는 그대로 녹음실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수신호로 조민하 선배에게 곡을 틀어달라 말했다.

문제의 간주 구간, 나는 러브 액츄얼리에 나왔던 가스펠 콰이어의 느낌과 화성 진행, 그리고 애드립을 그대로 살려 코러스를 녹음했다.

“한 번 더요.”

그렇게 세 번, 가녹음 후에 내 목소리를 다시 들어 봤다.

[Return~ Return~

Return To You~]

코러스를 확인한 조민하가 피식 웃었다.

내가 슬쩍 그녀에게 질문했다.

“어떠세요?”

“어떻겐 뭐가 어때요! 끝내 주는데요. 이렇게 하면 될 거 같아요.”

“와!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이걸로 좀 더 치밀한 화성으로 선배님이 녹음해 주시면….”

조민하가 내 말을 끊었다.

“잠깐만요. 아직 나 말 안 끝났어요. 대체 어떻게 이런 걸 할 생각을 한 거죠? 이번엔 알아야겠어요. 난 노을 씨 당신의 코러스 비결을 배우고 싶어서 여기 온 거라고요.”

원생에서 나는 오창선 선배의 코러스였다.

그리고 그 코러스 팀의 리더는 조민하 선배였다.

‘사실 내가 코러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모든 건 조민하 선배한테 배운 건대.’

그래도 대답은 해야 할 분위기였다.

그녀에게 배웠던 배움을,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는 요상한 상황이었다.

“…저는 꼭 전체 음악하고 간주가 딱 부러지게 맞을 필요는 없는 거 같습니다. 조민하 선배님은 제 생각에 곡을 쓰시는 프로듀서셔서 그런지, 곡 전체의 분위기를 항상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기는 한데요. 가끔은 곡 전체에서 약간 튀는 부분도 있어야 한다 생각해요. 약간 전체적인 그림하고 다른 부분이 있으면 더 좋죠. 이것도, 지금까지 재호가 했던 치밀한 구성이 아니라, 일부러 거친 아마추어 느낌의 콰이어를 더하니 더 좋지 않나요?”

조민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부러 거칠게 불러라?”

“약간 못 부르는 듯 부른 부분이 있어야 잘 부르는 부분이 돋보이는 법이죠.”

“난…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제 데모 들으니까 어떤 느낌을 제가 말하는지는 아시겠죠?”

조민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내 코러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을 차마 하지는 못했다.

“선배님 그럼 이 느낌대로 한번 만들어봐 주실래요? 코러스를 불러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선배님이니까. 부탁드려요.”

“해볼게요.”

조민하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녹음 부스로 들어갔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구야!”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눈을 떠보니 이미 해가 뜬 아침이었다.

조민하 선배는 컴퓨터 책상 앞에 쓰러져 자고 있었다.

“아이고. 쯧쯧.”

우선 급한 대로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대체 뭘 하셨길래 책상에서 주무시고 계셨던 거지?’

컴퓨터를 확인했다.

조민하가 완성한 코러스가 붙어 있었다.

헤드셋을 끼고는, 조심스레 녹음한 코러스를 확인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됐다!”

* * *

드디어, 첫 번째 본선 날이 밝았다.

비장한 마음으로 공연장에 출근했다.

하우스 밴드 멤버들도 모두 굳은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3주간의 대결을 통해, 합산한 점수를 따라 4팀 중 1팀이 글로벌 비전 본선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글로벌 비전에 들어가면 설사 우승하지 않더라도 세계인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번에 얻을 수 있었다.

심지어 밴드 멤버들조차 말이다.

당연히 모두 욕심이 날 터였다.

‘다른 가수들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항상 여유 있던 타입이던 바질리스크 요한도, 많이 그동안 친해졌던 강민정도, 심지어 항상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던 김지태까지도 모두 초긴장 상태였다.

다들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침묵을 깬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여어~ 다들 잘 계셨나. 내가 다시 돌아왔지이~.”

아유 얄미운 놈.

김종윤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나마 말할 기운이 있던 내가 나서서 그를 맞이했다.

“오늘 게스트로 오셨다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게스트 대기실에서 있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사람들 안 만나 보는 건 예의가 아닐 거 같아서 말이야. 아니면 비원더 너네는 나보다 후배니까 먼저 나를 모시러 안 온 니들이 예의가 없는 건가?”

김종윤 특유의 빈정대는 말투로 우리에게 툭 쏘아붙였다.

정작 김지태 같은 소속사 선배이자 진짜 베테랑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점이 개그였다.

김종윤이 김지태에게 굽신거렸다.

“선배. 화이팅입니다.”

“어, 왜 왔어?”

“저, 오늘 게스트라고 조금 전 말씀 드렸는데요.”

“아 그래? 그래 그럼.”

“…끝인가요?”

“더 말이 필요한가?”

김지태의 싱거운 태도에 김종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방을 나가 버렸다.

‘쌤통이다 이놈아.’

김지태와 김종윤이 방을 나가자 바질리스크 요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내 어깨에 손을 얹고는 감사 표시를 했다.

“고마워. 니가 지뢰 처리반 해줬네.”

“별말씀을요. 저야 뭐 저분하고 별로 엮인 게 없어서.”

“그래도 말이야. 저번에 우리가 발라줬는데 또 뻔뻔하게 다시 기어들어 오는 거 보면, 우리가 적당히 밟은 모양이야. 야,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박살 내 주자! 게스트 섭외 들어와도 고사할 정도로.”

바질리스크의 다른 멤버들이 ‘여어!’ 하고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뭔가, 평소의 바질리스크하고는 달랐다.

본래 바질리스크는 큰 성공보다는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안정적으로 오래 음악 하는 것을 추구하던 밴드였다.

반드시 이 대회에서 우승해 월드 스타가 되기를 꿈꾸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종윤하고만 엮이면, 바질리스크의 투지가 크게 상승했다.

지난번 패자부활전에서도 바질리스크는 갑자기 엄청난 열정을 불태운 무대로 김종윤을 큰 점수 차로 따돌리고 승리해 최종 결선에 진출했다.

‘왠지 이거. 바질리스크 무대도 장난 아닐 거 같군.’

하지만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조민하 선배가 보였다.

‘내게는 미국까지 공수해서 데려온 필살기, 조민하 선배의 코러스가 있으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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