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권노을은 메인보컬이라 후렴만 부르는 거 아니었어?’
이윤강 PD의 생각과는 달리, 시작부터 권노을이 노래의 포문을 열었다.
[나에게 너는 공주야.
너를 구하러 가는 길이야.
가는 걸음걸음마다
고블린이 나를 쫓아요.
하지만 나는 달려가요
너를 구하기 위해서니까]
심사위원을 배려해 영어로 씌여진 가사였다.
용과 공주를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동화 같은 이야기를 담았다.
‘잔잔하고 일반적인 도입부야. 근데 뭔가 달라. 이 느낌은 대체 뭐지?’
원래 권노을은 ‘비원더’라는 팀에서는 도입부를 맡지 않았다.
워낙 강력한 고음이 특기다 보니, 저음의 도입부는 다른 두 멤버의 몫으로 남기고 후렴과 하이라이트 부분을 전담했다.
이번 곡에서 권노을은 평소와는 달리 고음 파트가 아닌 도입부를 불렀다.
담담한 중저음 파트임에도 권노을의 노래는 왠지 자극적이었다.
차이는 ‘발음’에 있었다.
권노을은 각 가사의 마지막 부분, 운율을 넣어 만든 파트들을 일부러 약간 어긋나게 발음해서 자신만의 리듬감을 만들고 있었다.
자기만의 감정과 발음으로 해석했기에, 그냥 툭툭 내뱉음에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었다.
이전까지의 권노을과는 또 다른 차원의 노래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렇게 점차 운율이 쌓이면서 이윤강 PD의 눈앞에, 점점 한 장면이 영화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 속 왕자는 이윤강 자신이었다.
왕자는 칼 한 자루, 초라한 망토 하나만 가진 채로 하염없이 고블린이 가득한 늪을 건너고 있었다.
고블린을 베어 넘기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공주 생각뿐이었다.
“어!”
이윤강 PD가 눈을 깜빡였다.
마치 잠깐 잠든 것처럼 노래에 완벽하게 몰입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다양한 음악 예능을 했던 이윤강 PD도 처음 느끼는 경험이었다.
마치, 노래를 듣는 게 아니라, 영화를 보듯 장면이 그려지는 노래였다.
심지어 지금까지 음악은 뒷전이고, 스태프를 닦달했던 론마저도 권노을의 노래에는 뭔가를 느낀 듯, 말을 멈췄다.
“칫.”
론은 얌전히 스태프 뒷자리로 넘어가서는 눈을 감고 노래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노래는 이제 도입부를 넘어 중반부로 넘어가고 있었다.
원재호의 파트였다.
원재호는 언제나처럼 흔들림 없이 중반부를 소화했다.
[마침내 찾아온 용의 둥지.
그곳에는 널 뺏은 용이]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B 파트부터 과감하게 코러스 화성이 나온다는 점이었다.
여성 코러스가 양념처럼 들어가, 노래에 감칠맛을 더했다.
복잡한 화성의 화음이 쌓이면서 점점 감정이 고조됐다.
마치 정말 용과 싸우는 듯한 웅장함이 느껴졌다.
이윤강 PD는 손에 힘을 꽉 주며 생각했다.
원재호도 정말 뛰어난 보컬이다, 다만 세계 최정상급 보컬인 권노을과 같은 팀일 뿐이다, 라고.
화음과 함께 피아노 연주가 점점 격렬해졌다.
워낙 풍성해서, 피아노 하나만 있는 노래라 느끼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를 인식했을 때는 이미, 곡이 후렴으로 온 뒤였다.
후렴은 뜻밖에도 주환희가 맡았다.
‘의외네. 비원더에서 그나마 보컬이 가장 평범한 멤버는 주환희라 생각했는데.’
비원더는 밸런스가 좋은 팀이었다.
노래로 정점을 찍고 있는 권노을을 필두로, 작곡과 프로듀싱을 맡은 두 멤버가 보좌했다.
그럼에도 보컬만으로 보면 세 멤버 중 주환희는 무게감이 좀 부족하다 생각해왔다.
실제로 ‘슈퍼스타 T’ 오디션 성적도 주환희가 가장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환희의 후렴을 들으며 탄식에 가까운 감탄이 나왔다.
‘이게 내가 알던 주환희의 노래 맞나?’ 싶을 정도였다.
[우린 둥지로 떠나요
당신을 구하기 위해
용의 던전에 들어가요
다시 만나기 위해
언~ 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다시 한번 만날 수 있기를]
주환희의 목소리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단단한 알맹이가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이전보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멋들어진 하이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게다가, 맑고 고운 미성의 목소리를 거칠게 긁으며 부르며 생긴 오묘한 부조화가 더욱 귀를 즐겁게 했다.
이윤강 PD는 주환희의 노래가 이 수준에 오를 때까지 권노을이 어떻게 주환희를 단련시켰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 * *
노래는 순식간에 클라이맥스로 이어졌다.
용을 물리친 용사는, 용의 소굴로 뛰어들어 공주를 구하려 한다.
황당하게도, 성에는 공주가 100명도 넘게 있었다.
[공주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어.
세상에는 공주가 많았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공주를 찾는 방법을 찾을 수 없죠]
수많은 공주 중에서, 나의 공주는 용을 물리친 이유가 되어줬던 처음에 그 공주밖에 없었다.
이를 깨달은 주인공은, 다시 확신에 찬 모습으로 내 공주를 찾는다.
권노을의 보컬이 거칠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용의 피를 너무 많이 뒤집어쓴 나는
오 세상에 용이 되어버렸어요.
너를 다치게 할 수도 있어요.
이대로 너를 두고 떠나야 할까.]
권노을의 노래를 듣던 이윤강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권노을은 이번 곡에서 단 한 번도 고음을 담당하지 않았다.
오직 중저음 파트만 불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저음에서의 묵직한 떨림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감정의 파고를 보여줬다.
이건 또 하나의 놀라운 경지였다.
점차 코러스가 점층적으로 쌓이면서 곡이 점점 고조되었다.
주환희의 고음이 하늘을 갈랐다.
피아노 반주 또한 마이너 키로 넘어가, 점차 광시곡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일렁였다.
[그런데 너는 갑자기 내 앞으로 와서
내 칼을 뺏었지요.
그 칼을 휘둘러 내 가슴을 찔러요.
피조차 나오지 않게 깨끗하게요.
그대를 보는 내 눈이 흐려져요.]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로 시작한, 동요 같은 노래가 설마 새드엔딩으로 끝난다고?’
이윤강 PD는 머리로는 그럴 리가 없다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새드엔딩이 돼버릴까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만큼 비원더 3인은 압도적인 몰입감을 보여줬다.
갑자기 피아노가 전조하면서 급격하게 장조 분위기로 바뀌었다.
장송곡처럼 우울하게 깔리던 코러스도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먹구름이 사라지고 파란 하늘이 뜨듯, 기쁨으로 가득 찬 코러스가 스피커를 뚫고 쏟아져 나온다.
[마침내 칼에 찔린 나는 비닐이 벗겨져
인간의 모습으로 네 앞에 설 수 있게 됐어.
오직 너만이 나를 돌릴 수 있었어.]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의 마지막, 최후의 후렴으로 노래는 도달했다.
[우린 둥지를 떠나요
당신이 나를 구했기에
용의 던전에서 나와요
우리 미래를 위해
지금이
순간이 영원히 남기를
영원히 함께할 수 있기를]
마지막은 잔잔한 권노을의, 독백에 가까운 저음으로 끝이 났다.
[나에게 너는 공주야.
너를 구하러 가는 길이야.
어쩌면 네가 나를 구할 수도.]
피아노가 여운이 남는 한마디 연주로 장중하게 곡의 문을 닫았다.
노래가 끝났음에도, 한참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차!’
그제서야 이윤강 PD는 이 노래가 오늘 처음으로 심사위원이 끊지 않고 끝까지 들었던 노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장 직원을 시켜서 ‘피드백 요청’ 사인을 보냈건만, 심사위원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침내, 참았던 숨을 ‘파하!’ 하고 내쉬면서 이스트 웨이브가 말을 꺼냈다.
“웰컴, 파이어 키드.”
심사위원장 바네사가 고개를 들어 이스트 웨이브를 빤히 쳐다봤다.
“파이어 키드? 그게 누구야?”
“이 곡, 내가 아는 사람이 불렀어. 도입부 부른 친구. 내가 만난 적 있어. 내 이번 앨범 타이틀곡 피처링도 해줬고. 기대되는 친구야.”
바네사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맥이야?”
“이런 가수를 대회에 영업한 나한테 감사하기나 해. 노래 안 들어봤어? 뭐… 내 기억보다도 훨씬 늘긴 했지만. 벽을 뛰어넘었군 이 친구. 역시 퐈이어!”
‘그렇지!’
이윤강 PD가 기뻐서 손가락을 몰래 튕겼다.
지금껏, 저 건방진 심사위원들은 한국의 레전드 가수들을 무슨 동네 학예회 참가자 마냥 무시했었다.
드디어 그들을 놀라게 해주는, 그런 한국 가수가 등장했다.
1도 없던 애국심이 생겼다.
국뽕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척추를 타고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심사위원장 바네사가 손을 깍지 끼고 위로 올리면서 스트레칭을 하며 코멘트했다.
“확실히- 오랜만에 긴장감 있는 노래였어. 영어 가사인 거도 좋았네? 아무래도 발라드처럼 감정을 전달하는 노래는 번역하면 맛이 떨어지니까.”
이스트 웨이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롸이트! (Right! 맞아) 아무리 우리가 엑조틱 한 걸 좋아한다 그래도 민속악기 같은 걸 팝 오디션에 가져오면 곤란하지. 편안하게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구.”
가만히 침묵을 지키며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미스터 로메로가 슬쩍 말을 얹었다.
“그 친구 이름이 뭐지? 도입부 부른 친구.”
이스트 웨이브가 미스터 로메로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 퐈이어 키드? 노엘이야 노엘.”
“노엘… 이 친구는 좀 재미있네. 내 머리카락이 오랜만에 발딱 섰어.”
바네사가 로메로를 가엾게 쳐다보며 코멘트했다.
“로메로… 네가 머리카락이 어딨어.”
“시꾸랏!”
로메로는 누가 봐도 가발인 자기 머리를 과장되게 살랑살랑 흔들며 권노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친구. 고음은 아예 부르지 않았어. 다른 친구들에게 양보한 거지. 하지만 고음을 못 해서가 아니야. ‘이 정도면 첫 곡은 충분하다.’라는 자신감이야. 안 그러냐 이스트?”
이스트 웨이브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 친구만 한 고음을 가진 테너는 미국에도 한 손가락을 꼽을랑 말랑이야. 퐈이어 고음이라구 퐈이어!”
로메로가 큭큭대며 웃었다.
“나야 노래는 아예 못 하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지. 일부러 힘을 숨기고 있네. ‘다음에 내가 무슨 노래를 할지 궁금하지?’라는 느낌이랄까. 건방져. 그 건방짐 마음에 좀 드네.”
이스트 웨이브가 시선을 바네사에게로 돌리며 말했다.
“나도 동감이야. 이 친구들 실력은 내가 알지. 코러스랑 중저음 맡은 친구가 편곡을 하는데. 이 친구도 쿨가이야. 편곡 잘하지. 이 곡은 역발상으로 피아도 딱 한 대로 오케스트라 같은 효과를 냈군. 끝까지 다른 악기를 안 넣고 퓨어한 소울을 표현해서 나는 만족했어. 바네사 너는 어때?”
바네사는 눈을 그윽하게 감고는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두 사람이 이리 띄워주는데, 내 의견이 중요하겠어?”
로메로가 손을 깍지를 끼고, 꼬았던 다리를 풀며 바네사에게 시선을 맞췄다.
“별론가 봐?”
이스트 웨이브도 턱을 장난스럽게 가로로 도리도리 돌리며 말을 걸었다.
“그러게, 여왕님께는 별거 아니었나 보지?”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바네사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을 깬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컷!”
광고 스폰서의 끄나풀 론이었다.
이윤강이 저도 모르게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 왜!’
론이 음료수 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긴장감 넘치는 게, PPL 하기 딱 좋은 분위기인데, 민트 한 잔 마시고 갑시다.”
바네사가 버럭했다.
“나는 탄산 안 먹는다고! 매니저. 워터!”
이윤강 PD가 속으로 소리 질렀다.
“아 광고 이제 됐으니까 누가 합격했는지 빨리 알려 달라고오~. 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