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14화 (214/280)

제214화

“김지태 씨는 20대 초반까지 성공한 적이 없어요. 트로트 앨범까지 내봤는데. 모두 허사였다 하네요.”

원생에서 내 처지와 비슷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코러스로는 생활이 어려우니까. 나중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해결하셨데요.”

내 인생과 정말 비슷했다.

“그런데 어떻게 대가수가 되셨나요?”

“김지태 씨 노래 중 제일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눈 오는 날에는 붉은 장미를’.”

“잘 알죠.”

오디션에서 나를 선발했던 선배 여가수 ‘베이비’의 대표곡이었다.

부드러운 시티팝 감성에, 세련된 보컬이 더해져서 나도 좋아하는 곡이었다.

그 곡에서 베이비와 듀엣으로 노래한 남자 가수가 바로 김지태였다.

“베이비 아티스트님이 김지태 씨를 코러스로 쓴 적이 있데요. 그때 우연히 들은 김지태 씨의 노래를 인상적으로 들어서 기억해둔 거죠. 그러다 김지태 씨의 목소리와 어울릴 것 같은 곡을 발견하자 그에게 듀엣을 부탁했다고 하네요.”

“그렇게도 풀릴 수가 있군요.”

그가 가수로 성공한 비결이 우연이었다니 약간 허탈했다.

‘하지만 뭐. 나는 어쩌면 더한 행운을 얻은 거지. 회귀한 덕에 이렇게 가수를 하고 있으니까. 상황이 매번 고생스럽게 돌아가고 있긴 하지만.’

배영웅 매니저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김지태 씨는, 가수치고 인생 경험이 많아요. 그게 그분의 진짜 무기죠. 뛰어난 테크닉이 그걸 받치고는 있지만요.”

“그렇겠네요.”

“그러고 보면 노을 아티스트랑 스타일이 좀 비슷한 거 같네요? 진성 가성 다 뛰어나고, 알앤비 베이스지만 장르 안 가리고, 코러스도 직접 해내고, 성량 좋고. 다만 아무래도 인생 경험은 김지태 씨가 더 많을 테니. 그런 부분이 부담이겠네요.”

“그렇죠. 하하.”

사실, 김지태나 나나 경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나는 15년을 더 살다 회귀한 회귀자였으니까.

되려, 미래를 경험한 내가 경험 면에서 더 유리한 구석이 있을지 몰랐다.

그럼에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나와 비슷한 스타일의 가수와 노래 대결할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하게 했다.

‘나 자신과 싸우는 느낌이 들 것 같아. 재미있는데?’

* * *

다음 날 이윤강 PD 및 글로벌 비전 한국 제작진이 우리 숙소에 방문했다.

제작진이 우리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느닷없이 민티 한 박스를 꺼내서 줬다.

재호가 싱긋 웃으며 뼈가 있는 말을 했다.

“스폰이니까 알아서 좀 마시면서 녹화하라는 거군요?”

이윤강 PD가 손을 모아 보였다.

“맞아요, 좀 도와줘요. 야. 해외 프로그램 이거 생각보다 너무 어렵네요. 저희도 너무 쪼이고 있어요. 저는 아무래도 그냥 한국에서 놀아야겠어요. 에미상 후보에라도 오르는 게 소원이었는데, 미국 너무 빡세!”

내가 이윤강 PD를 위로했다.

“에이 그래도 큰 경험이 되겠죠. 스폰서의 요구 사항이 한국이랑 좀 다른가 봐요?”

“다른 거 같아요. 한국에서는 딱 PPL 타임이 있었고, 그때만 잘해주면 됐어요. 근데 글로벌 비전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여기는 그냥 스폰서가 1분 1초, 24시간 내내 방송 내용 편집에 간섭하더라고요. 혹시나 민티에 해가 되는 말을 할까 봐.”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예를 들면요?”

“뭐, 민티를 꺼내뒀는데 출연자가 민티를 안 마신다던가? 그런 거죠. 편집이 쉽지 않아요.”

나는 민티 캔을 만지작거렸다.

재호는 절대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으니, 나라도 PPL에 도움이 돼야 했다.

하지만 탄산을 먹기는 또 싫었다.

가수는 결국 몸이 악기인데, 굳이 악기를 망치는 느낌이 든달까?

마침 환희가 저벅저벅 거실로 걸어 들어왔다.

샤워를 막 끝냈는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환희가 탁자 위의 민티를 발견하더니, 자연스럽게 한 캔 집어 벌컥벌컥 마셨다.

“캬아~. 죽이네여.”

이윤강 PD가 감동의 손뼉을 쳤다.

“이야! 역시 환희군! 너무 좋아요. 이거 그림 따로 편집해서 써야겠어요. 광고주가 엄청나게 좋아하겠는데요?”

“맘대로 쓰세여. 뭐예요 횽들! 횽들은 안 마셔여?”

재호가 고개를 과격하게 저었다.

“탄산 안 먹그던?”

“에이! 연예인은 광고도 업무져. 저희 맨날 결혼 축하 부탁, 방송 홍보 부탁 같은 거 엄청나게 오잖아여? 그런 거 해주는 거도 다 우리 일이라구여.”

“몸 관리도 연예인 업무에 일부라는 생각은 안 해봤냐?”

재호와 환희가 틱틱대는 사이, 나는 더욱 인상을 찌푸린 채로 민티 캔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마셔야 할 것 같은데, 마시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윤강 PD가 내게 슬쩍 속삭였다.

‘방금 환희 군 그림이 너무 잘 나와서. 억지로 안 마셔도 돼요.’

‘고맙습니다.’

이래서 이윤강 PD와 촬영하는 게 좋았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윤강 PD는 바로 카메라를 설치하고, 공식 녹화를 시작했다.

이미 우리의 1차 예선 및 심사위원 평이 전 세계 TV로 방영되고 있었다.

아직 우리 분량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윤강 PD가 우리에게 미션을 제시했다.

우리는 카메라를 의식한 채로, 이윤강 PD가 전달한 미션지를 주의 깊게 읽었다.

재호가 입맛을 다셨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는데? 나야 좋지만, 좀 아쉬워.”

환희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런 미션은 마지막에 하는 게 국룰 아니에여?”

미션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자작곡 미션: 나를 전 세계에 소개하라]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다운 미션이었다.

글로벌 비전 촬영분은, 설사 지역 예선 분이라도 전 세계 방송사에 나왔다.

이 방송을 통해 우리를 보는 전 세계의 음악 팬들 대다수는 당연히 우리를 모를 터였다.

그런 우리를 소개할 수 있는 음악을 가져오라는 미션이었다.

프로듀서 재호와, 송라이터 겸 작사가인 환희가 있어 스스로 곡을 쓸 수 있는 비원더에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미션이었다.

그래서 재호와 환희는 아쉬워하는 티를 냈다.

하지만 나는 이해가 됐다.

소개는 빨리할수록 좋다.

아는 사람의 무대가 더 흥분되기 마련이었다.

불평하는 대신 ‘우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을 시작했다.

내 주도로 곡의 컨셉에 관해 토론하기 시작했고, 이윤강 PD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재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처음 자신을 소개한다. 굉장히 임팩트가 있어야겠네.”

환희도 의견을 보탰다.

“그게 전부가 아니져. 글로벌 타깃 방송이니까, 전 세계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여.”

“음….”

재호와 환희는 그대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내가 분위기를 주도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건 어때?”

재호가 되물었다.

“처음?”

“그래. 우리가 제일 처음 곡을 같이 썼을 때가 언제지?”

“데뷔곡 땐가?”

“땡! 환희 너는 알아?”

환희가 뭔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아! 그때죠. 오디션 때. ‘슈퍼스타 T’. 거기서 만났잖아요?”

“그래. 그때 우리들. 베이비 선배 곡을 가져와서 새롭게 편곡해 불렀잖아. 기억나?”

나는 내가 데뷔했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T’에서 재호 환희와 함께 팀을 짰다.

그게 비원더의 시작이었다.

재호도 기억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우리 히치콕 영화 보면서 같이 곡을 썼잖아?”

“맞아, 베이비 선배 타이틀 곡 대부분이 히치콕 영화에 영향을 받아서 나왔으니까. 그걸 응용해서 이번에도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고.”

환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베이비 선배 곡을 리메이크 하자구여? 해외 팬들 상대로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아니! 히치콕 영화에서 영감받아서 곡을 써보자구. 이번에는 현기증(vertigo)으로 해보면 어때?”

재호가 팔짱을 낀 채로 고뇌를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나직하게 말했다.

“이게 말이야.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밴드, U2가 vertigo란 곡을 썼잖아! 너무 유명한 곡 아니냐?”

“아 그러네. 그럼 ‘싸이코’로 해볼까?”

“살인극이 알앤비 발라드가 되나? 헤비메탈 곡이라도 부를 셈이야?”

“음.”

생각보다 회의가 진척이 잘 안 됐다.

침묵을 깬 건 재호였다.

“나, 잠깐 낙원상가 좀 다녀올게. 수리 맡긴 악기가 있어서. 혹시 이번에 곡 녹음할 때 쓸지 모르니까 가져와야지.”

내가 질문했다.

“배영웅 매니저님에게 가져다 달라고 하지?”

“직접 확인해야 한다구. 컨디션을 모르니까. 실장님은 당연히 같이 가시구.”

“그래? 그럼 기분전환 할 겸 나도 같이 가자. 환희 너는 히치콕 영화나 좀 뒤져보고 있어.”

“알게써여.”

경험상, 이렇게 벽에 막혔을 때는 되려 생각을 멈추고 환경을 바꿔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재호와 함께 낙원상가로 출발했다.

* * *

낙원상가에서 재호는 독특하게 생긴 북들을 잔뜩 받았다.

“주문하신 젬베하고요. 둔둔, 아쉬코입니다.”

“감사합니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악기들이었다.

생긴 게 다들 민속 악기처럼 생겼다.

내가 재호에게 물었다.

“무슨 악기야?”

“아프리카 타악기들이야. 얘네들이 사운드가 묘해. 혹시 써먹을 수 있을까 해서 주문했지. 구하느라 엄청 힘들었그던? 배 실장님이 도와주지 못했으면 못 구했어. 수리는 더 힘들구.”

“그 정도 가치가 있냐?”

“당연하지! 이런 소리는 이 악기가 없으면 아예 낼 수도 없다구.”

“그냥 일반 드럼하고 그렇게 달라? 박찬용 선배님한테는 그냥 입으로 소리 내면 다 쳐주시던데.”

“그건 그거구! 이건 다른 거야.”

재호와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질리스크의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 요한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먼저 요한에게 인사했다.

“축하드려요, 선배! 결선 진출하셨죠?”

“너희도 마찬가지잖아?”

“네네. 이제 라이벌이네요.”

요한이 나와 시선을 잠시 교환하더니 피식 웃어 보였다.

“여긴 왜 왔어?”

“재호 악기를 사러 왔습니다.”

“나도 악기 때문에 왔지. 모처럼 글로벌 비전 결선까지 진출했고. 기분 좋아서 기타 하나 새로 장만했지. 펜더로.”

그렇게 말하면서 요한은 자신의 신형 기타를 보여주었다.

멋들어진 빨간 기타였다.

악기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멋져 보였다.

“오… 대단하시네요.”

요한이 내 표정을 보더니만, 다시 씩 웃었다.

“고맙다. 덕분에 김종윤을 이겼어.”

바질리스크가 김종윤을 이긴 건, 사실 내 도움 덕분이었다.

대회 전, 슬쩍 요한에게 전화해 바질리스크의 상황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바질리스크는 오디션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성인 강민정과 1:1 대결을 하게 되어 좌절하던 중이었다.

그들에게 내가 살짝 팁을 줬다.

[선배. 다른 나라 예선 보니까, 무조건 지금이 패자부활전 타이밍이에요. 그거만 이기면 돼요. 패자부활전쯤 되면 관객들은 노래 많이 듣느라 지쳐 있을 테니까. 확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신나는 곡을 해야 해요. 이른바 전 국민 노래방 애창곡, 예를 들면 판타스틱 폭스의 ‘오늘 밤에’ 같은.]

“네 작전이 그대로 들어맞았어. ‘오늘 밤에’. 원래도 전 국민이 좋아하던 노랜데. 최근에 역주행까지 했지. 그런 유명한 노래를 하니까, 정말 발라드 부르는 김종윤을 이길 수 있더라.”

“뭐 저희 덕이겠습니까. 선배님들 실력 덕분이죠.”

재호도 말을 거들었다.

“정말 탄탄한 연주였어요. 감탄했습니다.”

“뭐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지. 우리가 다른 건 몰라도 사운드는 어떤 밴드에게도 안 진다는 자존심 하나로 하고 있어.”

“그러실 만합니다.”

“이번 미션은 자작곡 미션이지? 이 미션만은 우리가 안 질 거야. 우리가 대중성은 떨어질 수 있어. 인기도 부족하겠지. 하지만, 자작곡 대결만은 호락호락하게 질 수는 없어. 밴드의 명예가 걸린 문제야. 스스로 연주하면서 곡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게 밴드의 자부심이니까. 발라드 가수에게 지진 않을 거야.”

요한의 얼굴에는 거만이라기보다는 꼿꼿한 자부심이 엿보였다.

‘록 꼰대였던 김종윤하고는 확실히 다르네.’

하지만 나도 할 말이 있었다.

“저희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자작곡 미션에서 가수가 쉽게 밴드를 이길 순 없죠.”

재호가 나를 제지했다.

“야 권노을. 왜 그리 저자세로 나가? 이기려고 해봐야지.”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이번에는 저희가 이길 겁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