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글로벌 비전 한국 예선말야. 아주 난리가 났다구우~.
재호가 숨 쉴 틈 없이 말을 이었다.
“왜?”
-한국 지역 예선에 가수들을 엄청나게 초대했어. 엔간한 유명 가수들은 다 나올 거 같던데?
재호가 한숨을 땅이 꺼져라 쉬었다.
원래 우리는 ‘글로벌 비전’ 예선전에 초대를 받은 가수 자체가 적으리라 생각했다.
세계 대회이니만큼, 한국 가수에 대한 정보가 크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대회가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재호에게 물었디.
“누가 오는데?”
-일단 김종윤 씨가 온다는데?
“김종윤…!”
이전에 월드컵 거리응원 콘서트 때 나와 트러블이 있었던 가수였다.
당시에는 ‘바질리스크’라는 밴드의 보컬리스트였다.
지금은 밴드를 버리고 솔로로 전환했지만.
하지만 그에 참여가 큰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김종윤 그 사람 무대 같이 봤잖아. 별거 아닐 거 같은데.”
-혹시 몰라. 가창력은 좀 부족하지만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그 사람이 끝이 아니야. 오창선 선배, 바질리스크, 티아… 베테랑 가수들이 잔뜩 참여한다고 하던데?
우리 생각보다도 더욱 치열한 예선이 될 거란 뜻이었다.
그것도 신인 가수들이나, 비인기 가수들의 대결이 아니었다.
진짜 최정상 가수들, 차트에서 1위를 다투는 가수들의 대결의 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재호에게 감상평을 이야기했다.
“뭐 근데, 상관없지 않아?”
-뭐가? 예선 통과도 어려울 판인데! 스트레스 폭발이라구.
“어차피, 글로벌 비전에서 이기려면 전 세계 가수들과 경쟁해서 이겨야 해. 우승을 준비하려면 한국 최정상 가수들 정도는 다 이겨야 하지 않겠어?”
재호가 혀를 찼다.
-우승…? 너, 우승을 노리냐?
“나갈 거면 우승해야지. 전 세계 사람들이 우리 무대를 볼 건데.”
-참나….
재호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되려 경쟁이 치열해진다고 하니 피가 더욱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다만, 피가 끓는 것 같아도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재호와 통화를 마무리한 후, 바질리스크의 기타리스트이자 이제는 보컬을 맡고 있는 박요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어.
목소리가 밝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바질리스크’ 글로벌 비전 참여한다면서요?”
-어어. 그렇게 됐어.
“말 좀 해주지 그랬어요!”
-너도 거기 초대받았냐?
“그럼요. 비원더로.”
-그럼 경쟁자네. 종윤이가 너 죽여 버린다고 칼을 갈고 있던데? 조심해.
웃음이 나왔다.
김종윤은 두렵지 않았다.
너무 전형적인 록발라더인 데다가 과도한 음주가무로 가창력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걱정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저는 김종윤보다 바질리스크가 100배는 더 경계되네요.”
박요한 목소리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말이라도 고맙다. 그 이야기하려고 연락한 거야?
“아 그건 아니고요. 행사 많이 하시잖아요? 그때마다 본인 곡만 하시긴 어렵잖아요.”
-그렇지.
밴드는 자기 곡을 연주해야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모든 행사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남의 히트곡을 편곡해서 불러주는 정도의 유연성은 발휘해야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바질리스크는 보통 커버 곡 뭐 하세요?”
통화음 속 박요한이 한숨을 살짝 쉬었다.
-그야 뭐. 뭘 해도 애매하지. 그냥 예전에 종윤이랑 있을 때 했던 노래 불러.
예상대로, 이제 막 다시 새 출발한 밴드가 마땅한 히트곡 커버 레퍼토리가 있을 리 없었다.
내가 그 당장 간절한 레퍼토리를 선물하려 했다.
“선배, 제가 추천드릴 곡이 하나 있는데요….”
* * *
바질리스크 외에도 오창선 등 주변 가수들과도 통화했다.
통화가 모두 끝나니 점심 직전이었다.
점심을 먹기 전, 메리의 도움을 받아 조민하가 매일 공부하러 온다는 뉴욕 공립 도서관을 방문했다.
튼튼한 나무 탁자에 가지런히 쇠로 된 스탠드가 정렬되어 있었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앉아 공부하거나 독서 중이었다.
메리 앞에 자리를 잡았다.
자기 노트북을 꺼내던 메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노을.”
“네?”
“거기서 그냥 멍하니 앉아 있을 거예요? 여긴 도서관이라고요.”
“조민하 선배를 만나러 온 거지 책은 별로 관심 없는데요.”
“그래도, 민 아직 안 왔잖아요! 그때까진 뭐라도 해야죠. 아무거나 봐요.”
“사양할게요.”
한글로도 책을 안 읽는데, 영어로 된 책을 읽고 싶을 리가 없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대신 mp3를 꺼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아이팟 같아 보였다.
메리에게 mp3를 흔들어 보였다.
“음악 공부하고 있을게요.”
메리가 나를 보고 고개를 슬쩍 끄덕여 보였다.
“가수답네요. 조용히 있어요.”
메리는 바로 글쓰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지금 한국 시간은 새벽…. 1시려나?’
슬쩍 mp3로 라디오 앱을 켰다.
내 mp3는 평범한 기능도 당연히 소화했다.
일부러 소속사 선배 가수인 넵튠이 진행하는 새벽 라디오 방송을 켰다.
넵튠 선배는 이 새벽 방송으로 상당히 유명해졌다.
나도 활동 때마다 나올 정도로 익숙한 방송이었다.
-안녕하세요. 넵튠 한입니다. 라디오 극락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넵튠 선배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깔렸다.
장난기 넘치는 선배지만, 오프닝 멘트만은 늘 정갈했다.
‘오프닝 시점이 가장 신청곡이 될 확률이 높을 때지.’
타이밍 맞춰서 메시지를 달았다.
노래를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일부러 신청하는 사람이 나 ‘권노을’이란 사실을 티를 냈다.
혹시나 더 당첨될 확률이 높을까 봐였다.
[안녕하세요 선배! 비원더 권노을입니다. 음악 작업을 위해 뉴욕에 왔어요. 하지만 이렇게 라디오를 듣고 있으니 선배와 그리고 청취자 여러분들과 함께하는 기분이네요. 모두 좋은 밤 되길 바라며 판타스틱 폭시의 ‘함께 해’ 신청합니다.]
‘크~ 이거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가 봐도 읽어줄 수밖에 없는, 기가 막힌 라디오 사연이었다.
적당히 감성적이고, 무엇보다 짧았다.
거기다가 신청곡까지 사연에 맞춰서 똭! 하고 선정해줬다.
이건 읽힐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조민하 선배가 보였다.
또각 또각.
조민하 선배가 작지만 또렷한 발소리를 내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나를 보고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침착함을 찾고 제인과 눈인사를 하고 우리를 지나쳤다.
‘그런데 그 옆은 누구지?’
조민하 옆에는 말쑥한 포마드 헤어의 동양인 남자가 동행했다.
키는 좀 작은 편이었지만 가죽 재킷에 청바지로 제법 멋을 부렸다.
내가 제인에게 슬쩍 물었다.
“저 남자, 누구예요?”
제인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민 남자친구잖아요. 몰랐어요?”
“아 그래요. 몰랐네요.”
말을 안 해주니, 알 리가 없잖아.
제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민이랑 같은 수업을 듣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일본에서 굉장히 큰 부잣집 아들이래요. 돌아가면 IT 기업을 이을 거라고 하던데. 부럽죠?”
“네에… 뭐어….”
얼핏 봐도 남자는 30대 중반은 되어 보였다.
거기다 일본의 부잣집 남자라고 했다.
뭔가 세한 기분이 들었다.
일본의 재벌 집 아들이, 결혼하지 않고 미혼의 상태로 30대 중반 이후에 유학을 떠날 확률이 얼마나 될지 대충 계산해 보려 하던 찰나.
어딘가에서 다급하게 통화가 왔다.
오창선 선배의 전화였다.
* * *
메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서관 바깥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야! 권노을. 너 민하 만나겠다고 뉴욕 갔다며?
창선 선배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맞습니다.”
-야 걔가 뭐라고 하더라. 음악 하기 싫다고 했는데 계속 스토커처럼 쫓아온다고! 너 뭐 하는 거야? 인마.
조민하 선배가 자기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고 불평한 모양이었다.
“아 네… 일주일 시간이 있어서 그 기간에 천천히 시간을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민하 선배가 먼저 유학 가시면서 음악계 인사한테는 주소랑 연락처 알려 달라 하셨다면서요?”
-너도 ‘글로벌 비전’ 참여할 거라며. 귀국해서 노래 연습이나 해야 하는 거 아냐?
지금 하는 일이 글로벌 비전에서 내 무기를 얻기 위해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창선 선배도, 글로벌 비전에서는 나의 경쟁자 중에 하나였다.
게다가, 지금 하는 일은 민하 선배도 원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유학을 갈 때 ‘음악계 인사에게는 연락처를 알려 달라’라고 당부까지 해놓고 떠난 것이다.
다만 지금은 잠시 물러설 때였다.
“네 뭐. 티켓을 샀으니까 이 비행기 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선배는 요새도 투어 중이시죠?”
-말도 마! 너어어무 바빠! 나도 오디션 준비 좀 해야 하는데. 벌려 놓은 일이 많아서 못 하고 있네. 다음 달이면 다 정리될 거야.
“혹시… 앵콜곡이 모자라지는 않으세요?”
-아니 뭐. 레퍼토리는 항상 더 있으면 좋지.
‘그러시겠죠. 언제나 선배는 공연장에서 앵콜로 1~2시간 추가는 기본이니까.’
이전 생에서 오창선의 코러스로 활동하면서, 오창선의 콘서트 패턴은 이미 다 알고 있던 상태였다.
그에게는 언제나 유명하면서도, 본인이 부를 것 같지 않은 의외의 ‘앵콜곡’이 많이 필요했다.
“제가, 추천드릴 곡이 하나 있는데요. 연습해봐 주시고, 괜찮으면 한 번 불러봐 주시겠어요?”
-뭐 많을수록 좋지. 뭔데?
“판타스틱 폭시의 ‘단 한 사람’이요.”
-뭐? 그 귀여운 걸그룹 노래! 야 장난하냐? 결혼한 아저씨가 그런 노래 부른다고 생각해봐~. 안 돼에.
“한 번 편견 없이 들어보세요. 의외로 코러스 라인이 죽여줘요.”
-에이 뭐 그래 봤자…
“그거, 민하 선배가 편곡한 애드립 라인이에요.”
-뭐? 민하가 그런 걸 했어?
아는 사람 이야기가 나오자, 바로 오창선 선배가 목소리 톤이 한 톤 높아졌다.
“기가 막혀요. 한 번 속는 셈 치고 확인해 보세요.”
* * *
금방 내가 뿌렸던 떡밥들에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시작은 ‘라디오 극락’ 신청곡이었다.
라디오 DJ인 넵튠 한 선배가 내 사연을 읽어주었다.
-다음 사연은, 뉴욕에서 권노을 씨가 보낸 사연입니다. 비원더의 권노을 씨 맞나요? 예~에 제작진이 맞다고 하네요! 이 친구 출장 갔을 텐데 한가하게 라디오나 듣고! 참 바람직한 친구네요. 에헴!
넵튠은 바로 내 사연 신청곡, 판타스틱 폭시의 ‘함께해’를 틀어 주었다.
이어폰을 통해 ‘함께해’의 경쾌한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청자들 반응을 확인했다.
-와 너무 좋다.
-누구 곡이에요? 이런 노래가 있었나.
-마음까지 청순해지는 거 같아요.
-노을오빠는 선곡도 잘하네. 노래도 잘하고, 못하는 게 뭐예요?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내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보통, 라디오 중 최고 인기 프로그램은 출퇴근 프로그램이었다.
가장 많은 청자들이 듣는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대박 시간대는 새벽 시간대였다.
이 시간대에는 방송작가부터 음악가, 웹툰 작가까지, 온갖 분야의 ‘창작자’들이 깨어 있었다.
그리고 2천 년대는 그들 중 상당수가 ‘라디오’를 들으며 작업했다.
음악에 ‘오피니언 리더’인 창작자들이 듣는 새벽 라디오는 자연스럽게, 음악의 트렌드 세터가 되었다.
그래서 새벽 라디오 방송에 판타스틱 폭시의 곡을 신청했다.
가장 효과적으로, 빠르게, 1주일 만에 조민하 선배의 작업물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디오 신청곡을 통해 상당히 곡의 인기가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좀 소소한 성공에 불과했다.
음원 사이트 탑 200에 간신히 걸쳐 들어간 수준으로는 부족했다.
곡이 ‘대박’이 나야 했다.
‘조오오금만 더 센 거 없을까? 조금만 더!’
그리고 얼마 후,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잭팟이 터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