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미션 곡은 정통 트로트 곡인 ‘개나리’였다.
‘아니 무슨 외국 오디션에서 트로트를 미션 곡으로 줘? 애초에 이 노래를 어떻게 아는 거야? 누가 알려줬나?’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충분히 납득 갈 만한 선곡이었다.
‘개나리’는 예전부터 불리던 민요를 베이스로 해서 만들어진 대중적인 트로트 명곡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노래 중 하나란 뜻이다.
그래서 오히려 외국에서 심사하는 ‘한국 가수 선발 대회’에서는 이런 가장 한국스러운 곡을 미션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외국인이 한국인보다 더 궁궐이나 한옥, 사찰에 더 호들갑인 그런 느낌이랑 비슷한 건가?’
때마침 뮤지컬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 시간이 되었다.
옆을 돌아보니 어느새 환희와 배영웅 실장은 사라졌다.
내가 재호에게 물었다.
“둘은?”
“니가 아무 말 없이 중얼대고 있는 사이에 화장실 갔어.”
“너는?”
“나는 화장실 별로 안 가고 싶더라구. 바깥 공기나 좀 쇨까?”
“좋지.”
재호와 무대 바깥에 나와 한숨 돌리면서 커피를 마셨다.
재호는 늦은 밤에 커피 마시면 잠 안 온다며 기어이 생수를 고집했다.
재호가 한숨을 토해내듯 내게 공연 감상평을 쏟아냈다.
“강민정, 정말 말도 안 되네. 저게 사람인가 싶어. 노을이 넌 어때?”
“나도 뭐, 감탄했지. 사실 우리야 4분짜리 한 곡에 모든 걸 때려 넣으면 되잖아? 콘서트라고 해봤자 한두 시간 정도고. 근데 이건 뭐 춤에 노래에 연기에… 심지어 신데렐라는 의상도 끊임없이 바뀌는데. 에너지가 끝까지 떨어지지 않았어.”
재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런 사람을 어떻게 이기냐?”
“뭐 그런 생각을 벌써 하냐. 일단 무대에 감동하면 되지. 대결은 그다음이야.”
“한가한 소리 하고 있네. 야, 이번 미션, 진짜 우리랑 궁합 안 맞아. 알지?”
“알고 있지. 여태껏 비원더의 특기는 ‘싱어송 라이팅’이었는데. 그걸 못 쓰니까.”
재호와 환희의 작곡은 우리 비원더만의 강점이었다.
환희의 멜로디와 가사, 재호의 편곡은 언제나 섬세하게 우리 3인의 강점을 살려주었다.
설사 우리가 쓴 곡이 아니더라도, 재호와 환희가 미리 녹음 전에 마감 처리해서 우리의 보컬에 맞게 편곡했다.
두 사람 덕분에 비원더는 항상 ‘우리에게 맞는 옷’인 노래만 불러왔다는 뜻이다.
내가 말을 이었다.
“알고 있지. 사실 여태까지 나는 되게 편하게 노래해 왔어. 너랑 환희가 내 파트를 나한테 딱 맞춰서 디자인해 줬으니까.”
“아니 다행이네.”
“근데 이번에는 그게 안 되지. 우리가 쓴 곡이 아니니까. 그냥 편곡만으로 승부해야 해. 기성곡의 가사나 멜로디를 바꾸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거고.”
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훨씬 골치 아파. 이미 원곡이 있어 버리니까. 게다가 그게 아무 곡도 아니구, ‘개나리’ 같은 전 국민이 다 아는 곡이면 훨씬 더 힘들다구.”
“재해석의 여지가 없어져 버리니까.”
이게 두 번째 문제였다.
이 곡, 트로트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빅히트한 곡이라, 적당히 바꾸면 원곡과 같아져 버리고, 너무 많이 바꾸면 이 노래만의 느낌이 사라져 버릴 위험이 있었다.
재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노을이 너는 예전에 오디션에서 트로트도 좀 불렀지? 나랑 환희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 트로트로 부를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너무 세련되게 편집하면 그냥 ‘개나리’가 아니라 ‘말나리’ ‘소나리’가 돼 버린다구.”
“‘소나리’ 괜찮은데!”
내가 큭큭 웃었다.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런 미션 곡으로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까 심히 걱정됐다.
내가 재호를 위로할 요량으로 말을 돌렸다.
“그래도, 강민정도 개나리는 부르기 어려워하지 않을까?”
재호의 눈동자가 커졌다.
“왜에?”
“그야. 누가 봐도 완전! 초! 정통! 성악 소프라노잖아. 트로트 같은 거 한 번도 안 불러봤을 거 같은데?”
“그렇기야 하지만. 트로트를 소화 못 할까?”
“동요처럼 들리지 않을까? 야, 솔직히 트로트는 성악에 비하면 알앤비랑 비슷하지. 그냥 파두(포르투갈 전통 음악. 트로트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라고 생각하면 거의 똑같아.”
재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노을이 니나 ‘파두’ 같은 마이너 장르까지 다 노래로 소화하지. 나나 환희 같은 평범한 종자들은 그런 건 안 된다구….”
“내 말이 그 말이야.”
“뭐?”
“아니 니들 말고. 강민정 같은 클래식 소프라노도 트로트는 동요처럼 부를 수도 있다는 거야.”
재호가 물을 쭈우욱 들이켰다.
“그럴 거 같지가 않다구. 너는 평소에 뮤지컬 안 보지?”
“딱히?”
“강민정이 무슨 뮤지컬로 떴는지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 그러고 보니 너! 클래식 말고 뮤지컬도 좋아하냐?”
그러고 보니, 재호는 매일 아침 요리할 때마다 클래식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는 했다.
합숙하던 시절 생각이 비로소 떠올랐다.
“뭐 뮤덕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꾸준히 보는 편이지. 그래서 알게 된 거야.”
“뭘?”
“강민정 배우 출세작 ‘어우동’이 신파 오페라야. 뭐 말이 신파 오페라지 그냥, 트로트 뮤지컬이라 보면 돼.”
“어이쿠.”
“심지어 그걸 기가 막히게 소화해서 트로트 디바로 전직할 뻔했데.”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기 시작했다.
“자,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 이번에는 우리가 소화할 수 없는 장르가 미션 곡이야. 근데, 우리 바로 전 순서인 가수는 그 장르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게다가 가창력은 압도적이란 사실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야.”
재호가 말을 덧붙였다.
“그 사람이 얼마나 굉장한 가수인지는, 지금 우리가 직접 보고 있구.”
“하하, 망했네.”
그때, 무대 복귀를 요청하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내가 재호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 가자. 여튼 이렇게 됐으니 뮤지컬이라도 즐기자구. 너는 나랑 달리 뮤지컬 자주 본다며?”
* * *
보통 뮤지컬은 2막이 1막보다는 힘이 떨어지는 게 국룰이거만, 이번 공연에서는 2막이 더 굉장했다.
1막에서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던 신데렐라 스토리의 재해석은 끝이 났다.
강민정이 분한 신데렐라는 1막에서 이미 유리구두를 신고 왕자의 아내가 되기를 거부하고, 대신 마녀로 각성하여 하늘을 날아올랐다.
2막은 왕국군과 마녀의 대결이 주 내용이었다.
점점 더 갈등이 커지고, 그에 맞춰 1막에서 이미 나왔던 노래들이 변주되고, 또 합쳐졌다.
정점은 왕궁 앞에서 벌어진 왕자와 마녀의 대결이었다.
무도회에서 사랑에 빠졌던 두 연인이 서로의 목숨을 뺏으려 달려드는 그 순간, 놀랍게도 왕자가 그녀에게 반지를 건넸다.
자신의 꿈은 누군가의 주부가 되는 것이라며, 자신이 지켜주고 보살펴 주겠다며 절절하게 고백했다.
당황한 신데렐라는 이윽고, 그 반지를 받아들이고 기쁨의 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성량이었다.
‘2막 마지막… 거의 3시간에 가깝게 노래하고 연기하고 소리쳤는데도 아직까지 이 정도 파워가 남아 있었다고?’
여러모로 굉장한 경험이었다.
* * *
무대가 끝나고, 넵튠 한에게 잠시 인사하러 대기실에 들렀다.
배영웅 매니저가 웃으며 말했다.
“넵튠 아티스트님은 후배들 오는 걸 정말 좋아하세요. 비원더 같은 화제의 가수면 더 좋겠죠? 다른 배우들 사이에서 체면 좀 세워 주세요.”
환희가 손사래를 쳤다.
“에이, 넵튠이 훨 대단하져! 벌써 몇 년째 아시아 스타인데여!”
배영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만, 제 담당이라서가 아니라 요새는 비원더가 더 대세에요. 음방 1위까지 했잖아요? 사실 요새 광고 제안이 너무 많은데, 글로벌 비전 때문에 다 거절하고 있습니다. 거절이 제 주 업무일까 싶은 정도예요.”
“빨리 우승하고 광고 많이 찍어요 횽들! 덤으루 돈도 좀 받구.”
환희 말을 웃어넘기면서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방 하나에 주연 배우들이 함께 대기실을 쓰고 있었다.
워낙 화장과 의상 체인지가 잦아서 이렇게 쓰는 모양이었다.
넵튠 한이 우리를 보더니 반갑게 멤버들 모두와 악수했다.
“어 왔어? 미리 말하고 오지 그랬어. 그럼 뒤풀이라도 초대했을 텐데.”
재호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에이 아닙니다. 저희가 참여한 것도 아닌데요. 너무 좋았구요… 선배님, 사실 저는 이 공연 몇 번 봤거던요, 역시 막공이라 그런지. 이번이 제일 좋았던 거 같습니다.”
넵튠이 웃으면서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래? 그렇게 좋았나? 크음!!”
“너무너무요! 마지막에 노래 10초 더 끈 건 애드립이었나요?”
“아 그건 민정이가 하자고 제안한 건데. 민정아 어딨니?”
내가 당황해서 외쳤다.
“아! 안 부르셔도… 아이쿠!”
하지만 이미, 메이크업을 다 지우고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강민정 배우가 우리 앞에 서 있었다.
껑충 큰 키에, 고혹적인 얼굴이 강민정임을 나타내고는 있었지만, 안경을 끼고 츄리닝을 입으니 사뭇 사람이 달라 보였다.
강민정이 퉁명스럽게 넵튠에게 말했다.
“제가 하자고 한 건, 그러면 더 감정이 고조될 거 같아서였어요. 평소에는 목을 아껴야 하지만 오늘은 막공이니까.”
“그렇긴 하지. 어? 벌써 옷 갈아입었어? 그런 차림으로 뒤풀이 가려고?”
“조금 피곤해서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넵튠이 나가는 강민정에게 대고 말을 툭 내뱉었다.
“아, 후배들 소개해주려 그랬는데. 비원더라고. 너는 잘 모르나? 하긴 클래식 말곤 모른댔지?”
나가던 강민정이 뒤를 돌아 우리를 뚫어져라 관찰했다.
“비원더라고요…?”
‘아무래도 우리랑 같은 조인 걸 아는 것 같은데?’
나와 재호 환희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민정의 시선을 피했다.
강민정이 싱긋,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수했다.
“반가워요. 이것도 인연인데, 언제 식사라도 같이해요. 선배, 같이 약속 잡아주세요. 언제든 괜찮아요. 가능한 빨리.”
넵튠이 놀란 듯 움찔하며 말했다.
“진짜? 네가? 웬일이냐. 네가 약속도 잡자 그러고. 뒤풀이도 째는 애가.”
강민정이 찌릿, 눈빛을 보내자 넵튠이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뭐 그래.”
강민정이 나가자 넵튠이 우리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쟤가 원래 좀 그래. 뮤지컬, 클래식계에만 있다 보니 좀 딱딱하달까? 특이한 거지 악의는 없으니 니들이 이해해라.”
내가 넵튠과 시선을 맞추며 대화를 시작했다.
“저, 사실 선배, 저분이 저희 글로벌 비전 예선 다음 상대입니다.”
“뭐? 민정이도 알까?”
“아마도요. ‘비원더’라는 말을 듣고는 눈빛이 변하시던데요.”
넵튠이 머리를 긁적였다.
“뭐어… 안다면 상관은 없겠지? 그래도 좀 불편한 자리가 되지 않을까?”
내가 넵튠에게 의문점을 물었다.
“근데, 선배. 강민정 저분이 그리 대단한 분인가요? 선배님이 되게 불편해하시고 배려해 주시는 듯한데.”
질문은 넵튠에게 했지만, 넵튠이 대신 대답했다.
“넵튠 선배도 최고 스타지만, 강민정 선배는 뮤지컬에선 별 중의 별이니까. 게다가 한국대 성악과 출신이니 클래식에서도 성골. 뮤지컬계에서도 20대 초반부터 최고의 연출가들이 선호하는 디바로 일찌감치 자리 잡았으니 성골. 누구나 불편할 수밖에 없다구.”
넵튠 선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의의 의미로 눈을 감아 보였다.
내가 넵튠 선배에게 물었다.
“원래 저분은 약속 잘 안 잡나 보네요?”
“그래. 저래 봬도 나쁜 애는 또 아니야. 연기에는 진지하고. 근데, 뭐 니들이랑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려는 건 아니겠지? 왜 만나자는 거야?”
“먼저 상대가 만나자고 하는데, 피할 수는 없으니까요. 최대한 빨리 시간을 잡죠.”
배영웅 매니저와 시간을 조율한 끝에, 바로 가장 빠른 시간대, 내일 오전 브런치를 같이 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넵튠 한과 함께 강민정이 예약한 호텔 커피숍으로 향했다.
강민정은 선글라스를 낀 채로 룸에 매니저와 함께 앉아 있었다.
우리를 본 그녀가 눈짓으로 매니저를 내보냈다.
나도 배영웅 실장도 바깥에 대기하시라 부탁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강민정이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세 분은… 음악이 뭐라고 생각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