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이번 글로벌 비전, 메인 스폰서 회사가 어디인지 알아?”
“탄산음료 회사죠? ‘민티’라고. 마셔본 적은 없습니다만.”
“안 먹어봤어? 먹어봐. 맛 괜찮아.”
천채왕이 내게 민티 캔을 하나 건넸다.
먹기 싫은 민트 색깔의 음료였다.
조심스럽게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민트향이 청량하게 입 안에 퍼졌다.
의외로 맛이 나쁘지 않았다.
천채왕이 삭 미소를 띤 채 내게 물었다.
“생각보다 괜찮지?”
“좋네요.”
“그래도 난 탄산은 질색이지만. 탄산은 건강의 주적이야 주적. 하여튼, 저 회사가 이번 글로벌 비전 메인 스폰서인데. 문제는 민티의 임원이, 예정 엔터테인먼트랑 친한 모양이야.”
“예정…!”
예정 엔터테인먼트는 김종윤이 소속된 대형기획사였다.
천채왕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소인중도 예정 엔터 출신이었지. 그쪽 사람들이 좀 일을 거칠게 해.”
“그렇군요. 그럼 김종윤을 제작진이 싸고돈 것도?”
천채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폰서 덕이 없잖아 있을 거야. 뭐 조작까진 아니고. 봐줄 수 있으면 애매한 부분은 다 봐주자는 식이었겠지.”
“그래도 다행이네요. 마지막에 워낙 큰 점수 차이로 떨어졌으니까요.”
말을 하면서 슬쩍 천채왕의 얼굴을 확인했다.
매우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천채왕이 입을 열었다.
“그게 그렇지가 않아.”
“무슨 일이 있나요?”
“대회에 예정 엔터 소속 가수가 한 명 더 남아 있어.”
대진표를 확인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다물게 되었다.
‘김지태…!’
발라드 계의 전설과도 같은 가수였다.
깔끔한 가창력으로 보컬의 정석이라 불리는 그가, 이번 글로벌 비전 본선 TOP4에 진출했다.
“김지태 선배가 예정 엔터 소속이셨군요.”
“뭐 김종윤과는 달리 회사에 휘둘리기에는 너무 경력이 화려한 가수니까 말이지. 다만 긴장 좀 하는 게 좋겠어. 어쨌든 엄청난 실력자잖아.”
“그렇죠.”
김지태의 노래 실력은 내가 봐도 훌륭했다.
약점이 없는 뛰어난 보컬이었다.
천채왕이 기지개를 쭉 켜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번 글로벌 비전 본선도 치열하겠네. 뮤지컬 디바 강민정에, 보컬의 정석인 지태, 거기다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실력파 록밴드 바질리스크, 마지막으로 비원더까지.”
“쉽지 않아 보이는데요.”
“우리가 이길 거야. 나도, 회사도 서포팅에 최선을 다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노래에만 집중해. 알았지?”
“네.”
천채왕이 업무 수첩을 꺼내 스케줄을 확인했다.
“예선 끝나고 2주 정도 시간 있으니까. 오늘 내일은 푹 쉬자. 재호랑 환희한테는 배영웅 실장을 통해 이야기해 놓을게. 고생했어.”
“감사합니다!”
* * *
미팅이 끝나고, 곧장 북한산으로 향했다.
마침 휴일이어도 하고 싶은 일도 없던 차에, 강민정이 나를 호출했다.
산 입구에 서니 강민정이 매니저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형광 주홍색 등산복 차림이었다.
내가 강민정에게 물었다.
“갑자기 웬 등산이신가요?”
“비원더도 저처럼 주간 휴가잖아요?”
“맞습니다.”
“아마 이다음에는 본선 끝날 때까지 아예 못 쉴 테니까 하고 싶은 걸 해야죠.”
“그게… 등산인가요?”
“그냥 등산이 아니에요. 암벽 등반이죠. 클라이밍으로 훈련했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강민정과 우연히 클라이밍에서 마주쳤던 적이 있었다.
강민정은 내가 등산을 좋아한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체력 단련을 위해 문루아 선배 훈련에 꼽사리를 낀 것일 뿐이었고, 이후 클라이밍은 너무 힘들어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강민정이 먼저 씩씩하게 올랐다.
나도 그녀를 따라갔다.
북한산은 제법 험준했다.
서울 뒷산이라고 만만하게 볼 게 아니었다.
하지만 힘들지만은 않았다.
산에 올라가면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됐다.
심지어, 산속을 묵묵히 걷는 일조차 좋았다.
그동안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온종일 음악만 하며 지내다 보니 이렇게 자연이 가득한 곳을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강민정이 암벽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잠깐 쉬죠. 장비도 점검하고.”
“알겠습니다.”
바위에 앉자마자 강민정이 내게 물었다.
“안 힘들어요?”
“의외로 좋네요. 강민정 선배는 등산 자주 하시나요?”
“뭐… 자주 하려 하죠.”
“역시!”
“뭐가 역시예요?”
강민정이 토끼 눈을 한 채로 내게 물었다.
“가수는 몸이 악기니까요. 몸을 잘 가꿔야죠. 역시 민정 선배는 이렇게 등산으로 몸을 단련하시는구나 싶어서요. 적당한 경사가 있는 산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단련이 되는 거 같아요. 신선한 공기는 덤이고요. 사람 많은 도시에서 이런 곳으로만 가도 충전이 되네요. 덕분에 좋은 경험 했습니다. 감사해요.”
“감사하다고요…?”
강민정이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만 ‘하하’ 웃어 버렸다.
“노을 씨는 못 당하겠어요.”
“못 당해요?”
“사실 그냥 괴롭히려고 부른 거예요. 오늘, 한번 죽어봐라 하고.”
“윽.”
“근데 이렇게 바보같이 좋다고 하니까. 나까지 바보가 됐네요. 됐어요. 암벽은 무슨 암벽. 그냥 내려가요.”
내가 슬쩍 암벽을 봤다.
왠지, 안전장치까지 모두 해뒀는데, 좀 아까웠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등반해 보시죠?”
“괜찮겠어요?”
이후로 1시간 동안, 나는 내 결정을 몇 번이나 후회했다.
‘바보 같은 놈! 그때 그냥 돌아가고 해야 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강민정과 매니저들의 도움을 받아 어찌어찌 줄에 매달려 정상까지 올라가긴 했다.
정상에 올라가자, 서울 시내가 환히 보였다.
이미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강민정이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보였다.
“좋죠?”
“네 좋네요.”
“이 풍경을 보려고 고생하면서 올라가는 거죠. 자, 커피 마셔요.”
강민정이 배낭에서 꺼낸 보온병에서 커피를 꺼내 주었다.
“저도 하나 준비한 게 있습니다.”
나는 MP3 플레이어와 스피커를 꺼냈다.
강민정이 커피를 따르며 물었다.
“뭐 틀 건데요? 당신들 노래?”
“아니요. 오늘 선곡은 이겁니다.”
조수미 소프라노의 ‘밤의 여왕의 아리아’가 울려 퍼졌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대표적인 아리아였다.
성악을 좋아하는 강민정은 자기 취향인지, 눈을 감은 채로 한참을 꼼짝하지 않고 음악에 몰입했다.
노래가 끝나고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강민정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클래식이에요?”
“선배가 이야기해주신 덕분에 클래식도 좀 듣고 있어요. 덕분에 새로운 세계를 알았습니다.”
강민정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내가 말을 계속했다.
“아리아도 좋더라고요. 특히 모차르트는 가벼우면서도 집중이 돼서 요즘 운동할 때 자주 듣습니다. 약간 새소리 같은 느낌이에요.”
“저는 파워 보컬이라 성악 할 때도 모차르트를 즐겨 부르진 않았어요. 베르디 위주로 했죠. 하지만 저도… 들을 때는 모차르트가 좋아요.”
“진짜 천재 같아요 이 사람. 이런 사람이 제 곡 써줬으면 좋겠어요. 뭐 무리겠지만요. 이미 죽었으니까.”
“당연하죠!”
그때였다.
누군가가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세계적인 소프라노 중에서도 몇몇만 소화 가능하다는 엄청난 고음을 가볍게 가성으로 내고 있었다.
게다가, 내 귀에 따르면 이 사람, 남자였다.
‘누가 이렇게 엄청난 노래를?’
뒤를 돌아보니, 낯익은 사람이 정상 위에 앉아 있었다.
발라드 보컬의 정석, 가수 김지태였다.
“이게 누구야? 민정이 아냐? 그리고 권노을 후배죠?”
“아 네 안녕하세요.”
김지태는 넉살 좋게 우리 옆에 자리를 잡았다.
흙바닥에 ‘털썩!’하고 앉길래 보다 못한 내가 휴대용 의자를 줬다.
“아이고 뭐 이런걸. 괜찮은데.”
말과는 달리 김지태는 냉큼 내가 준 의자에 착석했다.
나는 가까이에 다가간 김에 자세히 김지태를 관찰했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머리는 깔끔하게 올백으로 올린 채였다.
작은 체형이었지만 워낙 몸이 탄탄해서 마치 공군 장교처럼 보였다.
내가 물었다.
“매니저님께서는?”
“아 우리 매니저가 좀 살집이 있어서. 다 죽어가는 채로 올라오고 있져어~. 야 참. 요즘 친구들도 산을 타는군요. 산 타는 건 참 좋은 거야. 가수는 몸이 자본이니까, 관리를 해야지. 과음하고 그러면 안 돼요.”
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정 선배 뭔가 살짝 짜증이 난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김지태는 호탕하게 웃으며 생수를 마셨다.
‘껄껄껄’ 하는 소리가 산 위로 울려 퍼졌다.
소리는 자연스럽게 메아리가 되었다.
엄청난 성량이었다.
‘나 말고 이 정도 성량을 가진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던가?’
골똘히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있던 차에 김지태가 슬쩍 내게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노을 후배님.”
“네.”
“예전에 킹오브싱어 녹화 때 만났죠?”
“맞습니다. 심사위원이셨죠. 기억하고 계셨네요?”
김지태가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말했다.
짙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분명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하죠. 그걸 어떻게 잊습니까. 나랑 같은 종류의 동물을 만났는데. 무조건 기억하죠.”
“같은 종류의 동물이요?”
“가인. 노래해야 사는 사람, 노래 안 하면 죽는 사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선배님도 그런 분이신가요?”
“물론이죠.”
김지태가 일어나서 내려갈 채비를 했다.
강민정이 살짝 밝아진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가시나요?”
“가야죠. 아, 그러고 보니. 노을 씨.”
김지태가 뒤돌아서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예.”
“솔직히 이번 대회는 심심풀이 비슷하게 나왔습니다. 스케줄도 딱히 없고. 세계적인 가수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다니까 호기심도 생겼고. 크~ 바네사 몸매 쥑이드라.”
‘으… 개저씨.’
강민정 또한 불쾌감으로 살짝 인상을 구겼다.
강민정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풋! 하고 웃어 버렸다.
다행히 김지태는 우리 둘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일장 연설 중이었다.
“나야 뭐. 우승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돈이 부족하지도 않고, 솔직히 참여에 의의를 두려 했는데. 권노을 씨랑 붙은 이상, 이젠 안 되겠어.”
“왜죠?”
“권노을 씨 같은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에겐 질 수 없거든. 그게 내 자존심이지. 본선 때 봅시다.”
김지태가 손으로 거수경례하더니만, 방향을 돌려 성큼성큼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호탕하게 웃으며 내려가는 김지태를 보며 나도 직감했다.
가수 김지태는 나와 매우 비슷하다는 걸 말이다.
* * *
내려오는 길에 배영웅에게 슬쩍 물었다.
“김지태 저분, 원래 혹시 코러스 하시던 분 아닌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거 아는 사람 드문데.”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서요.”
역시나 이 사람, 나와 비슷한 과였다.
나는 코러스 하다 회귀한 가수라면, 김지태는 코러스로 시작해 가수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노래 스타일도 비슷했다.
가성 진성 모두 탁월하고, 알앤비를 주 무기로 사용하지만 강한 고음과 풍성한 성량을 바탕으로 모든 장르를 폭넓게 소화하는 타입이었다.
오랜 코러스 경력 덕에 다양한 방식으로 노래하는 법을 알았다.
나와 완전히 같은 타입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껏 다양한 가수들과 경쟁해 왔지만. 나와 비슷한 스타일의 가수를 만난 건 처음이야.’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배영웅이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치더니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분 색다른 경력이 있어요.”
“색다른 경력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