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페스토의 입에서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단어가 나왔다.
“…스폰서의 마음에 들어야 하지.”
배영웅 매니저가 어젯밤에 해준 말을 떠올렸다.
[해외일수록 되려 스폰서의 힘이 크고, 그중에서도 글로벌 비전만큼 큰 무대는 더더욱 스폰서가 좌지우지하더군요.]
데이빗 페스토 또한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글로벌 비전은 전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음악인이 한곳에 모여서 대결하는, 말도 안 되게 큰 행사지. 당연히 방송사 한곳의 자본만으로는 무리야. 스폰서가 중요하지. 심사위원보다 스폰서의 입김이 더 클 수밖에 없어. 스폰서들이 싫어하는 가수가 높은 순위에 드는 경우는 없지.”
내가 되물었다.
“점수를 주는 일은 심사위원의 일이지 않습니까? 심사위원들이 자기 점수를 일부러 스폰서 취향에 맞게 바꾼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건 아니지. 하지만, 다들 스폰서의 의중을 알고 있네. 그들의 의견은 알게 모르게 심사위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그러니까 음악만으로 우승하리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작품상, 노벨상조차도 정치적인 안배가 들어가기 마련인 거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나는 이제 자네 팬이야. 스폰의 가호가 함께하길 기원하겠네.”
데이빗 페스토가 모자와 지팡이를 쓰고 나갈 채비를 했다.
김종윤은 부아가 치민 듯 언성을 높였다.
“무슨 소리야 영감! 나를 응원해야지. 고객은 나라고!”
“응원은 내 자유일세. 그렇지 어메이징 보이스?”
“고… 맙습니다?”
데이빗 페스토는 내게 가볍게 손 인사를 하고는 스튜디오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칫! 제길.”
김종윤이 나를 노려보며 질투 섞인 독설을 퍼붓고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엉거주춤 데이빗 페스토를 따라 스튜디오를 나갔다.
옆에서 모든 일을 같이 지켜보고 있던 재호가 탄식했다.
“야~ 뭐 이거 세계 수준의 음악 대회라더니만. 개판이네? 시작부터 스폰이냐?”
내가 재호에게 되물었다.
“큰 대회잖아? 그럼 큰 자본이 투입되니까 자본에 휘둘릴 수밖에 없지. 이미 우리는 호랑이 등에 탄 거야.”
“더러우면 중이 절을 떠나라 이거냐?”
“일단은 음악 외적인 문제는 우리 스태프를 믿어봐야지. 그건 우리 몫이 아니잖아?”
뒤에서 키미 프로듀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노을 군 말에 동의해요. 걱정한들 소용없어요. 누군들 알겠어요? 그냥 스폰서의 PPL 요구만 잘 따르면 돼요.”
내가 뒤를 돌아 키미에게 물었다.
“PPL이요?”
* * *
‘슈퍼스타’ 시리즈로 우뚝 선 한국 제일의 음악 예능 PD 이윤강.
그 경력을 인정받아 이번에는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의 한국 예선 PD 외주 제작을 담당하게 되었다.
‘세계 최고 오디션에 참여한다니까 처음에는 좋았는데, 이게 참 귀찮은 게 너무 많네. 특히 스폰서가 너무 갑질하는데? 이게 문화 차이인가?’
이윤강 PD가 혀를 쯧쯧 찼다.
지금 이윤강 PD는 예선 심사 과정을 찍는 중이다.
전혀 어려운 촬영이 아니었다.
심사위원들이 다 함께 참가자들의 데모 테이프를 하나하나 들어보고 합격 여부를 판정한다.
여기에, 한국 예능 특유의 감성을 담은 각 참가자의 사연을 담은 영상을 찍어 이어 붙이면 딱 각이 예쁘게 나왔다.
헌데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멀대같이 큰 키의 20대 샌님이 계속 직원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의 정체는 현장을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망치는 스폰서 측 중역 론.
말이 중역이지, 그냥 오너 아들이다.
스폰서 회사 이름은 ‘민티’였다.
콜라보다 달지만 칼로리는 0이라는 놀라운 캐치 프레이즈가 인상적인 다이어트 음료였다.
문제는 론이 이 민티를 노출시키려 온갖 꼴값을 다 떤다는 점이었다.
“이봐. 왜 촬영을 그렇게 해? 로고를 더 크게 잡으란 말이야. 이 스튜디오 다 누구 돈으로 짓는 건지 알아 임마?”
카메라맨이 똥 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네, 민티죠 민티.”
“그래. 쭉 쭉 쭈우우우욱~ 더 크게! 심사위원 저 자식 얼굴 보여줄 필요 없어. 더 크게!”
완전히 방송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론을 보며 이윤강 PD가 속으로 탄식했다.
‘저러려고 방송 인력을 죄다 영어 가능자로 섭외해달라 했나? 하나하나 자기가 꼬치꼬치 참견하려고? 이래서 무슨 방송이 돼?’
이윤강 PD가 바로 옆에 서 있는 ‘글로벌 비전’ 방송 메인 프로듀서에게 애절한 눈빛을 발사했다.
‘저 자식 이대로 계속 둘 겁니까?’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글로벌 프로듀서는 ‘놉’이라며 말하며 고개를 젓더니 세트 바깥으로 도망가 버렸다.
‘아니, 아무도 방송에 책임을 안 지나? 뭐 이따위야? 선진 방송을 배울 기회라고 생각했더니만, 아사리판에서 견디는 법만 배울 판이네!’
이윤강 PD는 마음속으로 욱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억지로 참고는 빽! 소리를 질렀다.
“자!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큐!”
카메라 정중앙에 심사위원 3명의 모습이 담겼다.
절로 캬아 하고 감탄이 나왔다.
그래, 이런 장면을 한번 담아보고 싶어서 글로벌 예선 연출을 맡았던 거였다.
제일 왼쪽에는 래퍼이자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힙합 프로듀서인 이스트 웨이브가 스냅백을 푹 눌러쓰고 앉아 있었다.
현재 빌보드 차트 탑 10중 4개 곡에 참여했다고 알려진, 그야말로 음악계의 마이더스의 손.
뚱한 표정에, 짙은 색 선글라스까지 껴서 묘한 카리스마를 풍겨내고 있었다.
이스트 웨이브가 손을 번쩍 들더니 PD에게 문의했다.
“저 여기. 간식은 언제 주나? 배고픈데. 단 걸루 부탁해. You know?”
“…….”
카리스마라는 말은 취소다.
그냥 먹보였다.
다음은 오른쪽에 앉은 미스터 로메로.
남미 최고의 음악 제작자였다.
특히 브라질 음악의 거두로서 수많은 명반에 관여한, 남미 음악의 대부였다.
그가 이스트 웨이브에게 근엄한 음성으로 나직하게 말을 내뱉었다.
“…뭐야 이스트. 내 머리를 자꾸 왜 쳐다보냐? 가발 아니냐고? 이건 자연모야.”
…다만, 자기 가발에 콤플렉스가 좀 있는 게 흠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운데에 앉아 있는 심사위원장이 또 대박이었다.
왕년 최고의 디바, TV로만 봤던 돌고래 고음의 소유자, 바네사가 올해 글로벌 비전의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그녀를 보자 이윤강 PD의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본인의 학창 시절을 책임졌던, 소위 ‘책받침 소유’ 가수였다.
그녀의 얼굴을 직접 방송에서 대면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게 후회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모니터를 확인한 바네사가 눈살을 확 찌푸리더니 이윤강 PD에게 경고했다.
“미스터 리.”
“네.”
“카메라 렌즈 좀 바꿔줘요. 지금 나 쪄 보여. 더 날씬하게 보이도록.”
“충분히 날씬해 보이는데요.”
그녀가 턱짓으로 이윤강 PD를 위협했다.
“바. 꿔. 줘. 요.”
“네네, 알겠습니다.”
속으로 이윤강 PD는 분통을 터트렸다.
‘와~ 진짜 내 생에 이렇게 스트레스받는 촬영은 처음이다! 글로벌 스타들은 꼴값도 글로벌 급인 건가?’
이윤강 PD가 꾹 참고, 렌즈를 특수 렌즈로 교체했다.
과연, 이렇게 하니 바네사가 더 마르게 보이긴 했다.
바네사가 OK 사인을 보냈다.
고생 끝에 드디어 녹화가 시작됐다.
바네사가 나머지 둘에게 룰을 설명했다.
“우리 항상 예선마다 했던, 그대로예요. 데모 테잎을 최소 1분, 최대 끝까지 듣고 셋이 모두 통과시키는 음악만 1차 예선 통과. 보결도 있고요. 알겠죠?”
다른 두 심사위원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윤강 PD는 오늘 녹화를 진행하면서 여러 번 놀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부분은, 심사위원들의 가차 없는 심사 기준이었다.
도대체 적당히가 없었다.
태반의 데모 테이프들이 최소 기준인 1분만 들은 후, 바로 폐기처분 되었다.
“왓! 이걸 음악이라고 내놓은 거야? 당연히 탈락.”
“너무 뻔한 곡이에요. 앞으로가 전혀 궁금하지 않네. 탈락.”
“이 기본이 안 된 전주는 뭐냐? 설마 내가 머리숱 적다고 나를 놀리려는 건가? 바로 탈락!”
이윤강 PD가 듣기에 깜짝 놀랄 정도로 유명한 명가수들이 모두 가차 없이 탈락 처리되고 있었다.
‘아니 한국 록 음악의 대부 신형철도, 아방가르드 음악의 거장 김윤부도, 싱어송라이터의 자존심 박영신도. 모두 이렇게 탈락시켜 버린다고?’
이게 세계의 벽인가 싶었다.
스태프가 또 하나의 데모 테이프를 재생했다.
시작부터 강렬한 50인조 이상의 대형 오케스트라 반주가 이윤강의 귀를 사로잡았다.
“오호?”
이후 등장한 목소리 또한 이윤강 PD도 잘 아는 가수의 것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가수 김종윤의 목소리였다.
그가 특유의 풍성하면서도 미성이 살아있는 목소리로 잔잔하게 분위기를 잡았다.
드디어 분위기가 잡혀가며 후렴으로 넘어가기 전의 B 파트로 넘어가려는 순간, 1분이 끝났다.
심사위원장 바네사가 둘에게 물었다.
“더 들어보죠?”
다른 심사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드디어 바네사가 오늘 처음으로 곡을 1분 만에 끊지 않고 음악을 계속 들었다.
이윤강 PD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야지!’
그도 한국 사람이었다.
한국 가수가 이보다는 더 좋은 취급을 받았으면 했다.
드디어 김종윤의 노래가 후렴으로 넘어갔다.
장중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김종윤 특유의 비음 섞인 고음이 울려 퍼지는 그 순간.
“아 왜 질질 울어요?”
심사위원장 바네사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만, 가차 없이 노래를 꺼 버렸다.
“페스토 영감 곡 같은데. 프로듀싱은 훌륭한데 가수가 망쳤군.”
“아쉬운데. 그래도 반주는 뷰티풀하니, 혹시 합격자 부족하면 꽂아 넣을 용도로 남기지?”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보결.”
이윤강 PD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 사람들, 아예 심사의 기준이 달랐다.
한국에서 최고의 가창력, 최고의 음악성을 갖췄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모두 가차 없이 탈락하고 있었다.
‘이게 한국과 세계의 수준 차이란 건가?’
절망적인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심사위원들 대화에 끼여 들어왔다.
“잠깐 컷! 자자 다들~. 민티 션~하게 한잔하고 가자고. 카메라 보고 치즈~. 최대한 맛있게 마셔들.”
스폰서 론이 갑자기 촬영을 멈추더니, 제멋대로 심사위원들이 민티를 마시는 장면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심사위원장 바네사는 완강히 거부했다.
“노! 나는 탄산 안 먹어요. 살쪄요.”
론이 반박했다.
“그게 포인트지! 이건 살 안 찌는 탄산이라고!”
“그걸 누가 믿어요?”
“민티를 안 마실 거면 대체 왜 우리 회사 스폰인 방송에 출연하는 거야?”
“그걸 말이라고….”
보다 못한 이윤강 PD가 둘 사이를 중재했다.
“자자! 그만하시고! 충분히 PPL 장면 찍으신 거 같으니까. 이제 슬슬 자기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제발!”
론이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을 유지한 채로 뒤로 돌아가 스태프 석에 다시 자리 잡았다.
‘아이고 두야… 이래 가지고 뭐 촬영이 되겠나?’
이윤강 PD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음 데모 테이프를 틀었다.
굉장히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신선했다.
‘외국인들 들으라고 국악 가야금 소리를 샘플링한 록 음악부터, 팔만대장경을 접목한 재즈,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대형 발라드까지. 온갖 자극적인 편곡만 듣다 피아노 달랑 하나만 있는 곡을 들으니 되려 신선한데!’
담백한 피아노 연주가 짧게 진행된 후, 바로 가수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윤강 PD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얘가 왜 도입부에 나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