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배영웅 매니저가 운전한 차를 타고 앞으로 우리가 합숙할 숙소로 향했다.
차에서 나오고 보니, 매우 익숙한 풍경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내가 배영웅 실장에게 물었다.
“저희, 새 숙소로 가는 거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맞습니다.”
“여기는 녹음실인데요?”
매번 가던 양재동 녹음실 앞이었다.
배영웅 실장이 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했다.
“여러 곳 뒤져봤는데요. 어차피 여러분들, 연습만 할 거잖아요? 연습실 근처가 제일 좋더라고요. 보통 녹음실에서 연습하시니까, 녹음실 옆 저택을 구했어요.”
“사셨나요?”
“설마요! 빌렸습니다. 1년만요.”
나뿐만 아니라 재호, 환희 모두 깜짝 놀랐다.
“1년씩이 나요?”
배영웅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왜 놀라세요? 저희 우승할 거잖아요. 9개월은 넘게 써야죠. 자 들어오세요. 비번은 알기 쉽게 권노을 군 생일입니다.”
삐빅! 0410 번호를 누르고 바로 방으로 들어왔다.
바로 옆집이라 그런지, 녹음실과 집 구조가 거의 비슷비슷했다.
환희가 방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횽들! 여긴 다 독실이에여! 방이 3개나 있다구여.”
재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봤어.”
“여기, 욕실도 개 쩔어요. 막 대리석 깔려 있구. 무슨 엔간한 침대만 한 욕조에서 거품이 나온다구요!”
“봤다구.”
“예전에 오디션 때보다 집이 두 배는 커진 거 같은데에~.”
나와 재호 모두 환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자, 환희가 손을 위로 쳐들며 시위했다.
“왜 횽들은 이렇게 리액션이 없어요? 안 좋아여?”
재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런 걸 생각할 기분이 드냐? 오늘 합격 발표 날이잖아.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인데, 아직 발표가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
나도 재호와 마찬가지로, 합격 여부에 온 신경이 쏠려 있어 숙소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핏 봐도 훨씬 좋은 집이라는 건 이해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잠자코 냉장고에 식재료를 넣으며 우리 대화를 관망하고 있던 배영웅 매니저가 슬쩍 말을 얹었다.
“환희 아티스트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어차피 고민한 들 바뀌는 것도 없으니까요. 음식이라도 해드릴까요? 요리하시는 재호 아티스트님 생각해서 조리기구도 좋은 걸로 가져다 뒀는데요.”
재호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말했다.
“제가 할게요. 자꾸 잡생각이 들어서 안 되겠어요. 뭐라도 해야지.”
환희는 촐랑촐랑 방을 돌아다니는 걸 멈추고는 소파에 등을 붙이고 쓰러지듯 앉았다.
이전에 ‘슈퍼스타 T’에서는 소파도 없어서 그냥 바닥에 앉았어야 했다.
이제는 소파도 그냥 소파가 아닌, 딱딱한 느낌이 나는 대신 인체공학적인 디자인까지 신경 쓴 최고급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런 좋은 환경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1차 예선 합불 여부가 아무래도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환희가 갑자기 소파에서 불쑥 일어나더니, 뜬금없이 푸쉬업을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재호는 아무도 음식을 먹을 생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묵묵히 요리를 시작했다.
내가 재호에게 물었다.
“너는 야식 안 먹잖아? 나 밥 생각 없는데?”
“그냥 하는 거야.”
한숨이 나왔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두 사람에게 대안을 제시하기로 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연습이나 하자.”
재호와 환희의 시선이 내게로 왔다.
“뭐?”
“네 횽?”
“요리하고 운동하고. 그런다고 뭐가 돼? 차라리 노래 연습이나 하자고. 차라리 노래 연습을 하면 합격한 다음에는 도움이나 되잖아?”
“끄응… 그럴까?”
“그러죠.”
우리는 바로 배영웅 매니저와 함께 연습실로 향했다.
배영웅 말대로 집 옆이 연습실이니 이런 좋은 점이 있었다.
아침형 인간인 나와 재호가 예외적인 거지, 보통 밤 9시면 한창 뮤지션이 움직일 시간대다.
그래서였을까?
우리가 갔을 때 녹음실은 굉장히 북적거렸다.
“TYB에서 녹음을 하고 있는 모양이네.”
환희가 손가락을 가리켜,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향했다.
“저기 누가 있는 데여?”
그곳에는 김종윤이 서 있었다.
‘아 이런….’
김종윤은 녹음실 남직원에게 찍찍 반말을 하고 있었다.
“뭐 이 정도 시설 가지고 1프로당 그렇게나 쳐 받아? 요새 프로당 4만 원 하는 데도 많은데.”
직원이 화들짝 놀랐다.
“4만 원이요? 여기는 그런 곳과는 시설이….”
“다르다고? 뭐가 달라? 춤추는 애들이나 좀 쓰는 거지. 장비도 별거 없구만. 진공관도 안 쓰고. 죄 디지털인데 뭔 값이 비싸? 댄스하는 곳이라 소울을 모른다니까.”
‘아직까지 진공관 써서 녹음하는 게 더 호들갑 아닌가? 게다가 TYB 메인 스튜디오는 심지어 선생님 고집으로 진공관 아직도 쓰던데.’
별별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꾹 참았다.
내가 슬쩍 애들에게 귓속말했다.
‘야 귀찮아지기 전에 가자 가자.’
‘그래요 횽.’
우리가 뒤돌아서서 가려 할 때였다.
하필 우리를 발견한 남직원이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아! 저기 비원더 분들이 계시네요! 발라드 가수도 저희 녹음실에서 녹음하십니다. 저분들이 이 녹음실만 쓰시거든요!”
보통 기획사 직원들은 불편해질까 봐 소속 연예인을 잘 부르지 않는데, 하필 또 성격이 E인 남직원이 걸렸다.
입술을 꽉 깨물고는, 최대한 미소를 가장한 채로 뒤돌아서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대기업 입사한 덕에 음방 1위도 하신 분들 아니세요. 녹음실 좋네! 역시 기획사가 어거지로 1위 만들어 줄 만해! 우리같이 음악에 대한 사명감만 가지고 노력하는 인디들은 이런 맛이 없다니까?”
‘참 나, 이럴 때만 인디냐? 니네 기획사 꽤 큰 데잖아?’
물론 입 밖으로 그런 말을 내뱉진 않았다.
…대신 환희가 해버렸다.
“예정 엔터테인먼트도 겁나 큰 데 아니에여? 그 조폭이 하신다는 읍!”
듣고 있던 배영웅 실장이 환희 입을 급하게 막았다.
“하하…. 오해입니다 오해. 그렇죠?”
김종윤이 더욱 목소리를 돋우며 소리쳤다.
“조폭? 뭐 조폭? 그거 TYB의 공식 성명이라 봐도 되죠? 사장님한테 말해줘야겠네.”
김종윤이 빈정대며 핸드폰을 꺼내 들어 보였다.
재호가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무미건조한 톤으로 말했다.
“정의로운 인디 투사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발표한 싱글 말인데요.”
“아 ‘소낙비’. 들어봤어? 의외네. 그런 고급스러운 곡도 듣고. 아니, 잘했어. 인디가 한 곡 쓰려면 얼마나 힘든지 알어? 직접 곡 써야지. 자비로 녹음해야지. 휘리릭 대충 휘갈기면 전문가들이 만져주는 니들하곤 아예 다르다고.”
내가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니가 무슨 인디야. 예정 엔터는 TYB만큼 커! 아니, 배우까지 치면 더 크지! 진짜 인디들이 울겠다 울겠어.’
“자아알 들어봤죠. 일본 밴드, 치토세 아이의 곡이 떠오르던데요?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던가?”
‘치토세 아이’라는 말을 들은 김종윤의 표정이 사색으로 변했다.
“어디서 그걸…!”
“일본 음악 듣는 사람들 중 치토세 아이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가사도 심지어 거의 번역 수준이던데. 후렴에 핵심 단어 ‘Forever My Love~’란 가사도 똑같구. 놀. 라. 운. 우. 연. 이. 네. 요.”
김종윤이 주먹으로 벽을 쾅! 하고 쳤다.
“어딜 감히!”
직원이 김종윤을 막았다.
“벽을 치시면 안 됩니다!”
김종윤이 직원 손을 뿌리쳤다.
“시끄러워! 야, 너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재호가 차갑게 빈정댔다.
“한 곡 정도면 우연이라 그랬을 거예요. 밴드에서 나간 뒤로 발표한 곡마다 다 치토세 아이 곡과 비슷하던데요. 한 번 제가 TYB 홍보팀 통해서 고려일보 연예부에 해당 내용 뿌려 볼까요? 어떤 반응이 나올지?”
“이놈이….”
김종윤이 이를 꽉 아물더니 말했다.
“쳇! 역시나, 작곡가 놈들이 다 그랬던 모양이네. 돈 좀 주면서 잘 써보라 시켰더니만. 이래서 이 나라는 안 된다니까. 데이빗 페스토 같은 선진국 사람이랑 놀아야 해. 이 나라 사람들은, 구려. 댄스 아이돌이나 쳐들어서 그런가?”
환희가 말을 끊었다.
“언제는 자기가 곡 다 쓰는 인디정신이라면서여.”
배영웅 매니저가 슬쩍 덧붙였다.
“김종윤 님은 SKN 이사분이랑 친분이 있으시죠? 유독 SKN에 출연이 잦으시더라고요? 거기 방송으로 성공하셨던데. 그 이사분 집에 사신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설마 아버지라던가?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요.”
김종윤이 째릿! 하고 우리를 째려봤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더니 짐을 쌌다.
“아 더럽네 더러워. 대형 기획사의 횡포란 이런 건가? 도저히 압박을 이길 수가 없어서 돌아가야겠네.”
내가 한마디 보탰다.
“아니 본인이 직접 제 발로 왔잖아요.”
아무리 봐도 애초에 우리에게 시비를 걸려고 일부러 우리 녹음실에 찾아온 걸로 보였다.
김종윤이 내게 삿대질을 해댔다.
“하지만! 글로벌 비전이라면 다르지. 수준 있는 서양 심사위원이라면 인디 정신의 가치를 알아줄 거다 이 말이야. 대형 기획사 아이돌 따위, 미국 가면 다 버블팝이야. 초딩이나 듣는 거라고.”
내가 대답했다.
“아이돌이 나쁜 거도 아니지만. 일단 비원더는 아이돌이 아닌데요.”
“다 똑같애. 록 스피릿과 인디 정신을 존중하는 글로벌 스케일에 당해 보라구. 아주 짜릿할걸?”
내가 쏘아붙였다.
“인디 인디 하지 말고. 예정 엔터가 무슨 인디예요. TYB보다 큰 소속산데 왜 이리 약한 척을 해요? 진짜 라면하고 김밥만 먹으면서 음악하는 인디들은 울겠네.”
“뭐 인마?”
한창 나와 김종윤이 설전을 버리고 있는데, 갑자기 배영웅이 내 옆으로 다가와 나를 제지했다.
“잠시만요.”
“왜요 실장님?”
배영웅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합격 여부 안내 메일이 왔어요.”
* * *
글로벌 비전 1차 예선 녹음 현장.
이윤강 PD가 사정사정해서 론을 무대 바깥으로 멀찌감치 보냈다.
심사위원들은 한참 물을 마시며 명상을 한 뒤에야 비로소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심사를 시작했다.
이스트 웨이브가 기지개를 켜며 운을 뗐다.
“그래! 어디까지 했더라? Right! (맞아!) 쿨키드 팀이었지. 비원더. 바네사의 의견을 아직 못 들었는데.”
눈을 지그시 감았던 바네사가 살짝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안기고 싶어졌어.”
로메로가 되물었다.
“뭐?”
“안기고 싶어졌다고. 저 노엘이란 친구한테. 그게 내 합격 콜이야.”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윤강 PD의 정신이 대략 멍해졌다.
‘나는 동방예의지국 조선의 국모… 아니, PD라고! 이런 말을 대체 어떻게 편집하냐고! 미국 애들은 이런 거 좋아하나! 아오!’
벙 찐 표정으로 있던 이윤강 PD를 바네사가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뭐해요 PD? 셋 다 오케이 했잖아. 합격 처리시켜요.”
“아 네네!”
“그리고 이 탄산음료 좀 저기 갖다 버리고. 나 맹물 좀 줘.”
그러면서 바네사가 휙~ 탁자 앞에 놓여져 있는 스폰서 음료 민티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캔은 정확하게 쓰레기통 안에 명중해 땡! 하고 청량한 소리가 났다.
솔직히, 스폰서에 시달렸던 이윤강 PD 입장에서는 통쾌했다.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스폰서 쪽 끄나풀인 론이 ‘그건 안 돼!’라고 빽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제2차전이 발발했다.
이윤강 PD는 그 후로도 몇십 분간 바네사와 론의 싸움을 진정시키느라 온 시간을 다 썼다.
‘아이고야… 그래도 다행이다 권노을. 최초 합격자야!’
하지만 대회는 이제 시작일 따름이었다.
다음 미션은 비원더에게 더욱 혹독한 미션이 될 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