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84화 (184/280)

제184화

목소리의 정체는 천채왕이었다.

어느새 그가 우리 테이블에 남은 의자에 슬쩍 앉아 있었다.

재호와 환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서… 선생님!”

그러거나 말거나 천채왕은 계속 영어로 말을 이었다.

조지보고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영어를 썼다.

“비원더의 정체성은 알앤비야. 알앤비를 포기할 순 없어. 그렇다고 한국적인 발라드 정서를 함부로 넣어서도 안 되지. 서구권, 즉 글로벌 시장의 정서에 맞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해외 팝같은 곡을 했다간 팝가수의 열화판이 돼버려. 그래서 휭크(funk) 음악이나, 모타운 그룹, 아카펠라 그룹처럼 미국에서 했지만 지금은 안 하는 음악, 그중에서도 비원더가 잘할 수 있는 음악을 해야 되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100점 만점에 100점짜리 답이었다.

아니, 차라리 120점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나는 모타운처럼 구체적인 음악 장르를 생각하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조지가 얼굴을 찌푸렸다.

“미스터 천이군요.”

“조지라고 했죠? 반갑습니다. 위너 담당 이사라 하셨는데, 위너랑 미팅할 때 본 기억은 없는데요?”

조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최근 미팅이 아니었겠지.”

“그렇다기에는 어제도 CEO랑 화상 회의했는데. 뭐 여튼 됐습니다. 여튼 노을 군은 당신을 시험해 본 거 같군요.”

“무슨 말이오?”

“노을 군 본인을 프로듀싱 할 자격이 있는지 말입니다.”

정답이었다.

프로듀싱을 하겠다면, 프로듀싱 능력을 보여줘야 했다.

간판 자랑은 필요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우리한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조지께서는 비원더가 이번 대회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 거 같으신가요?”

“음악은 노을 군처럼 유능한 음악가가 자유롭게 하면 됩니다. 저는 사업의 체계….”

나는 집요하게 되물었다.

“오디션 참가하는데 사업이 왜 필요하죠? 그건 성공한 다음에 하면 되잖아요? 굳이 매니저 필요도 없고.”

“방송가 네트워크라던가….”

“방송 주최 측 중 지인이 있으세요? 한번 정확한 소속이랑 직위를 알려 주시면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조지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확인?”

“제가, 이스트 웨이브랑 같이 음악 작업을 한 적이 있거든요….”

조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스트 웨이브라면 그 빌보드… 1위….”

“제 가장 최근 앨범에 이스트 웨이브의 곡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수록곡이라 미처 확인 못 하셨나 봐요?”

“아, 아마 그럴 겁니다.”

“아니면 우리에게 사실은 아예 관심이 없던지?”

식탁 위에 침묵이 흘렀다.

조지가 불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잊고 있던 일이 있었네요, 실례하겠습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소.”

허겁지겁 나가려는 조지에게 천채왕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가이드’ 조지… 유명하더군요. 성공이 예정된 가수에게 팝 시장에서 성공하게 해 준다 사기를 쳐서 사실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수수료만 받아먹는 악덕 사기꾼 에이전트.”

그리고 그가 몇 명 가수 이름을 댔다.

잘 나가다가 소속사 분쟁으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유명 가수들 목록이었다.

그 말을 들은 조지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

천채왕이 보온병에 넣어 가져온 해양 심층수를 쭈우욱 들이켜더니 한 마디를 보탰다.

“TYB 소속 가수에게는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하지 마요? 험한 꼴을 보여 줄 테니까.”

조지는 그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천채왕은 조지가 나가자마자 그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조지는, 간단히 말해 음악 사기꾼이었다.

원래 재무 관련 고위 임원이었으나, 술 먹고 행패를 반복해서 부리다 퇴출되었다.

이후 그는 전 세계를 돌며 음악계 거물 행세를 했다.

실상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멋진 과거의 직무 명만 가진 빛 좋은 개살구였다.

그렇게 그는 성공이 보장된 가수를 낚아채서, 그들의 음원 수익을 빨아먹고는 버렸다.

외국인이라 소문이 나지 않아서 그렇지, 아프리카부터 남미, 아시아까지 전 세계에서 저런 짓을 하고 있다 했다.

“…스펙은 사실이니까. 그런 거 보여주면 혹할 수도 있지. 그런 거에 낚여서 흔들리는 사람도 많고.”

재호와 환희가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알아봤지만.’

천채왕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나 같아도 혹했을 것 같은데.”

“가수는 노래를 잘해야 하고, 연주자는 연주를 잘해야 하고, 매니저는 매니저 일을 잘해야죠. 대표고 부대표고 상관없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간단한 법이었다.

복잡하면 일단 의심을 해보는 편이 좋았다.

그 복잡함이 나를 혼란시키려는 술수일 수 있으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는 재호에게 내가 말했다.

“앞으로는 이스트 웨이브한테 물어봐. 같이 곡 작업해서 연락처 있잖아?”

“있지?”

“이스트 웨이브는 다 알 거 아냐? 조지가 어떤 사람인지.”

“아…!”

“이스트 웨이브가 사기꾼은 아닐 테니까.”

사실, 천채왕에게 여전히 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하지만 저 사람 말 중에 제가 동의한 부분도 있습니다.”

“뭔데?”

“이대로는 부족하다는 점이요. 저희 스태프 충원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천채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그건 그러네.”

여태까지 비원더는 최소한의 인원의 팀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새로 시작하는 신생 기업, 스타트업처럼 기동성 있게 움직이고 싶다는 천채왕의 전략 때문이었다.

여태까지는 이런 방식이 문제가 없었다.

배영웅 실장은 로드 매니저부터 대표까지 다양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김나리 직원과 그를 서포팅하는 본사 직원들은 모든 행정 업무를 깔끔하게 처리해 주었다.

천채왕 프로듀서 또한, 바쁜 일정 와중에도 비원더를 꼼꼼히 챙겼다.

모두의 보조가 잘 맞은 덕분에 아시아 단위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공했다.

하지만 이제는 부족했다.

의견을 개진했다.

“일단 무대 연출이 필요합니다.”

“동감이야. 곡 순서 정하고 이런 일이야 너희들이 하면 돼. 하지만 무대 영상, 미술, 이런 건 도움을 받아야지.”

환희도 말을 보탰다.

“그런 부분에서 도움을 받는다면… 가사도 더 자유롭게 쓸 수 있겠네여.”

계속해서 내가 말을 이었다.

“아직 더 있습니다. 무대 전체의 스토리를 도와줄 직원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저희 셋이서 곡의 서사를 짰는데, 이걸로는 부족해 보여요.”

천채왕이 머리를 긁적였다.

“오케이, 무대 감독과 스토리텔러, 둘 다 알아볼게.”

“또… 밴드 멤버도 충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안 그래 재호야?”

재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노을이 말이 맞습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미도리 선배, 박찬용 선배, 둘과 함께 3인 밴드로 무대를 했던 경우가 많았는데요. 하지만 이런 조촐한 밴드 구성으로는 한계가 너무 많아요. 적어도 베이시스트는 필요하구요. 제가 노래와 작곡에 집중하려면 키보디스트도 뽑아야 하거덩요? 이 부분도 확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알아보지.”

내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저도 있습니다. 코러스요.”

“코러스?”

지금껏 우리는 직접 코러스 부분을 맡았다.

여지까지는 그걸로 충분했다.

특히 재호는 코러스 편곡의 달인이었다.

재호 특유의 코러스 편곡은 이미 비원더의 주요 무기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라이브 위주의 오디션 프로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제아무리 재호라 해도, 무대 위에 멤버로서 활동하면서 코러스까지 할 수는 없었다.

이는 이전 생에서 프로 코러스였던 나도 마찬가지인 상황.

코러스는 반드시 필요했다.

“단순히 코러스 멤버가 아니라. 곡 전체를 리딩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있으면 좋겠어요.”

재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사람이 있을까?”

재호는 나에게 했던 질문이었지만, 천채왕이 대신 대답했다.

“몇 명 있지! 스케줄이 문제지만. 하지만 글로벌 비전이잖냐. 없어도 만들어 봐야지. 한번 확인해볼게.”

천채왕이 수첩에 해당 내용을 적었다.

얼핏 생각해도 벌써 4~5인 넘게 새로 뽑아야 했다.

갑자기 모두가 해야 할 일이 갑절로 많아지기 시작했다.

* * *

멤버들과 헤어지고 집에서 잠깐 상념에 잠겼다.

실로 오랜만에 이전 생의 기억을 꺼내 보기 시작했다.

집 안에는 회귀하자마자 써 놓았던 노트들이 있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 기억을 적어둔 노트였다.

행여 누가 볼까 봐 꼭꼭 숨겨서 은행 금고에 보관해두었다.

그 금고를 드디어 열 때가 되었다.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에 써먹을 만한 내용을 찾기 위해서였다.

“어디 보자….”

노트를 일일이 확인했다.

대부분이 ‘슈퍼스타 T’ 오디션에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이미 우승자가 된 지금, 대부분의 정보는 폐기처분 대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는 게 몇 개 없었다.

‘이 기억의 조각들을 가지고 다시 미래를 떠올려 보자.’

사소한 거라도 좋았다.

처음부터 내 인생을 되돌아봤다.

예전에 나는 희귀병으로 인한 과체중으로 고생했다.

가수로는 활동하지 못하고, 오창선 선배의 코러스로 활동했었다.

‘잠깐 코러스? 코러스? 코러스?’

그 순간, 딱 지금 필요한 사람이 떠올랐다.

조민하 선배.

내가 소속되어 있던 오창선 선배의 코러스 팀의 리더격이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교한 코러스 라인을 짜는 편곡 전문가였다.

오창선 선배가 그녀가 없으면 녹음을 안 하겠노라 엄포를 놓을 정도였다.

지금, 우리 비원더가 딱 필요로 하는 코러스 리더였다.

게다가, 아직 그녀는 코러스 팀의 리더로 성공하기 이전 시점이다.

스카웃이 아주 어려운 시점은 아니란 뜻.

바로 오창선 선배에게 통화했다.

하지만 역시나, 일이 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네에? 미국으로 떠났다고요?”

-그래. 걔 얼마 전에 미국으로 유학 갔어. 음악 그만두겠다면서.

“하아….”

-근데 니가 걔를 어떻게 아냐?

당연한 질문이다.

이번 생에서 나는 조민하 선배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전 생에서는 오창선 선배의 코러스를 하다가 조민하 선배를 만났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애초에 오창선 선배의 코러스가 되기 전에 가수로 성공해 버렸으니, 조민하 선배를 만날 일이 없었다.

“그… 이전에 선배 공연에서 너무 인상적이었어서요! 같이 공연해 보고 싶어서 누구신지 알아봤어요.”

-야 너 연상 취향이야? 관심 있는 거야?

“아뇨 이성적인 관심이 아니라. 딱 음악적인….”

오창선이 큭큭 웃었다.

-알았어 알았어. 한번 알아는 봐 줄게.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끊었다.

조민하 선배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 봤다.

내 전생에, 조민하 선배는 코러스 업계의 대모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이번 생에서는 갑자기 음악을 그만두겠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나 때문인가?’

회귀자인 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운명을 마구 바꾸었다.

실패한 코러스던 내가, 지금은 100만 장 앨범을 팔아치운 발라드 가수가 될 때까지, 계속 내 미래를 바꿨다.

그러는 도중에 많은 이들의 운명을, 때로는 안 좋게 바꾼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때, 오창선 선배에게 다시 통화가 왔다.

* * *

얼마 후, 나는 천채왕과 단독 면담을 신청했다.

천채왕이 내게 물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뉴욕에 가고 싶다고?”

“네, 맞습니다.”

“코러스를 구하려고?”

“네.”

“근데 그 사람은 지금 음악 때려 치고, MBA 과정 중이라고.”

“그러네요?”

“…야, 장난해? 지금 바로 데모 테이프 제작에 온 힘을 다해야 할 시기인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아 참, 이 사람이 진짜 끝내주는 코러스인데. 이거 참 말할 방법이 없고 이걸 어쩌지? …이 사람, 그래미상 탈 사람인데! 나는 아는데! 이걸 어떻게, 티 안 나게 알려줄 수 있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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