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천채왕 프로듀서도 조민하 코러스의 이름은 들어 본 눈치였다.
다만, 그렇다고 내 말에 공감한다는 뜻은 또 아니었다.
“하지만 여튼 그래 봐야 코러스잖아. 태평양 건너가야 할 정도야? 다른 사람도 많을 텐데.”
“저희에게 필요한 건 그냥 코러스가 아닙니다. ‘비원더’의 음악 폭을 넓혀줄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천채왕이 눈을 껌뻑였다.
“코러스가 음악의 폭을 넓힌다고?”
“그런 경우도 있죠.”
“설마….”
“조민하 코러스는 상당수의 곡의 코러스 라인 편곡에 참여했습니다. 일반적인 코러스가 아니에요. 그보다는 편곡자에 가깝죠.”
“어떤 곡을 했는데?”
이전 생의 기억을 더듬어 조민하의 대표곡 중, 이미 발표된 음악들을 읊어 주었다.
대부분 ‘판타스틱폭시’라는 걸그룹의 곡들이었다.
리스트를 들은 천채왕이 감탄했다.
“야. 엄청 대단한 히트곡들이잖아? 그 곡들의 코러스 라인을 다 짰단 말야?”
“코러스만이 아닙니다. 멤버들의 멜로디, 화성, 진행. 애드립 라인까지 다 관여했습니다.”
천채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아마 프로듀서가 다 자기가 만든 거라고 속였겠죠. 조민하 선배의 몫을 강탈한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 가면 되잖아? 그 정도 실력자가.”
“한번 자기 몫을 빼앗긴 다음에는 마음이 무너져서 음악을 그만뒀을 수도 있죠.”
천채왕이 머리를 긁적이다 내게 물어봐야 마땅한 질문을 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제가, 코러스분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편이거든요.”
“코러스들이 그런 말을 네게 해줬다고?”
“코러스들 사이에서는 제법 유명한 이야기더군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코러스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다만 ‘이번 생에서’ 들은 게 아니라, 이전 생에서 들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천채왕이 계속 말을 이었다.
“뭐 좋아. 이 정도라면 확실히 필요할 수도 있겠어. 하지만 굳이? 미국까지? 그냥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편곡을 맡기면 되는 거 아니야?”
“이분은 또 여성입니다. 비원더에는 여성 멤버가 없어요.”
“그야 남성 3인조 그룹이니까. 혼성그룹은 여러 이유로 가요계에 거의 없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은 남성과 아예 음역과 톤이 다르죠.”
“알고 있지.”
“여성 코러스가 있다면 훨씬 저희 음악의 폭이 넓어질 겁니다. 우리가 여태껏 해보지 못했던 표현을 넣을 수 있으니까요.”
천채왕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여성 코러스도 한국에 얼마나 많은데 노을아. 그거 때문에 미국 가긴 좀…….”
“이 정도 편곡 능력과 이 정도 보컬을 갖춘 코러스가 ‘아직 무명인 경우’는 없지 않을까요?”
천채왕이 침묵을 지켰다.
“커리어가 뛰어난, 전문 코러스는 엄청나게 바쁘다고 알고 있습니다.”
“뭐 그렇지. 없으면 녹음이 안 될 정도니까.”
“글로벌 비전은 만약 저희가 결선까지 진출한다면 거의 반년 가까이 걸릴 텐데요…. 그 시간을 다 저희를 위해 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코러스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지 않을까요?”
천채왕이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역으로 질문했다.
“일주일 줄게. 그사이에 재호랑 환희는 뭘 하고 있어야 할까?”
“일주일…이라 애매하네요.”
“시간을 더 줄 수는 없어.”
잠시 시간을 계산해봤다.
미국이니 가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는 잡아야 했다.
5일 안에 설득을 완료하라는 요구였다.
그 정도면 더 좋은 조건을 얻기는 어려워 보였다.
“알겠습니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어. 그동안 다른 멤버들은 뭘 해야 할까?”
이미 우리는 기본기 훈련 루틴을 매일 소화하고 있었다.
발성부터 음정, 박자, 레퍼토리 연습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데 여기서 뭘 더해야 할까?
이럴 때는 고민하기보다 천채왕이 생각하는 답을 물어보는 편이 빨랐다.
“선생님 생각에는 뭘 하면 좋을까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처음에 음악을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시작은 팝송 대회였다.
팝송을 따라 하면서 음악을 시작했다.
여기까지 생각해보니 천채왕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카피…인가요?”
“그래. 나도 기타 따면서 음악을 시작했지. 내가 듣고 카피한 노래들이 결국 내 자산이 되고, 위기 때 내가 꺼내 쓸 수 있는 무기가 되잖아.”
‘슈퍼스타 T’ 오디션을 하면서 몇 번씩이나 비슷한 경험을 했다.
위기 때는, 미리 연습했던 노래들이 자양분이 됐다.
‘역시나 천채왕을 내 프로듀서로 선택한 것은 정답이었어.’
그가 내 나침반이 되어 주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근데 어떤 곡을 카피해야 할까요?”
“평소에 많이 했던 곡들도 좋겠지만.”
그의 말에 내가 덧붙였다.
“그런 곡들로는 한계가 있죠.”
“스티비 원더. 마이크 넬슨… 뭐 다 걸작인데. 다른 곡을 도전해볼 필요가 있어.”
“일단, 지난번에 호텔에서 알려주신 모타운 음악과 아카펠라 그룹은 체크해볼 만할 것 같습니다.”
“좋네.”
천채왕은 지난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방향 중 ‘모타운’ 음악이 있다고 말해 줬다.
모타운 음악은 기본적으로 밴드 음악이었다.
하지만 아카펠라 보이밴드의 원형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장르의 음악이지만, 60~70년대에 있던 옛 음악이라 지금 이런 음악을 구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편하게 들림에도 재즈에 가까울 정도로 화려한 테크닉, 기교를 자랑하는 어려운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모타운 하면 마이크 넬슨이 했던 거 정도밖에 몰라서요.”
“내가 같이 연습해볼 만한 거 지금 알려줄게. 우선 ‘트루스 팩터’, ‘심플 마인드’….”
여러 카피곡이 쏟아졌다.
뉴잭스윙부터, 캐리비안 알앤비 가수들의 레게 음악까지, 알앤비를 베이스로 한 다양한 종류의 음악들을 천채왕이 찾아 주기로 했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곡 카피를 시작할 테니까, 미국에 있는 일주일 동안 철저하게 연습해 와. 그게 미국 가는 조건이야.”
* * *
2일 후.
바로 그 김에 배영웅 매니저와 함께 뉴욕에 왔다.
배영웅 매니저가 슬쩍 농담을 던졌다.
“노을 아티스트 덕에 미국은 그냥 앞마당처럼 돌아다니네요.”
“설마 조민하 님이 있다는 곳이 뉴욕일 줄은 저도 몰랐네요.”
조민하 코러스가 MBA 학위를 받으러 간 곳은 무려 콜럼비아 대학교였다.
“잘은 모르지만, 그… 무슨 아이비리그나 뭐 그런 거 아닌가요?”
배영웅 매니저가 피식 웃었다.
“엄청 명문 학교죠. 조민하 님이라는 분, 굉장히 재능이 많으신 분인가 보네요.”
“…저는 음악 하나만으로도 벅찬데요.”
‘음악에 대한 재능 하나면 됐지 공부까지 잘하다니!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
투덜대며 뉴욕 거리를 걸었다.
훨씬 화려하고 다양한 인종의 사람이 모인다는 점을 제외하면 뉴욕은 꼭 서울과 비슷해 보였다.
‘…더러운 곳은 더 더럽기도 하고.’
배영웅 매니저가 노트를 확인하며 말했다.
“오창선 님에게 연락처는 조민하 님께 받으셨다 했죠? 주소와 연락처를 학교를 모두 갖고 있으니 별문제는 없겠네요? 잘하면 한 3일은 휴가로 쓸 수 있겠는데요?”
“그렇게 되면 바로 돌아가야죠.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지만요.”
* * *
내 직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관심 없어요. 바빠요. 가주세요.”
조민하 코러스는 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자, 잠시만요. 그래도 전화할 때는 만나 보겠다고 하셨는데.”
“코러스를 해달라는 부탁인 줄은 몰랐어요.”
“…코러스가 싫으신가요?”
안경 너머 조민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후드티에 청바지, 두꺼운 안경에 질끈 묶은 머리까지, 그야말로 모범생 느낌이 확 나는 차림이었다.
“코러스 따위, 아무도 신경 안 써요. 인기 가수니까 그런 생각해본 적 없겠죠?”
“…….”
‘이번 생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전 생에 나는 실패한 가수이자, 코러스로 생을 마감했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누구도 코러스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요. 기껏 음악에 참여해봤자. 작곡가, 작사가, 잘 해주면 편곡가를 기억하지. 코러스는 그냥 좀 도와준 사람 취급이라고요.”
슬쩍 그녀를 떠봤다.
“…선배가 만드셨죠? ‘판타스틱폭시’의 대표곡들 보컬 라인들.”
조민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어떻게 알았죠?”
“음악마다 선배님 특유의 라인들이 살아 있었으니까요. ‘오늘 밤은’부터 ‘함께해’ ‘단 한 사람’…… 모두 다 애드립 라인이 비슷한 스타일이었어요.”
“……아무 대가도 받지 못했어요. 그냥 고맙다고 고기 한 점 주는 게 끝이었죠.”
“작곡가가 그랬나요?”
“제작자도 한통속이었어요. 그냥 다들 똑같아요. 코러스에게 미래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음악을 그만두셨군요.”
“그래요. 이제 그만 가주겠어요? 곧 샌드위치가 나올 것 같네요.”
조민하 선배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동네의 델리 샌드위치 가게였다.
벌써 조민하 선배의 점심인 샌드위치가 나왔다.
그녀가 샌드위치를 챙겨서 나가려 했다.
내가 그녀에게 슬쩍 운을 뗐다.
“정말 음악에 관심이 없으셨다면 이 자리에도 안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조민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민하 선배가 음악계에서 밝은 미래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뭐, 뭐죠!”
바로 그녀가 반응을 보였다.
“프로듀서는 충분히 가능해요. 이미 걸그룹 작곡의 핵심을 꿰뚫어 보셨잖아요? 그 경험을 살려서 프로듀서로 자리 잡으시면 되죠. 심지어 제작을 하실 수도 있고요. 그러면 MBA 공부도 도움이 되시겠죠.”
“저같이 연줄도 없는 여자를 누가 프로듀서로 써주겠어요?”
“데모 테이프를 익명으로 제작사에 넣으시면 되겠죠. 그래도 프로듀서 계는 명성보다는 실력이 우선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인기가 사라지면 바로 기성 작곡가도 사라지는 냉정한 곳이니까요.”
최소한 내가 소속된 TYB에서는 그런 차별은 없었다.
게다가, 내 조언은 틀릴 수가 없었다.
실제로 이전 생에서 조민하가 성공했던 비결을 그대로 읊고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성공 확률 100%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민하 선배가 델리 샌드위치를 받아 뒤도 돌아서며 말을 남겼다.
“생각해볼게요.”
생각보다는 설득이 만만찮겠다 싶었다.
내가 그녀의 미래를 훤히 볼 수 있다고 해서, 그녀가 내 말을 믿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설득은 또 다른 말이었다.
* * *
오후에는 매일 반복 연습을 했다.
기본기 연습에 카피곡 연습을 더 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조민하에게 본인의 가능성을 설득할 수 있을까? 역시… 근거가 있어야 해. ‘구체적인 성과’가.’
운동을 끝내고, 한국 음원사이트로 들어가 조민하가 썼던 곡들을 살펴봤다.
타이틀곡이 아닌 곡 중에는 조민하의 이름이 등록된 곡들도 더러 있었다.
“음… 어떻게 한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앤젤의 전화였다.
-여어! 미국 갔다메? 연락도 없이 가버렸어?
“아 그러고 보니.”
너무 급하게 출국해서 멤버들과 가족 외에는 알리지도 못했다.
-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섭하다 너어?
“그냥 너무 급해서 그랬지. 아 그러고 보니….”
조민하 선배는 ‘잇츠쇼타임’의 코러스도 했던 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앤젤에게 조민하 선배에 대해 공유했다.
그녀의 재능과 실패, 그리고 그녀와 함께 일하고 싶어 무작정 뉴욕에 나온 일까지 모두 알려 주었다.
-…그러니까 민하 누나가 자기 저작물 권리를 아예 다 빼앗긴 거네?
“정확히는 코러스 작곡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봐야겠지.”
-그 말이 그 말이지. 야… 참 양아치들 많네!
“너는 코러스 편곡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냐?”
-…그러고 보니 없네. 내가 양아치였네. 차암!
“…알면 됐다 야.”
-너무 그러지 마. 나도 죽겠어.
“왜?”
-킹 오브 싱어 졸업해서 좀 쉴 줄 알았더니만, 또 다른 오디션이 잡혔지 뭐야. 오디션으로 뜬 놈이라 싫다 할 수도 없고. 이제 선곡 아이디어도 없는데 대체 뭐 부르냐?
“뭐 부르냐고?”
갑자기 ‘번쩍!’ 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