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누군가 대기실을 노크했다.
문을 열어 보니, 강민정과 그녀의 매니저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다음 라운드 진출 축하드립니다.”
강민정이 쏘아붙였다.
“장난해요? 당신들이 훨씬 더 높은 점수 받았잖아요.”
“에이 겨우 5점 차이인데요 뭐. 운이 좋았습니다.”
“그게 실력 차이죠. 심지어 당신들 내 조언은 아예 아무도 따르지 않고! 나를 놀리던데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호가 다가와 말을 보탰다.
“선배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무슨 말이죠?”
“선배님 공연의 연기가 너무 좋았거던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캐릭터에 몰입하면 좋을지를 연구했습니다. ‘마녀 신데렐라’를 보지 않았다면 이런 무대, 평생 못 했을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강민정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입은 슬쩍 미소를 짓고 있었다.
“놀리는 거도 아니고… 하지만 화도 못 내겠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건 환희였다.
“저희, 이거도 인연인데 같이 뒤풀이나 하시져! 넵튠 선배까지 같이요!”
* * *
곧바로 비원더 3인과 밴드 멤버, 거기다 강민정까지 모두 의기투합해 파티를 시작했다.
양재 숙소 근처의 바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내가 배영웅 매니저에게 귓속말했다.
‘이거 어떻게 빌리셨어요? 저희가 다 전세 내도 괜찮은 건가요?’
‘여기 선생님 친인척분이 운영하시는 가게예요. 오늘 같은 날 쓰는 건 아무 문제 없구요. 오늘 기운 받아서 다음 주에 하는 마지막 예선만 통과하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슬쩍 가게를 둘러봤다.
다들 거나하게 취해 술 게임을 진행하거나 노래방 기계 앞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MT 분위기였다.
다만 딱 두 명 예외가 있었다.
우선 재호, 이 녀석은 평소처럼 술을 한 모금도 안 했다.
“내 뇌세포는 소중하다구.”
“아 그냐.”
재호는 얌전히 탄산수를 마시며 밴드 마스터와 박찬용이 하는 밴드 연주에 대한 열띤 토론을 듣고 있었다.
“시티팝과 AOR의 차이는 결국 문화적 맥락에서 나온 거야.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싸구려 모작이 되고 마네. 우리만의 음악을 해야지.”
“그렇다고 레퍼런스가 없이 그냥 머릿속에서 나온 걸 연주한다는 게 말이 되나? 참고는 해야지. 그걸 어떻게 아름답게 변주하냐가 중요한 거 아이가?”
뭔가 굳이 앉아서 듣기에는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환희와 넵튠 한 선배, 그리고 조민하 선배가 주도하는 하드코어한 술 게임에 참여할 기분도 아니었다.
이것저것 빼다 보면 결국 남은 건 딱 한 명뿐.
혼자 바 테이블에 앉아 침울하게 뭔가를 마시고 있는 강민정 선배 옆에 가 앉았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이미 앉았잖아요?”
“선배님 불편하시면 나가야죠.”
“내 자리도 아닌데 왜요?”
그녀는 눈을 감고, 음미하듯 뭔가를 마셨다.
와인보다 짙은, 이상한 액체였다.
“뭐 드시나요 선배?”
“제가 늘 들고 다니는 건강 음료에요.”
“술은 당연히 안 드시고요?”
“그런 거 마셨다간 성대 버려요.”
역시나 그녀는 단호했다.
“…그러시군요.”
“노을 군은 술 마셔요?”
“조금은요.”
“그만두는 게 좋아요. 차라리 제가 이 주스 만드는 법 알려 줄까요?”
슬쩍 강민정이 마시는 음료의 냄새를 맡았다.
뭔가 역한 느낌이 들었다.
“안에 뭘 넣으셨나요?”
“브로콜리하고 케일하고 뭐 이것저것요.”
‘브로콜리??? 케일??? 풀떼기를 갈아서 만든 주스를 마신다고?’
저 주스 비슷한 즙은 절대 입에도 대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강민정이 ‘뭐 싫으면 말아요.’라는 눈짓을 보내고는 천천히 특제 주스를 마셨다.
나는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려 그녀에게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선배님 연기의 비결이 뭔가요?”
“그걸 내가 왜 알려줘야 하죠? 노을 군은 내게 노래의 비결 알려줄 거예요?”
“얼마든지요.”
“웃기지 말아요!”
강민정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사실 이번에, 넵튠 한 선배님과 연기 특훈했습니다.”
“짐작했어요.”
“나름대로 연기가 괜찮아지긴 했는데. 강민정 선배님의 연기에는 전혀 닿을 수 없었어요. 당연히 1주일 사이에 따라잡기는 무리라는 건압니다. 문제는, 뭐가 부족한지조차 모르겠어요.”
강민정이 우아하게 입에 묻은 주스를 행커치프로 닦아내며 대답했다.
“연기, 잘하시던데요. 오늘 노래에서는 캐릭터가 잘 느껴졌어요.”
“좋은 연기자시지만 능숙한 거짓말쟁이는 아니시네요. 좋은 분이신 거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제 연기는 선배님 연기에 비하면 아마추어 축에도 못 껴요, 선배님도 아시다시피요. 아마 선배님은 애국가를 부르실 때도 저보다 훨씬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실 거예요.”
갑자기 강민정이 나지막이 애국가 2절을 불렀다.
그것도 한 옥타브를 높여서, 가느다란 가성으로.
천사의 음성과도 같은 아름다운 노래였다.
게다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항상 듣고 있던 애국가가, 그녀의 연기를 통해 나라를 잃고 절규하는 여왕의 장송곡으로 바뀌었다.
내 심장이 절로 덜컥, 내려앉았다.
노래가 끝나고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멋진 노래입니다 역시.”
“노래는 저보다 노을 씨가 더 훌륭해요. 점수가 말해주고 있잖아요? 비결이 뭐예요? 노래 비결, 말해주겠다고 했잖아요?”
“제가 알려드리면, 혹시 연기 실력 늘리는 비결 알려주실 건가요?”
그녀가 슬쩍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봐서요.”
“그냥 자유롭게 부르시면 됩니다.”
“그게 뭐예요! 지금도 저는 제 마음대로 부르는 건데요?”
“‘본인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지셔야죠.”
“네?”
정곡을 찔린 듯, 강민정의 동공이 확장됐다.
“본인의 고집, 아니 고집이라고 하면 부정적이니까. 아주 훌륭한 ‘버릇’이라고 하죠. 그 버릇대로만 살면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유가 아니라 과거의 나 자신에게 매여있는 거죠.”
“…….”
강민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스만 천천히 들이켰다.
내가 계속 말을 이었다.
“‘클래식이 아니라 팝으로 불러 봐야지.’ 뭐 그런 생각을 하실 필요도 없어요. 그냥 평소 버릇에서 벗어나 불러보시면 훨씬 자유로운 노래가 되실 거예요. 하루아침에 되진 않겠지만요.”
주스를 다 마신 강민정이 보온병을 꺼내 유리병에 주스 한 잔을 더 따랐다.
주스를 다 담은 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맞췄다.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네?”
“지금도 할 수 있다고요. 내기할래요? 내가 이기면 이 주스 마셔요.”
“제가 이기면요?”
“연기 노하우를 알려주죠.”
“좋습니다.”
바로 강민정이 바 테이블을 ‘탁’ 치더니만 바깥으로 걸어갔다.
곧바로 그녀는 노래방 기기로 걸어가 노래 번호를 입력했다.
‘애창곡인가? 번호도 외우셨네.’
전주가 흘러나오자마자 나는 경악했다.
너무나도 의외의 선곡이었기 때문이었다.
문루아 선배의 최고 히트곡 ‘달의 공주’였다.
[달이 가까워져 달이 가까워져.
언젠가 우리는 같은 하늘 같은 땅에 설 거야.]
강민정은 리듬감 넘치게 노래를 소화하는 것은 물론, 춤까지 완벽하게 해냈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춤과 노래를 함께한다는 점에서 뮤지컬 가수와 댄스 가수는 큰 차이가 없었다.
되려, 뮤지컬 배우가 댄스 가수보다도 더 뛰어난 춤과 노래 실력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녀의 노래에는 여지까지의 클래식 꼰대다운 경직이 단 하나도 없었다.
클래식 발성으로 완전히 단련된 성량을 유지했지만, 지금의 강민정은 성악 전공자가 아닌 그저 자유로운 ‘가수’였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의 갈채가 쏟아졌다.
“야! 이런 노래도 잘하네 민정아!”
“대박! 왜 지금껏 이렇게 안 한 거야?”
강민정이 사람들의 환호에 인사로 화답한 후, 의기양양하게 내 자리로 돌아왔다.
“됐죠?”
“인정합니다. 어떻게 단숨에 이리 바꾸셨나요?”
“댄스 가수를 연기하면 그만이에요.”
“아…!”
미처 생각 못 한 변수였다.
“자, 그럼.”
강민정이 내게 주스가 담긴 유리잔을 내밀었다.
“네?”
“마셔요. 약속했잖아요?”
“끙.”
강민정은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할 방법은 없다는 눈빛이었다.
“마. 셔. 요.”
체념하고 유리잔을 들었다.
어차피 맛은 어쩔 수 없었다.
냄새라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코를 막고 주스를 마셨다.
쓴맛이 입에 가득 퍼졌다.
“아이고야~. 뭐 이리 써요?”
강민정이 박수를 쳤다.
“와! 대박! 처음 봐요.”
“뭘요?”
“이거 처음 먹고 토하지 않은 사람은 처음이에요. 진짜 정신력 대단하네요. 노래 잘할 만해요.”
“그럼 제가 토할 줄 알고 주스를 먹이신 거예요?”
강민정이 장난스럽게 눈짓했다.
“하하! 좀 봐줘요. 나보다 점수도 높게 받았으면서.”
“제발요!”
나는 서둘러 물을 한 잔 들이켜 주스의 흔적을 입안에서 없앴다.
“대신 연기 노하우를 알려드릴게요.”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 노래가 예측 가능한 노래라고 했죠?”
“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예측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있어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가사는 당연히 외워야죠. 거기부터 노래의 시작이죠.”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사를 모르는데 제대로 감정이 담길 리가 없으니 말이다.
강민정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외웠다는 티를 내면’ 연기는 망가져요.”
“외웠다는 티요?”
“마치 이 대사가 바로 지금 생각난 듯이. 자기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내 감정에 놀라서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어야 실감 나는 연기가 된다고요. 지금 당신은 노래 가사를 완벽하게 숙지한 티가 나요. 당연히 가사는 온전히 숙지해야죠. 하지만 이미 모든 대사를 다 아는 것 같은 사람이 읊는 건 연기가 아니에요. 웅변이지.”
“마치 지금 생각나서 내뱉는 가사인 것처럼 말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솔직히, 저는 노래를 어떻게 연기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원래 배우니까. 그냥 노래도 연기하듯 할 뿐이에요. 가수인 권노을 군이 직접 해결해야 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뭔가 노래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계기를 얻은 느낌이었다.
강민정이 슬쩍 말했다.
“나는 예측 가능한 노래를 하고. 당신은 예측 가능한 연기를 하고. 뭔가 우리. 좀 비슷한 거 같네요?”
“그러게요. 하지만 하나 다른 게 있습니다.”
“뭔데요?”
“입맛이요. 이 주스, 진짜 도저히 못 먹겠어요. 여기요. 여기 콜라 좀 주세요!”
자꾸 헛구역질이 났다.
강민정이 혀 차는 소리를 내며 툴툴댔다.
“저게 얼마나 몸에 좋은 건데… 저런 걸 먹어야 성대가 건강해지지!”
네, 됐습니다.
* * *
다음 날 아침.
뜻밖의 인물이 내게 연락했다.
오랜만의 국제통화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