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요새 점점 캐스팅에서 밀려요.”
“선배님이요?”
“그럴 때가 온 거죠.”
“나이 말씀이세요? 전혀… 아니신 거 같은데.”
강민정의 나이는 이제 겨우 서른 남짓이다.
강민정이 한숨을 내쉬더니 한층 낮은 음성으로 내 말을 덮었다.
“걸그룹 출신들이 문제예요.”
1세대 걸그룹 멤버 중 노래에 자신이 있는 멤버들이 조금씩 뮤지컬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등장하면서, 뮤지컬 분야의 터줏대감이던 강민정 배우 같은 배우의 입지가 조금씩 좁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강민정 배우처럼 오랜 기간 주연으로 활동해 온 배우가 있나요?”
“없죠.”
“그러면 왜?”
“걸그룹 출신을 쓰면 관심을 더 끌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관심이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강민정이 분노에 찬 눈빛을 유지한 채 생수통을 꺼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어느새 그녀도, 나도, 클라이밍은 뒷전이 됐다.
적당한 자리를 잡고는 휴식을 취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내가 먼저 질문했다.
“성악을 전공한 뮤지컬 배우도 거의 없지 않나요?”
“제가 처음이었죠. 이제는 몇 명 더 있지만.”
“그러면 아직도 엄청 희소성이 있겠네요.”
강민정이 코웃음을 쳤다.
“흥. 제작자는 그런 거 안 봐요. 오로지 티켓 판매량만 보죠. 걸그룹은 티비 출연도 잦고, 인지도도 저랑 상대가 안 돼요. 그래서 배역 제의가 더 쉬운 거죠.”
“그래서 글로벌 비전에 참여하신 거군요.”
“그래요. 알겠어요? 어떻게든 저는 유명해져야 해요. 인지도로 밀려서 원하는 배역을 못 받을 수는 없으니까. 저, 절대 안 질 거예요. 읏쌰!”
그녀는 다시 결심한 듯, 씩씩하게 클라이밍을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가는 그녀를 보며 ‘굳건한 의지의 가수구나’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건 그렇고 클라이밍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하지?”
* * *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왔다.
재호와 하늘이가 탁자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내가 둘에게 물었다.
“아직 캐릭터 짜는 거야?”
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쫌 있다 셋이서 맞춰보면 될 거 같아. 셋이 같은 캐릭터를 연기해야 노래에 통일감이 생기니까. 그건 그렇구, 노을이 너는 오늘 운동 어땠어?”
나는 몸서리를 쳤다.
“어휴, 문루아 선배, 진짜 운동 열심히 하더라. 우리가 매일 하는 메뉴는 그냥 몸풀기던데. 오늘은 클라이밍을 했는데, 누굴 만났는지 알아?
재호랑 환희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한 템포 뜸을 들였다.
충분히 두 사람의 궁금증을 자극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는 툭, 말을 꺼냈다.
“강민정.”
하늘이가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을 어떻게요?”
“자자 진정해. 알고 보니 문루아 선배랑 강민정 선배가 친하더라고.”
“그래요? 상상도 못 했네.”
“같은 여자 연예인 성경 공부 모임 멤버라네.”
“문루아 선배도 교회 다녀요?”
“너는, TYB 터줏대감이 전혀 모르는구나. 천주교잖아. 강민정은 교회 다닌다더라고.”
“그분에게는 왠지 어울려요. 교회 헌금 송 하시는 권사님 될 것 같은 타입이랄까.”
‘풋’하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은 채 말을 이어갔다.
“뭐, 각설하고, 왜 강민정 선배가 그렇게 성악에 집착하는지 알았어.”
나는 두 사람에게 강민정이 해줬던 이야기를 공유했다.
강민정의 사정을 들은 하늘이는 혀를 쯧쯧 찼다.
“그렇게 뛰어난 배우가 인지도가 모자라서 원하는 배역에 캐스팅이 안 된다니! 좀 너무한 거 같네요.”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 결국 티켓을 팔아주는 연예인이 더 좋다는 거 아니겠어? 주관적인 노래 실력보다는 객관적인 티켓 매출이 더 중요하니까.”
“그래도요! 배우는 연기를 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일단은 매출 아닐까?”
“재호 형, 형도 그런 생각이에요?”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재호가 입을 열었다.
“나야 뭐 안타깝네. 언젠가는 실력이 곧 인기로 이어질 거라 믿구 싶다. 성악 콩쿠르에라두 나가면 안 되나??”
“성악 콩쿠르는 또 다른 세계지. 그보다는 글로벌 비전이 좋다고 나도 생각해. 재호 니 말대로 크로스 오버 뮤지션도 자주 우승하는 대회니까.”
재호가 몸서리를 쳤다.
“이거 진짜 위험한데! 저 정도 대 뮤지컬 배우가 저렇게 의욕이 넘쳐서 도전하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까. 게다가 뮤지컬은 극적인 요소도 많구, 고음도 많이 쓰잖아. 자극적으로 노래해야 살아남는 오디션에 강할 수밖에 없어.”
재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실제로 원생에서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뮤지컬 배우들이 오디션 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민정 배우에게도 명확한 약점이 있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강민정 배우가 왜 성악에 집착하는지 알겠어. 성악 테크닉이야말로 본인이 걸그룹 출신 신인 여배우들과 다르다는 증거니까.”
강민정의 팬인 재호가 모기소리 마냥 작게 말을 덧붙였다.
“실제로도 걸그룹 메인보컬들보다 더 전달력이 좋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지금 같은 노래는 본인에게도 독이야.”
아무래도 강민정 본인을 위해서라도, 강민정을 꼭 이겨줘야 할 것 같았다.
* * *
그날 밤, 재호와 환희와 함께 녹음실에 모여 다시 넵튠의 강의를 들었다.
나를 보고 넵튠이 씨익 웃었다.
“노을이 너는 안 들어도 될 거 같은데.”
“그래도 배워 보려고요.”
“딱히 배울 게 없을 텐데. 뭐 좋아.”
재호가 대표로 셋이 합의한 ‘개나리’의 캐릭터를 브리핑했다.
넵튠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여자에게 사랑이 식자 자꾸 거리를 둔 남자. 그러다 정작 여자가 이별을 고하니까 은근히 좋아했어. 근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너무 허전해서 돌아왔고. 돌아와 보니 전 여친은 딴 남자가 생긴 거지. 이제 와서 후회하고 엉엉 붙잡아도 이미 늦은 거고, 마치 그 여자가 자기를 떠난 마냥 자기 연민에 빠지는 남자.”
우리 셋이 노력 끝에 완성한 캐릭터였다.
넵튠이 깔끔하게 한마디로 우리 캐릭터를 정리했다.
“한마디로 개쓰레기네.”
재호가 대답했다.
“그게 포인트죠.”
넵튠이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나쁘지 않아. 음악에서는 꼭 좋은 사람이 주인공이란 법은 없거든. 반듯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이 나오는 영화, 얼마나 재미없어?”
넵튠이 재호와 환희가 쓴 캐릭터 과거사를 꼼꼼히 읽더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 디테일한 부분이 있으면 합격이야.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
넵튠이 ‘개나리’의 가사를 화면에 크게 띄웠다.
[나리나리 개나리
나리보다 못해서 개나리
벚꽃에게 밀리는 개나리
내 님도 나를 개나리 취급
나만을 봐주질 않네
오늘도 들로 산으로 헤매네]
“가사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어?”
환희가 먼저 대답했다.
“참 제가 안 쓸 거 같은 가사란 생각이여?”
“좋은 포인트야.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저는 저런 약간 처지는. 우는. 신파? 적인 가사를 못 쓰겠어요. 닭살이 돋는 거 같아여.”
“왜 그런 감정이 들까?”
“가사의 스토리 때문 아닐까여?”
“그리고?”
환희가 잘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님은’ 그러는 게 뭔가 좀… 그런데요?”
“바로 그거야. 정확해. 어휘. 워드 초이스야. 네가 평소에 쓰는 단어가 아닌 거야. 당연하지, 세대가 다르고 장르가 다른데 어휘가 같으면 되겠어? 그래서 느낌이 그렇게 다른 거야.”
넵튠 한이 우리 셋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 말이야, 팀이니까 전곡을 다 부르지 않잖아. 그럼 노래 안 부를 때 뭐해?”
재호도 환희도 크게 생각해 보지 않은 듯 딴청을 피웠다.
그러다 재호가 마지못해 말했다.
“제가 부를 다음 파트를 생각하는 거 같아요.”
환희도 말을 덧붙였다.
“평소는 아닌데. 아주 가끔은 다른 멤버 노래를 듣는 경우도 있어여. 이게 정답이죠?”
넵튠이 고개를 저었다.
“내 기조는 이래. 노래는 하나의 스토리야. 내가 안 부르고 있을 때도, 스토리는 계속 가는 거야.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는 거라고. 여기까지 오케이?”
나를 포함 세 명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계속 가볼게. 이 노래 주인공 말야. 원곡은 여자잖아. 이 사람, 왜 하필 ‘개나리’란 꽃을 가사에 쓰기로 한 걸까?”
재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개나리란 단어가 이 노래의 제목이라서 아닐까요?”
“아이. 사실은 그러겠지! 환희 너는 작사가니까 잘 알겠지만. 곡 제목을 자꾸 반복하는 건 기본적인 기술이지. 그래야 곡 제목이 기억에 남으니까. 그게 현실인데. 하지만 스토리에 집중해 보자 이거야.”
넵튠이 벌떡 일어나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열변을 토했다.
“왜 이 여자 주인공은 ‘개나리’라는 꽃을 골랐을까? 사실 개나리가 가장 예쁜 꽃이라고 보통은 생각 안 하잖아. 봄을 상징한다기에는 가사에서 슬쩍 이야기한 ‘벚꽃’도 있구, 장미도 있구. 예쁜 거 많은데 왜 하필 개나리일까?”
이번에는 환희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흔한 꽃이라서 아닐까요?”
“무슨 생태계 실습하냐? 많이 보이는 꽃이라고 가사에 넣지는 않지.”
“음… 그러면….”
다들 딱히 할 말이 없는 듯, 침묵을 지켰다.
내게는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슬쩍 입을 열었다.
“빡쳐서 아닐까요?”
내 말을 들은 넵튠의 얼굴에 놀람이 번졌다.
“빡침?”
“그 개나리가 왜. 좀 ‘개자식’이란 말하고 어감이 비슷하잖아요. 모음 구성이 ‘ㅐ, ㅏ, ㅣ’로 똑같으니까. 할머니들은 욕 대신 ‘개나리’라는 말을 써서 걸쭉하게 욕하시기도 하시고요. 이 화자가 상대에게 빡쳐서 욕해주고 싶어서 ‘개나리’라는 말을 쓴 거는 아닐까 싶은데요.”
넵튠이 ‘오~’ 하고 소리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해봐. 더 해봐.”
“결국 이 노래, 짧게 요약하면 애인한테 빡쳤다는 노래잖아요. 그러니까 ‘개나리’라는 말의 어감을 실어서, 마치 욕처럼 발음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좋아 좋아. 바로 그거야.”
환희가 벌떡 일어서서 우리를 제지했다.
“잠깐 만여! 확실히 노을 횽의 해석이 기발하긴 해여.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여? 너무 비약이 심한 거 같은데요.”
넵튠이 쏘아보듯 환희를 쳐다봤다.
“실제로 그렇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작사가가 우리 무대 보고 틀렸는지 맞았는지 검사해? 우리의 목표는, 이 가사에서 우리만의 캐릭터. 우리만의 서사. 우리만의 감정을 찾는 거지. 그리고 그 이야기로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거고. 원작자의 의도랑 달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야?”
환희는 물론, 재호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민에 잠겼다.
‘이런 고민을 안 해본 모양이네.’
넵튠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게 노을이가 너희 둘이랑 좀 다른 이유야. 노래도 일종의 창작이거든? 재호 환희 너희 둘도 잘 창작 해. 곡도 잘 쓰고! 창법도 굉장히 창의적이야. 어디서 들어본 적이 없지. 하지만 연기의 관점에서 캐릭터를 ‘창조’한다는 감이 부족해 보여.”
넵튠의 말이 맞았다.
연기력이 뛰어난 노래를 부른다는 건, 누군가의 영혼을 카피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저 가사에 맞는, 나만의 영혼을 담은 캐릭터를 창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환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그럼 오늘부터 연기 훈련을 볼게여. 이 단어를 왜 썼는지, 제가 일일이 다시 살펴보고 저만의 이야기를 꾸며내면 되는 거잖아요?”
그대로 환희가 휙 나가 버렸다.
재호가 뒤따라가며 말을 보탰다.
“저두 그럼, 숙제 다 해 놓을게요. 내일 이 시간에 또 오겠습니다.”
남은 건 나와 넵튠 한둘뿐이었다.
넵튠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뭔가 찝찝함이 남아있는 표정이었다.
나도 문제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강민정은 뮤지컬 무대에서 강철처럼 단련된 배우 중의 배우야. 앞으로 3~4일 연기를 수행한다고 그걸 따라잡을 수는 없어.’
연기력을 올려야 했지만, 그걸로 강민정보다 뛰어난 무대를 하기는 무리였다.
‘그러니까, ‘다른 무기’가 필요한 거겠지.’
다행히 내게는 준비된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