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97화 (197/280)

제197화

배영웅 매니저가 차에 시동을 걸며 썰을 풀기 시작했다.

“한국처럼 치안이 좋은 곳이 없어요.”

“그 말씀은 설마….”

“전 세계적으로 음악계에는 아직 깡패가 많이 엮여 있죠. 클럽이라던가, 기획사라던가. 한국도 얼마 전까지 그랬어요.”

“…문루아 선배에게 위험한 상황이 있었나요?”

배영웅은 능숙하게 차를 운전하면서도 여유 있게 내 말에 대답했다.

“아직 가수까지 위험한 일이 생겼던 적은 없어요. 다만 그럴 뻔해서 대신 저나 스태프들이 좀 맞을 뻔했다거나… 그런 적은 있죠.”

나도 모르게 조금 언성을 높였다.

“그런 거는 회사가 지켜줘야 하는 거잖아요! TYB는 대형 기획사인데!”

“아티스트가 매니저를 걱정하다니. 눈물겨운 데요!”

“농담이 아니라, 그래서는 안 되지 않나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동안 칼을 간 건 저만이 아니에요. 선생님도 마찬가지죠. 회사도 그사이 많이 성장했습니다. 문루아 님이 미국에서 데뷔했을 때만큼 준비가 부족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현지 스태프 갑질에 너무 휘둘렸어요.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갈 필요는 없었는데요.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회사 이야기를 하는 사이, 서서히 배영웅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돌아왔다.

냉정, 침착한 배영웅의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잠시 한 템포 쉬면서 배영웅 매니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정리했다.

천천히, 단어를 골라가며 느릿느릿 배영웅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매니저가 아닙니다. 권모술수나 폭력이라니. 그런 건 전혀 몰라요.”

배영웅이 시침을 뚝 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아니요, 실장님과 선생님은 잘 아시죠. 다만 가수에게까지 그런 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뿐이죠. 아닌가요?”

배영웅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운전에만 집중했다.

내가 말을 이어갔다.

“음악 외적인 부분은 두 분만 믿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요.”

“맡겨만 주세요. 저, 제가 이상한 건 아니죠? 조금은 기대해 봐도 되는 거죠? 노을 군에게?”

내가 피식 웃었다.

“아무 기대가 없으면 뭐 하러 같이 하겠어요. 돈 보고? 아이돌 기획사 월급 다 아는데.”

배영웅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TYB는 그래도 대형이라 대우가 나쁘지 않아요. 게다가 저처럼 로드부터 임원까지 모든 일 다 하면 더 얹어 주죠.”

“아, 그럼 로드도 안 두고 대부분 직접 하시는 게 다….”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돈 때문은 아니죠. 내가 직접 해야 세 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현장에 남고 싶었어요.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순 없죠. 저도 나이가 있으니까.”

배영웅 실장의 나이는 모르지만, 10년 전 문루아와 같이 활동을 했다니 최소한 30대 중반 이상이었다.

사실 로드 매니저를 할 짬밥은 아니긴 했다.

“아마도 비원더가 제가 로드까지 담당하는 마지막 그룹이 될 겁니다. 아마 글로벌 비전이 제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요?”

내가 고개를 돌려 그에게 소리쳤다.

“그만두신다고요? 안 돼요! 나이도 있으신데 이제 와서 뭘 하시려고.”

“뭘 그만둬요? 그때부터는 비원더는 세계 최고의 그룹이 될 텐데. 저 혼자서 어떻게 스케줄을 감당하겠어요. 혼자서 커버치는 건 한국까지예요.”

“아….”

“우리, 기필코 우승하죠.”

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영웅의 소망까지 달고 달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기분, 왠지 싫지 않았다.

절대 지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하나 더 얻은 느낌이었다.

배영웅이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저, 아직 젊습니다.”

아, 예.

* * *

다음 날, 이번에는 아침부터 배영웅 매니저의 차를 탔다.

외부 스튜디오 방문 일정 때문이었다.

환희가 투덜거렸다.

“그냥 매번 했던 양재동 녹음실에서 작업하면 안 되는 거예여?”

재호가 고개를 저으며 환희의 말을 끊었다.

“안 돼 인마! 글로벌 비전이라구.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야지. 우리 녹음실은 아이돌 음악을 위해 만든 곳이야. 훌륭하지만 지금처럼 덜렁 피아노 하나 하구 목소리만 있는 곡을 만들기에는 영 어색하다구.”

내가 고개를 돌려 재호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럼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좀 다른 거냐?”

“다르지 다르지. 비전공장. 여기는 한국 발라드 녹음의 성지라구.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싱어송라이터 명작이 여기서 녹음됐어.”

그러면서 재호는 오창선 선배를 비롯한 수많은 발라드 가수의 명곡 제목들을 읊었다.

환희가 재호 말을 끊었다.

“네네 알아써여 뭔가 쩐다 이거죠? 가면 되겠네요 그럼.”

재호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니지. 꼼꼼하게 확인해 보고, 필요하면 계약할 거야. 아니면 말구.”

“뭐 알아서 하세여. 솔직히 뭐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지만여.”

확실히 여기서 재호와 환희의 취향이 갈렸다.

클래식으로 음악을 시작했고, 지금도 밴드음악을 기조로 다양한 음악을 활용하는 재호는 디테일한 사운드를 중시했다.

그에 반해, 힙합 기반의, 가사 위주의 알앤비를 하는 환희는 그냥 적당히 좋은 비트만 있으면 일단 찍고 보자는 주의였다.

둘 중 어떤 태도가 더 바람직할지 골똘히 생각 중인 나에게 배영웅이 불쑥 물었다.

“노을 아티스트는 어때요? 비전공장에서 녹음하는 거. 본인만 의견을 피력 안 하셔서요.”

“아 저는… 뭐 결국 무엇이든 잘 되면 좋은 거 아닐까요? 그러자면 일단 다양한 시도는 좋을 거 같습니다.”

경험상, 노래할 때는 남들이 안 볼 것 같은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노력해야 했다.

그 작은 차이의 총합이 최고를 만들었다.

녹음도 노래와 같은 원리가 작용하리라 봤다.

그런 의미에서, 녹음에 만전을 기하자는 재호 의견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정작 비전공장에서 어떤 사람을 마주칠지는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 * *

비전공장 투어는 뜻밖에 아주 유익했다.

온갖 다양한 나무로 덮여 있는 독특한 디자인의 벽면부터 온갖 커다란 스피커와 컴퓨터, 녹음 장비로 가득한 녹음실까지 모두 내가 알던 녹음실과 사뭇 달랐다.

내가 재호에게 속삭였다.

‘야, 우리가 녹음하던 TYB 녹음실과는 전혀 다르네. 여기는 왜 이렇게 화려해?’

‘거기야 TYB에서도 실용성을 중시해서 최소한의 장치로 한 거잖아?’

‘이스트 웨이브 녹음실도 심지어 이러지는 않았는데!’

‘힙합 뮤지션이 원하는 녹음실 느낌하곤 다른가 보지.’

‘그런가?’

여직원이 스튜디오의 모든 기능을 재호와 키미 프로듀서에게 꼼꼼하게 설명했다.

“이 부분에서는 코러스 녹음을 다양한 트랙을 넣어서 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녹음실에서는 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키미 프로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넘겼다.

“네네. 저도 사용해 봐서 알고 있어요. 근데 이번에는 멤버 3명에 코러스 1인뿐이라 그 기능이 크게 필요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키미 프로듀서는 TYB 소속 남자 그룹이 대형 발라드를 녹음할 때 몇 번 이 녹음실을 사용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 녹음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녹음 투어가 끝나고, 여직원이 스튜디오를 다시 한번 그동안 해왔던 영업 멘트를 요약, 반복했다.

키미 프로듀서와 재호는 꼼꼼히 들었지만, 사실 프로듀서가 아닌 나에게는 재미없는 실무 이야기였다.

바로 그때, 스튜디오 앞 리셉션에 낯익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이 나를 보더니 표정이 일그러졌다.

“니가 여긴 왜 왔어?”

그 사람의 정체는… 발라더 김종윤이었다.

그와는 월드컵 거리 응원 콘서트 때 부딪쳤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 솔로 활동 중인 나와 곡 편성 및 순서로 마찰을 빚었던 인물이었다.

그 이후, 김종윤은 자기 실패를 소속 밴드 멤버들 탓으로 돌리면서 그룹에서 나왔고, 그 이후 나온 발라드는 모두 고전 중이었다.

그런 그를 하필이면 외부 녹음실에서 만난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여긴 어쩐 일로?”

물론 겉으로는 예의 바르게 선배 취급을 해줬지만 속으로는 ‘말한 적도 없는데 처음부터 반말?’이라고 생각했다.

“뭐긴 글로벌 비전 데모테잎 녹음하러 왔지 뭐겠어? 너도 그런 거 아냐?”

‘그러고 보니 재호가 저 사람도 글로벌 비전 콘테스트에 나온다고 했었지?’

비로소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종윤이 내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한국 개돼지 대중에게야 니네처럼 어정쩡한 미디엄 템포 알앤비가 통하지만 글로벌은 달라. 주제를 알아야지.”

“선배는 글로벌에 통하시나…요?”

일부러 끝에 아주 살짝 작게 존댓말을 덧붙였다.

차라리 김종윤의 전형적인 통속 발라드야말로 해외에서는 자리가 없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김종윤이 ‘하!’ 소리를 내더니 말을 계속했다.

“니들이 국내에서 목멜 때. 나는 글로벌 레벨의 스태프를 섭외했지.”

어느새 여직원과 이야기를 마치고 내 옆으로 온 재호가 슬쩍 물었다.

“그 잘난 스태프는 대체 누구… 헐! 안녕하세요? 그, 그분 맞죠?”

빈정대며 질문하던 재호가 갑자기 다소곳하게 차렷 자세가 됐다.

김종윤 옆에 서선 한 백인 노인의 얼굴을 확인해서인 것 같았다.

키미 프로듀서 역시 얼굴이 하얘졌다.

노인이 허허 웃더니 키미와 재호에게 악수를 청했다.

능숙한 영어로 그가 말했다.

“반갑쇠다. 데이빗 페스토요.”

내가 해맑게 대답했다.

“좋은 이름이시네요. 반갑습니다. 권노을입니다.”

갑자기 재호가 내게 귓속말로 말했다.

‘멍청아! 저 사람 누군지 몰라? 모르냐구?’

‘처음 보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알아. 누군데??’

‘발라드 가수가 데이빗 페스토를 몰라? 전설의 발라드 프로듀서 데이빗 포스터! 8090년대 발라드 히트곡이란 히트곡은 거의 다 만든 사람이라구!’

물론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전성기 시절 중년의 모습만 사진으로 봐서 알아보지 못했다.

김종윤이 의기양양하게 나를 쳐다봤다.

“이제 알겠냐? 뭐 TYB? 그깟 짭 기획사. 한국에서나 좀 아이돌 춤추는 애들로 돈 번 거지. 미국에서는 듣보잡이야. 데이빗 페스토의 압도적인 미국 음악을 보여줄 테니까.”

키미 프로듀서가 내 어깨를 툭 쳐서 내 시선을 끌고는, 내게 귓속말을 했다.

‘으 김종윤 저 인간 너무 재수 없네요.’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본때 좀 보여줘요.’

‘네? 제가 어떻게요?’

‘날 따라와요.’

키미가 과장되게 활짝 웃어 보이며 데이빗 페스토에게 말을 걸었다.

“데이빗! 데이빗 노래를 이 친구가 정말 좋아하고 존경했다 합니다. 한 소절만 불러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오~ 오브 코스! 불러 봐요. 불러 봐요.”

키미가 내게 명령했다.

“자 노을 군. 불러 줘요. ‘I am Always Your Love’. 알죠?”

“와, 대박! 그 노래가 저분 곡이에요?”

“빨리요!”

녹음실 한복판이니만큼, 노래를 부르는 일이 아주 어색하지는 않았다.

크게 심호흡하고는, 딱 첫 소절, 세계 어느 사람이나 다 아는 초대박 히트곡의 처음을 불렀다.

[난~ 언제나 당신의 사랑이 될 거야. 그 어떤 문제가 우리를 덮치더라도.]

짝짝짝 짝짝짝!

데이빗 페스토가 마치 앵콜하는 관객처럼 기립박수를 했다.

“브라보! 브라보! 대체 당신 누구요? 당신도 가수입니까? 아니, 당연히 가수겠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이런 보컬을 볼 줄이야.”

데이빗 페스토가 내 팔을 잡고 흥분해서 흔들어 댔다.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 저… 죄송한데 이 팔 좀 놓고, 말해주시겠어요?”

“아!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런 가수를 직접 만나는 일은 정말 오랜만이라 그만. 요새 가수들은 힙합이니 뭐니 해서 가창력을 경시하니까.”

환희가 슬쩍 데이빗이 듣지 못하게 한글로 ‘힙합이 뭐 어때서….’라고 투덜댔지만 일단 나는 무시했다.

키미 프로듀서가 과장될 정도로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머 그러시군요! 한국에 ‘어떤’ 가수 리퀘스트로 오셨지만. 썩 대단한 가수를 만난 적은 ‘없었는데!’ 딱 이번에 한 번. 권. 노. 을. 군을 봤을 때 크게 감동을 받으신 거군요. ‘그전까지는 주변에 감동을 주는 가수가 전~혀 없었는데’!”

데이빗 페스토가 한참 침묵하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대충 그렇죠.”

재호랑 환희가 입을 막고 큭큭 웃었다.

김종윤의 표정이 점점 썩어들어 갔다.

김종윤이 데이빗 페스토에게 따졌다.

“영감! 이 사람들 내 경쟁자야. 잘 좀 말해 봐요. 저놈들 편들지 말고.”

데이빗 페스토가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호~! 역시나. 실력자들이었군. 방금 노래 부른 친구는 솔로인가?”

내가 재호랑 환희의 어깨에 손을 올려 보이며 말했다.

“팀입니다. 이 친구랑 저 친구랑 같이요.”

“3인조라. 클래시컬한 구성이구만. 자신 있나?”

“우리는 심사위원들을 반드시 무릎 꿇게 만들 겁니다. 우리 음악으로요.”

데이빗 페스토가 크허허허허! 하고 떠나가듯이 웃더니 내게 물었다.

“아주 재미있는 친구야. 하지만 음악만으로는 무릎을 꿇게는 할 수 없어. 왜인 줄 아나?”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어젯밤, 배영웅 매니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 하나 더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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