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통화한 사람의 정체는 ‘메리’였다.
지금 우리 밴드에서 코러스를 담당하는 조민하 선배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선배의 룸메이트였던 미국인이었다.
내가 조민하 선배를 영입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메리가 내게 말했다.
-민은 어떻게 지내요? 계속 잘하고 있어요?
“그럼요. 너무 큰 도움이 됩니다.”
통화 소리를 타고 한숨 소리가 들렸다.
-민은 당연히 잘하겠죠. 안 때려치우고 계속할까 그게 걱정이지.
“이번에는 계속하실 거 같아요.”
-다행이네요. 예술은 꾸준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 각본이랑 똑같아요.
‘그러고 보니, 메리의 직업이 또 의외였단 말이야.’
메리는 예능부터 드라마, 영화까지, 전 장르를 아우르는 전천후 방송작가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다 끝났어요?”
-네. 그래서 전화한 거예요. 세러데이 나잇 라이브 이번 시즌이 끝나서 좀 여유가 생겼으니까. 근데 민은 전화를 안 받고!
“조민하 선배한테 메리가 찾는다고 말씀드려 놓을게요. 그건 그렇고 부탁드린 건….”
메리가 잠깐 말을 멈췄다.
-…잡(job) 제안 말이죠?
“네. 이제는 연출 감독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감동이 저절로 우러나는 그런 서사를 함께 만들,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난 작가지 연출가가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영국에 제이크 브라운 같은 최고의 밴드는 모두 작가를 고용해서 자기 공연을 최고의 스토리로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메리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리얼리? 제이크 브라운이요?
‘아차! 아직 공개가 안 된 정보구나.’
회귀한 후, 해외팀의 미래에 대한 지식을 써본 건 처음이라 방심했다.
“아 뭐 예를 들면 작가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스토리가 좋더라구요. 하하하!”
-싱겁네요. 여튼 그런 걸 하고 싶다 이거죠?
“맞습니다. 고민해봐 주세요. 새로운 도전이 될 겁니다.”
-엉뚱한 도전이죠. 각본가보고 콘서트 대본을 쓰라니.
메리 목소리만 들어도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그냥 콘서트 대본을 짜 달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희 가수 팀, 비원더, 아니. 저희 비원더 ‘크루’의 이야기를 써 달라는 거죠.”
-이야기….
메리의 목소리가 조금 톤이 낮아졌다.
조금,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작가 같은 존재는 우리 팀에 필요하지 않았다.
일단 우리 팀에는 작사를 담당하는 환희가 있었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의 대중이 우리를 어떻게 볼지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문화권인 한국의 대중만 신경 쓰면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시아 권역으로 활동 영역을 넓힐 때부터 조금씩 상황이 달라졌다.
환희는 ‘오타쿠’ 컨셉으로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다.
나와 재호 감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분명 일본에서 ‘먹혔다’.
구룡도에서는 황색 언론이 나와 문루아의 스캔들 기사를 터트린 적이 있다.
엉터리 기사였지만, 구룡도의 시민들은 이를 철석같이 믿었다.
게다가, 황당하게도 스캔들 기사 덕분에 구룡도에서 내 인기가 오히려 급상승했다.
구룡도의 시민들은 톱스타와의 스캔들을 실망의 요소가 아니라 또 하나의 재미로 받아들였다.
소속사에서도 한국 팬들의 민심을 잡기 위해 해명 기사만 낸 채로, 중화권에서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깨달았다.
‘아시아권이 이럴 정도면! 앞으로 세계 시장에 가면 더 우리의 짐작과 대중의 반응이 달라질 거야.’
우리의 이야기를 전 세계인의 감정에 맞게 다듬어주고 전달해줄 전문가가 필요했다.
할리우드 영화와 미국 방송에서 글을 쓰며 대중들의 감성을 익혀 온 메리가 이 역할에 딱 적격이었다.
거기다, 그녀에게는 또 하나의 강점이 있었다.
“메리는 조민하 선배와 같이 살면서 저랑 이야기를 많이 했잖아요. 제가 민하 선배랑 소닉독과 만난 것도 보셨고. 저희의 이야기를 직접 눈으로 보셨으니까 누구보다 저희 이야기를 잘 쓰실 수 있을 거예요.”
-…생각해볼게요.
같은 ‘생각해볼게요’지만, 이번 ‘생각해볼게요’에는 왠지 진심 어린 고민이 느껴졌다.
이제는 기다릴 뿐이었다.
* * *
메리와의 협업은 그래 봐야 글로벌 본선을 위한 밑밥이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한국 예선이었다.
그중에서도 바로 다음 미션에 집중할 차례였다.
다음 미션은, 바로 ‘라이벌 미션’이었다.
가장 스타일이 비슷한 두 사람을 붙여놓고 대결했다.
패자는 패자들끼리 다시 패자부활전을 치러 단 한 팀만 살아남는다.
패자부활전이 한 번 남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둘 중 한 명이 반드시 탈락한다는 점에서 이전 미션보다 훨씬 잔혹했다.
설상가상으로, 두 라이벌은 ‘함께’ 딱 한 곡을 부른다.
경쟁자 두 팀이 서로 협업해서 한 무대를 꾸려가야 했다.
경쟁심이 지나쳤다간 무대 자체를 그르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이타적으로 상대방이 돋보이는 부분을 모두 가져가게 두면 그대로 패배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팀워크와 개인기.
상반된 두 개념 사이의 밸런스를 강요하는 골치 아픈 미션이었다.
게다가 상대도 또 문제다.
하필 김종윤 그 인간이 우리 상대로 지목됐다.
‘뭐 생각해보면 말은 돼. 나머지 가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록 가수, 클래식 성악가, 재즈, 댄스 가수, 심지어 래퍼까지. 다양한 팀이 있지만 발라드가 주력인 팀은 딱 비원더와 김종윤, 둘뿐이니까.’
생각해보면 당연하지만, 그래도 왠지 골치가 아팠다.
김종윤과는 악연으로 엮여 있었다.
게다가, 이번 대회에서 김종윤은 뭔가 좀 비열한 느낌으로 아득바득 올라오는 느낌이 있었다.
단순히 실력이 뛰어나고 고집이 세다는 것이 전부인 강민정 같은 타입보다 훨씬 골치 아프게 느껴졌다.
수틀리면 반칙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 * *
예상대로 첫날 회의부터 문제가 터졌다.
김종윤이 느릿느릿 자기 말을 되풀이했다.
“무대는 이걸로 하자고.”
재호가 고개를 저었다.
“쌍팔… 아니, 느낌이 좀 옛날 느낌인데요.”
“발라드란 게 다 그런 거지. 그런 건 클래시컬 하다고 하는 거야.”
“발라드도 컨템포러리하게, 요즘 느낌대로, 세련되게 할 수 있어요.”
김종윤이 인상을 구겼다.
“너 지금 내가 촌스럽다는 거냐?”
“아니요. 골라주신 ‘이 노래’가요.”
“그게 그 말이지!”
선곡부터 골치였다.
김종윤은 오창선이 불렀던 전설의 록발라드 ‘사랑하지 않는 너에게’를 부르자고 강요 중이었다.
우리 팀은 세 명 모두 이 선곡에 반대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우리 팀과 안 맞았다.
리듬감이 없이, 정박으로 치는 발라드라 비원더의 음악과는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음역도 딱 김종윤에게 맞게 고음 위주였다.
재호나 환희처럼 고음에 집중하기보다는 느낌 있게 부르는 친구에게는 버거운 고음의 연속인 곡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곡이 철저하게 ‘솔로’곡이라는 거야.’
내가 김종윤에게 질문했다.
“이 곡은 듀엣을 넣을 파트가 없는데요?”
“화음을 왜 넣어? 그냥 한 명이 부르고 나머지는 코러스로 작게 부르면 되지.”
“아, 그럼 선배만 돋보이게 부르고 저희는 코러스 하고요?”
“나는 코러스 화음 못 해. 너희들은 되잖아? 니들이 무대를 위해 서포트해 주면 되겠는데. 아 눈물 나는 팀플레이. 감동이다.”
“그리고 스포트라이트는 선배가 다 받고요?”
“아 거참 이기적이네. 멋진 무대를 위해 그 정도 배려도 못 하냐? 하여간 지만 알아요.”
‘무지개 반사’를 외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저놈이랑 똑같은 연령대로 내려갈 수는 없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딱 보니 환희가 한소리 하려던 참이었다.
나는 환희가 더 말하지 못하도록 어깨를 딱 붙잡았다.
그리고 환희보다 먼저 선수를 쳐서 말을 내뱉었다.
“저희끼리 잠깐 회의 좀 하고 오겠습니다.”
* * *
“아 횽! 왜 그랬어요? 저런 사람은 콱 혼내줘야 된대니까여.”
“여긴 우리 셋뿐이야. 카메라도 없고. 억지로 말투 지어낼 필요 없어.”
“아… 네… 카메라?”
환희가 빠르게 본 모습인 주하늘로 변했다.
‘카메라’라는 단어를 듣자 하늘이는 물론, 재호까지 눈빛이 달라졌다.
내가 말을 계속 이어갔다.
“글로벌 비전은 내가 안 봐서 모르겠는데. 제작진에 슈퍼스타 T 찍었던 이윤강 PD가 있잖아? 조금 전 회의 때, 슈퍼스타 T 스타일로 카메라가 사방에 숨어 있었어. 말은 조심하자고.”
재호가 내게 항의했다.
“하지만 저딴 놈의 수작에 넘어갈 순 없어. 저 선곡으론 안 된다구.”
내가 싱긋 웃었다.
“바로 그거야.”
“뭐?”
“저 곡으로는 안 돼. 그러면, 더 독한 곡으로 가는 거야.”
재호와 환희가 동시에 내게 되물었다.
“더 독한 곡??”
* * *
잠시 후, 우리 셋은 말을 맞춘 후 김종윤에게 돌아갔다.
김종윤이 우리를 흘겨보며 말했다.
“생각해봤어? 역시 ‘사랑하지 않는 너에게’로 가자니까? 클래식으로 가야지. 클래식. 관객들을 생각하라고.”
‘지만 생각하는 놈이 말은 참 잘하네.’
꾹 참고, 최대한 환한 얼굴을 만든 후 입을 열었다.
“더 고전으로 가죠.”
“뭐?”
“‘It Was You’ 어떻습니까?”
김종윤이 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에게는 이 선곡을 반대할 명분이 하나도 없었다.
‘It Was You’는 ‘사랑하지 않는 너에게’보다도 훨씬 유명한 곡이다.
오창선의 허다한 히트곡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노래.
하지만 김종윤은 이 곡을 원하지 않을 거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왜냐면 ‘너무 고음이 많고 어렵기’ 때문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너에게’는 적당히 김종윤이 돋보일 수 있는 고음이라면, ‘It Was You’는 김종윤에게 너무 어려운 고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노래를 소화할 수 있었다.
클라이맥스의 음도 내가 충분히 부를 수 있는 정도의 고음이었다.
혼자 부르기엔 좀 무리가 있겠지만, 4명이나 함께 불러서 파트를 분배한다면 너끈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이제는 ‘김종윤’이 병풍이 되지. 모든 돋보이는 고음은 다 비원더가 부르게 되고 말이야.’
김종윤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올드하고 뻔한 선곡 아냐?”
재호가 일부러 김종윤이 방금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클래시컬한 거죠.”
“관객은 그보다 더 발전적인 노래를 듣고 싶지 않을까?”
이번에는 내가 대답했다.
“관객들은 익숙한 노래를 원하겠죠. 관객의 니즈를 피하시려는 건가요? 혹시… 이기적?”
김종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미소를 유지하려고는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그럼. 좀 키를 낮춰야겠네. 악을 쓰는 걸 관객에게 보여줄 수는 없잖아?”
‘그건 안 될 말이지.’
키를 낮춰서 김종윤도 클라이맥스 부분을 부를 수 있게 되면 내 전략이 소용이 없어진다.
“관객들은 원키를 원할걸요. 아니면 키를 한 키 올릴까요?”
“키를 올려? 야. 장난해? 오창선 노래야 오창선. 그걸 키를 올리겠다고?”
“저는 가능합니다.”
“웃기고 있네!”
“보실래요?”
재호가 멋들어지게 즉석에서 피아노로 ‘It Was You’를 원곡보다 한 키를 올려 연주했다.
환희가 중저음 파트를 맡아주었고, 나는 후렴과 마지막 애드립 부분을 담당했다.
[It Was You 오직 너 뿐야]
깔끔하게 1절을 완창했다.
일부러 힘들지 않은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로 노래했다.
김종윤의 얼굴이 뒤틀렸다.
“이, 이게… 되네? 된다고? 하, 하.”
나는 최대한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저도 되는데, 선배님은 당연히 가능하시겠죠? 반반씩 비중 나눠 드릴 테니까, 내일부터 당장 연습해보죠. 진짜 클래식 발라드니까. 청중들이 정말 좋아하겠는걸요?”
“하… 하… 하….”
김종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왠지 앞으로 연습이 좀 재미있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