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우리도 밴드거든요.”
“뭐라고?”
요한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드럼하고 기타 베이스가 있어야만 밴드는 아니잖아요? 우리도 함께 곡을 쓰고, 연주하고, 편곡에 참여하는 팀입니다. 그게 밴드 아닐까요?”
“뭐 맞는 말이긴 하지만. 너희는 밴드 이름으로만 곡을 만들지는 않잖아? 다른 작곡가 곡도 많이 받고.”
“요즘은 록밴드들도 맥스 마틴 같은 유명 작곡가들 곡 받고 그러던데요.”
“그건 말꼬리 잡기 아닌가?”
사실 말꼬리 잡기 맞았다.
하지만 내가 전하고 싶은 요점은 따로 있었다.
“우리나 바질리스크나, 창작에 대한 열정은 같다는 겁니다. 특히 저는 몰라도 재호와 환희는 날밤을 새우면서 멜로디를 만들고, 편곡하고, 가사를 쓰고 있어요. 저희도 절대 호락호락하게 지지 않을 겁니다.”
“기대하고 있을게.”
요한이 떠나고 재호가 내 어깨를 쳤다.
“야 권노을.”
“왜?”
“뜨거운 맛을 보여주자. 이번에 꼭!”
“야 됐어. 힘 빼. 힘 빼. 명작 만들려고 힘 잔뜩 주다 될 일도 안 된다.”
* * *
숙소에 들어가 보니 하늘이가 히치콕 영화를 독파하는 중이었다.
내가 하늘이에게 물었다.
“뭐 봤냐?”
“유명한 건 다 봤어요. <이창>, <로프>, <싸이코>….”
“그중에서 곡에 쓸만한 거 있어?”
“이미 우리가 썼던 <오명> 말고는 죄다 살인극, 스릴러라 발라드는 못 할 거 같은데요. 아 근데 이건 괜찮을 거 같아요. <현기증>.”
“저건 내가 제일 처음 추천했는데. 이미 U2가 노래로 만든 적 있으니 다른 걸로 해보자고 하지 않았어?”
“다르게 풀면 되죠. 이 영화가 딱이에요.”
<현기증>은 허다한 히치콕의 명작 중에서도 가장 평가가 좋은 영화였다.
주인공 퍼거슨은 ‘매들린’이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매들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살하고 만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매들린과 똑 닮은 ‘주디’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퍼거슨은 주디를 매들린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주디에게 매들린의 머리, 매들린의 옷, 매들린의 행동 등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현기증’이었다.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이야기였지만, 하늘이는 그중에서도 ‘환상의 연인과 실제 연인의 대결’이라는 부분에 집중했다.
“저는 이 영화가 요즘 현실에도 잘 맞는다고 보는데요.”
“왜?”
“요즘 다들 환상 속의 연인을 바라고 살잖아요.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은 나한테 맞춰주지 않으니까 싫어하고. 어쩌면 저희 같은 연예인은 그런 ‘환상의 연인’을 대체하는 존재일지도 모르죠.”
“신랄한데?”
‘환상의 연인’이라면 하늘이와 잘 어울리는 주제였다.
하늘이는 ‘주환희’라는, 가상의 가수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캐릭터로 지금껏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 팬들은 환희라는 유쾌하고, 쿨한 교포 오빠를 좋아했다.
일본에서는 야한 이야기 잘하는 쿨한 오타쿠 캐릭터로 심야 예능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주하늘은 시골 출신에, 조용하고 섬세한 작가 타입의 인물이었다.
하늘이는 가면무도회처럼, 항상 가면을 쓰고 활동하고 있었다.
재호가 그 부분을 슬쩍 짚어줬다.
“환희 너야말로 진짜 딱 그 환상의 여인 아니냐?”
“…이번 대회를 계기로 좀 바꿔보고 싶어요. 솔직한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나와 재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환희의 연기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늘이는 동고동락했던 우리 둘에게는 이미 자신이 ‘주하늘’이란 사실을 공개했다.
거기다가 천채왕 프로듀서를 필두로 TYB의 스태프도 대충 환희의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주하늘 본인이 ‘주환희’로 활동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 그대로 다들 둔 것이 아까웠다.
그런데 지금, 하늘이가 본 모습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내가 슬쩍 하늘이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좋은 거 같은데?”
“진짜요? 그럴까요! 팬들은 쿨한 환희를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외국 여자만 보면 돌아버리는 바람둥이 주환희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늘이가 손을 내저었다.
“저 이제 데이트 끊었어요. 형!”
내가 하늘이를 놀리는 사이, 재호는 영화 화면을 일시 중지하고, 영화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재호가 질문했다.
“주디는 왜 돌아온 걸까? 굳이 주인공에게 안 가도 되잖아?”
하늘이가 대답했다.
“퍼거슨을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너무 위험하잖아.”
사실, 영화 속 매들린의 정체는 주디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 퍼거슨은 매들린을 만난 적이 없었다.
대신, ‘매들린인 척 연기한 주디’를 매들린이라 착각하고 만난 것이었다.
그리고 주디는, 매들린이 죽은 후 굳이 다시 퍼거슨에게 나타났다.
“퍼거슨이, 매들린이 아닌 ‘진짜 자신’을 사랑했으면 해서 다시 나타난 건 아니었을까?”
하늘이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매들린이 아니라 본인의 진짜 모습으로 퍼거슨에게 다가왔다는 건가요?”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자신을 사랑해줄 가능성이 아예 없어져 버리니까.”
하늘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본 모습을 보여줘야만, 본 모습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다… 좋은데요? 이걸로 가사 써 볼게요.”
하늘이가 빈 종이에 큼지막하게 영어 문장을 적었다.
‘Return To You’라는 쉬운 문장이었다.
하늘이가 한층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
재호가 내게 물었다.
“쟤 괜찮겠지?”
“하늘이가 원래 저런 키워드 하나 뽑는 데 오래 걸리지. 일단 키워드 나오면 금방이잖아? 괜찮을 거 같아.”
“그래… 하긴, 문제는 하늘이가 아니다. 나지.”
재호가 갑자기 소파에 쓰러지듯 앉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왜?”
“쟤는 가사 아이디어가 나왔잖아. 근데 나는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하.”
기껏 가사와 멜로디가 나왔는데 편곡이 안 되어 있으면 아예 작업을 시작할 수 없었다.
“현기증 봤는데. 영화는 좋아. 좋은데, 이 영화의 분위기랑 딱 맞는 비트는 내가 미리 만들어 놓은 곡 중에는 없어.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영감이 안 떠오른다구. 어쩌냐?”
“뭐 꼭 영감이 있어야 하냐? 그냥 가사에 잘 맞게 붙이면 되는 거 아냐?”
재호가 단호하게 팔 둘을 교차해 ‘엑스’자를 만들었다.
“안 된다구. 우리가 글로벌 비전에서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이건 글로벌 청중에게 우리를 소개하는 곡이야. 게다가 이번 대회 첫 자작곡이구. 첫 라이브 방송이기까지 하잖아. 그렇게 적당히 하면 안 되지.”
‘아유 자식 까다로워.’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실 재호를 탓할 수도 없었다.
저 치밀함, 완벽주의가 재호의 편곡이 훌륭한 이유였다.
그렇다면, 재호가 그 재능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이 맞았다.
잠시 과거 기억을 더듬어봤다.
“우리 이번 곡 컨셉이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거잖아?”
“그렇지?”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면 어때?”
“‘오명’ 때 말야! ‘오명’의 컨셉은 실내악이었지. 마치 저택의 와인 파티 같은 컨셉으루. 드럼이 없이, 피아노와 현악기만으로 만드느라 고생 좀 했고.”
“그거 진짜 대단했어.”
내가 재호의 편곡에 빠진 계기가 됐던 노래였다.
“사실 내가 여태껏 했던 편곡 중에 그게 제일 맘에 들어. 하지만 같은 패턴을 두 번은 못 하지. 그렇다고 다시 클래식을 하는 것도 재미없고.”
재호가 뒤통수를 펜으로 톡톡 쳤다.
사실, 내가 생각한 처음은 ‘오명’ 때가 아니었다.
더 처음이었다.
“그때 말고. 더 예전으로.”
“중학교 때?”
“아니, 아니. 우리 셋의 처음. 애초에 우리가 왜 팀명을 ‘비원더’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기억해?”
“왜지? B1The라고 이름 지어서, 뭔가 좀 요즘 느낌 나게 말장난을 했던 거 같기도 한대.”
“그거 말고! 스티비 원더 말야 스티비 원더.”
재호가 무릎을 쳤다.
“아하!”
“스티비 원더를 우리 셋 다 좋아해서 팀명을 그렇게 지었잖아. 역시 우리의 본류인 스티비 원더로 가면 되지 않을까? 어때!”
재호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고민을 시작했다.
“음… 괜찮을지 몰라. 어디 보자… 발라드보다는, 재즈일까? 아니면 펑크일까. 그래. 그래… 그렇게 하면… 그렇지! 됐어!”
재호가 갑자기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뭐가 됐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구.”
“뭔데?”
“아 이거 말로 설명하기 너무 어렵구! 만들어서 보여줄게.”
재호가 내게 대답하면서 갑자기 나갈 채비를 했다.
“어디 가냐?”
“낙원상가! 악기 살 게 있어서.”
“뭔 악기?”
“신디사이저. 최대한 올드한 걸루.”
‘아하!’
나도 재호의 생각을 금세 눈치챘다.
내가 재호의 손을 잡았다.
“왜?”
“…니가 사려는 거, 이미 녹음실에 있을 거야. 이게 필요한 거 맞지?”
재호에게 슬쩍 ‘하몬드 오르간’이라는 악기 이름을 속삭였다.
“그걸 어떻게…!”
“척하면 척이지. 스티비 원더가 쓰는 거고, 구식 신시사이저 면 그거밖에 더 있냐? 우리가 매일 녹음하던 방 옆방에 있어. 구석에 있어서 네가 못 봤을 거야. 가자.”
녹음이 착착 진행되기 시작했다.
* * *
우리가 자작곡을 준비하는 사이, 글로벌 비전 방송이 조금씩 시청자들에게 공개됐다.
우선 1차 예선 합격 과정이 공개됐고, 다음에는 순차적으로 2차 예선이 공개됐다.
문제는 3차 예선이었다.
방송된 후, 우리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마이크 선을 뺀 내가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노래를 부른 김종윤이 탈락해서라는 세간의 평이었다.
-권노을 쟤 누가 봐도 일부러 마이크선 뺀 거 아님? 왜 쟤는 탈락 안 시킴?
ㄴ 페널티는 줬다는데.
ㄴㄴ솔직히 넘하지 않냐.
-김종윤 노래 개잘했는데. 더 듣고 싶다. 외국인에게도 김종윤 노래를 들을 권리를 보장해 줘.
ㄴ ㅇㄱㄹㅇ ㅂㅂㅂㄱ.
ㄴ김종윤 같은 노래가 진짜 한국 소울이지. 비원더는 너무 애같고, 빠다 냄새나서 못 듣겠음. 대형기획사라 그런가? 공산품 같아.
왜 이렇게 민심이 안 좋아졌냐고?
물론 편집 때문이었다.
방송 편집본은 교묘하게 김종윤을 편애했다.
김종윤과 우리가 함께 불렀던 노래는 완전히 편집됐다.
덕분에 김종윤의 형편없는 노래가 모두 삭제됐다.
게다가, 마이크 선이 뽑힌 이후에도 김종윤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다는 상황 자체가 사라졌다.
‘김종윤이 립싱크 반칙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없어져 버린 셈이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김종윤이 억울하게 당한 것처럼 보일만 했다.
천채왕의 회의실.
비원더 3인과 배영웅, 그리고 천채왕이 방송 대책 회의를 했다.
하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무 악마의 편집 아니에요? 해외 방송국이 저딴 짓을 하다니.”
천채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패자부활전은 더 가관이었지.”
“맞아요! 설마 김종윤의 무대를 아예 없앨 줄이야.”
패자부활전에서 김종윤이 부른 엉터리 노래는 통편집 당했다.
대신 바질리스크의 무대만 보여줬다.
내가 하늘이의 말을 이어받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김종윤은 완벽하게 노래했는데 억울하게 탈락한 것처럼 보이겠어요.”
천채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에도 그렇게 보였어. 비원더 제작자인 내가 봐도 그 정도라면 누구에게나 그렇게 보였던 거지.”
재호가 나직하게 질문했다.
“방법이 없나요?”
“왜 없겠어. 기획사 차원에서 항의했어. 일단 한국인 스태프 중 가장 선임인 이윤강 PD에게.”
“뭐라 하시던가요?”
“직접 방문해서 설명하겠다는데? 배영웅 실장님,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재호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네?”
배영웅 매니저가 일어나 문을 열자, 굳은 표정의 이윤강 PD가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이윤강 PD는 석고대죄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천채왕이 최대한 편안한 표정으로,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윤강 PD가 그런 사람 아닌 건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왜 이렇게 편집이 된 건가요? 마치 예정 엔터…? 아니, 김종윤 씨를 편애하는 거 같은 편집인데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스폰서 ‘민티’가 워낙 적극적으로 편집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최종 편집권은 그쪽에 있어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그렇군요….”
천채왕이 깊은 침묵에 빠졌다.
나와 멤버들의 무거운 표정을 본 이윤강 PD가 말을 계속했다.
“어,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본선은 앞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니까 그런 편집 장난질은 어려워집니다. 득표수 조작만은 제가 책임지고 막아 보겠습니다.”
천채왕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봐야, 이미 비원더는 김종윤 씨를 비열하게 이긴 가수가 돼버렸는데요. 그 사실이 바뀌진 않죠.”
이윤강 PD는 물론, 방 안의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손을 들어 이윤강 PD에게 제안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이 상황을 해결하고, 김종윤을 제대로 엿 먹일 수 있는 묘수가 딱 하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