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83화 (183/280)

제183화

“우리에겐 메인보컬 권노을이 있잖아. 이런 보컬은 전 세계에서 드물어. 그걸 잘 활용해야지.”

왜 무기가 필요한가?

천채왕 프로듀서의 말에 따르면, 1차 예선에는 몇백, 아니 몇천 개의 팀이 참여할 예정이었다.

물론 심사위원은 전곡을 다 듣고 그중에서 합격자를 선발한다.

하지만 경쟁이 너무 심했다.

첫 5~10초 만에 음악에 집중하게 해줘야 했다.

집중력을 잃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몇백 곡을 듣다 보면 당연히 체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초반부에 뭔가 심사위원의 이목을 끌 무기가 필요한 이유였다.

천채왕이 한마디를 더했다.

“무기를 제대로 활용할 전략을 짜려면, 우선 대회에 대해서 알아야겠지?”

배영웅 매니저가 우리에게 자료를 건네주었다.

“글로벌 비전 행사 진행 개요입니다. 초대장과 함께 전달받은 자료를 번역 및 정리했어요.”

공식 자료집만 해도 제법 두꺼웠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국가별 예선을 치르고, 국가대항전을 진행하다 보니 엄청나게 소개 자료가 방대해진 모양이었다.

천채왕이 말을 덧붙였다.

“우선 공식 가이드를 모두 숙지한 후에 다시 회의를 시작해보자. 오케이?”

자료집을 읽다 보니 새로운 대회가 시작됐다는 실감이 났다.

다시 시작이었다.

* * *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집으로 귀가한 뒤, 혼자서 음원 사이트의 음악을 뒤지기 시작했다.

대회에서 어떤 음악을 할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였다.

여태까지 비원더의 음악 방향을 잡기는 쉬웠다.

우선 재호와 환희, 그리고 내가 모두 존경하는 스티비 원더의 음악을 기반으로 하자는 컨셉이 확고했다.

거기다 대상도 분명했다.

한국, 그리고 그 뒤는 대상을 넓혀서 아시아까지였다.

대상이 명확했기에, 음악 방향을 잡기도 쉬웠다.

팝 시장에서 유행하는 트렌디한 알앤비를 가져와 아시아 특유의 취향을 섞으면 됐다.

주로 미디엄 템포 알앤비, 그리고 발라드를 반반씩 섞는 방식을 활용하면 충분했다.

하지만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는 상황이 달랐다.

전 세계 인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한국 대표를 뽑는 지역 예선조차도 심사위원은 서양인이었다.

그렇다면 서양인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하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서양인이 듣는 트렌디한 알앤비를 하면 아시아 그룹만의 색깔이 사라질 거라는 걱정이 앞섰다.

음악을 디깅하면 할수록 오히려 고민이 깊어졌다…

‘발라드? 아니, 이런 음악은 서양인들 취향이 아니야. 그렇다고 트렌디한 알앤비를 하면 미국 알앤비 가수와 다를 바가 없어지고. 뮤지컬 같은 구성을 짜볼까? 근데 그런 음악은 무대를 보여줘야 의미가 있는데. 1차는 데모 테이프란 말이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벽에 막힌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었다.

재호와 하늘이가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두 사람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면서 둘을 슬쩍 보니 주하늘의 헤어스타일이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오랜만에 앞머리 내렸다?”

하늘이가 대답했다.

“요새 우리들끼리 만난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혼자서는 늘 이러고 다녀요.”

이제는 굳이 그렇게 숨길 필요 없지 않나 싶었지만, 일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잡담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마자 재호가 운을 뗐다.

“회의 좀 해보구 싶어서.”

“방금 전까지 우리가 한 게 회의 아니냐?”

“우리 셋만.”

TYB 회사 직원이 없이, 우리끼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었다.

재호가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 이제부터 합숙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합숙?”

잠깐 생각해봤다.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았다.

이미 내 솔로 앨범을 만들 때 반쯤 합숙 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재호와 하늘이는 녹음실에서 살았고, 나는 출퇴근을 하면서 앨범을 만들었다.

함께 살면서 소통이 많아지자 실제로 결과물도 더 좋아졌다.

효과는 확실했다.

게다가 앞으로 비원더는 곡도 더 많이 써야 했고 무엇보다 무대도 더 많이 해야 했다.

좀 더 소통을 늘릴 필요가 있어 보였다.

생각을 끝낸 내가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 같은데? 그럼 회사에 말해서 숙소를 요청하면 되겠네. 배영웅 실장에게 부탁하면 금방 해줄 거야.”

재호가 살짝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거 말야… TYB만으로 충분할까?”

“무슨 말이야? 우리 계약 기간 아직 한참 남았어. 라기보단 이제 계약 시작이잖아?”

아직도 TYB와 비원더는 4년 가까이 계약이 남아 있었다.

주하늘이 슬쩍 말을 끼어들었다.

“그게, 꼭 그렇지는 않더라고여.”

“뭐?”

“계약서 자세히 보셨어요? 보시면, TYB는 저희의 한국, 그리고 아시아 계약만 담당해요.”

“그래서?”

“서양권 활동은 안 친다는 거죠. 엄밀히 말하면,“

하늘이는 그 말을 하면서도 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게 쉬울 리가 있냐?”

한순간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천채왕은 우리 같은 소속 가수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법적인 꼼수 같은 짓에는 절대 당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괜히 가요계의 제왕이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애매모호한 조항으로 함정을 만들 리가 없었다.

법적인 장치가 분명 있을 듯 것이다.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팝 시장에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고. TYB랑 해야지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

이번에는 재호가 내 말을 끼어들었다.

“여태까지는 확실히 TYB는 최고였어. 아시아 최고의 기획사답게 최단 거리로 우리를 성공시켜 줬지.”

“내 말이 그 말이야.”

“하지만 이번 대회는 어때? 좀 이상하지 않아? 사실상 주최자 측에서 준 공식 자료밖에 정보가 없잖아. 항상 최선의 대책을 세워온 TYB랑 다르다구.”

“그야 그렇긴 하네. 하지만 그건 여태까지는 음반 제작을 해줬지만, 지금 할 일은 오디션 참가니까 그런 거 아냐? 오디션에서 기획사가 뭘 해줄 수 있겠어? 그건 다 마찬가지 아니야?”

재호가 고개를 저었다.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는 전 세계 날고 기는 실력자들이 모이는 곳이야. 그냥 공식 자료 번역만 해서 경쟁이 되겠어? 다른 정보가 있어야지.”

“정보라… 그런 게 갑자기 굴러들어올 리가 없잖아. 어차피 한국에서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 한 것도 처음인데.”

“그게… 있어.”

“있다고?”

재호가 연락처를 꺼냈다.

“내 형이 소개해준 에이전트야.”

재호의 말에 따르면 이 에이전트는 미국의 대형 음반 유통사인 위너사의 임원 출신이고, 글로벌 비전 대회 운영도 해본 적이 있다 했다.

“대단하네?”

반응을 하긴 했지만 뭔가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것 같다는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사람이 우리를 보고 싶데. 괜찮을 것 같지 않아?”

하늘이도 동의했다.

“저는 찬성이요. 다른 물에 가는 거니까. 다양한 사람을 만나볼 필요는 있을 거 같아요.”

재호가 나를 쳐다봤다.

“노을이 너는?”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데?”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정보는 많을수록 좋았다.

일단은 만날 약속을 잡아 보기로 했다.

* * *

삼성역의 고급 호텔에 비원더 멤버가 모였다.

글로벌 비전 전문가인 에이전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다들, 혹시나 싶어 오랜만에 말쑥하게 양복을 입고 왔다.

그런데, 상대방을 만나자마자 그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컨설턴트는 나이 든 거구의 백인 남자였다.

풀 쓰리피스 정장을 쫙 빼입고 왔다.

옆에는 통역을 맡았는지 한국인 여성이 한 명 붙어 있었다.

“안녕하시오. 조지요.”

재호가 능숙한 영어로 대답했다.

“통역 안 하셔도 됩니다. 재호입니다.”

조지가 우리 멤버 세 명 모두와 악수했다.

조지의 손이 땀에 젖어 약간 축축했다.

‘긴장했나?’

우리들은 호텔 조식 뷔페를 먹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지가 음식을 뒤척이며 말했다.

“여기는 스테이크를 잘 못 굽나? 고기는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데.”

아침부터 남의 나라에서 스테이크를 먹는 주제에, 반찬 투정이라니 뭔가 좀 쎄하긴 했지만 일단 넘어갔다.

“이 계란도 별로네. 공장식 브로일러 닭을 쓰다니. 호텔 조찬이면 당연히 세심하게 고른 닭을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가만두면 계속 불평만 할 것 같았다.

그의 입을 다물게 할 겸 조지에게 질문했다.

“위너에서 일하셨다고요?”

조지가 깃털을 과시하는 공작처럼 쭈욱 가슴을 폈다.

“위너에서는 임원으로 있었소. 그전에는 체이서 금융 이사였고. 바자 크레딧 카드에서도 일한 적 있었지.”

재호가 감탄했다.

“와~ 대단하시네요.”

“글로벌 스케일이라는 거지. 그에 비하면 TYB는 작은 회사 아니겠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지가 열거한 회사들은 모두 세계 최고의 회사들.

그에 비하면 TYB는 작은 음악 회사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중에도 아직은 아시아에서만 성공을 거둔 회사였다.

조지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그에 비해,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는 세계 최고의 사이즈의 대회요. TYB가 담기 어려울 정도지. 마치 이 나라가 스테이크를 담지 못하듯….”

조지가 똑똑 접시를 포크로 두드렸다.

“네에….”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는 숨겨진 난관으로 가득하오. ‘가이드’가 없으면 제대로 시험조차 칠 수 없지. 가이드를 찾고, 그에게 인정받는 일이 첫 시험이라 봐도 무방하오.”

“그걸 조지 씨가 해주신다고요?”

“그렇지요.”

“음….”

환희가 먼저 침묵을 깼다.

“좋은 거 같은데요 횽들?”

재호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두! 뭐 잘 아는 분들이 도와주신다는데. 해가 될 게 있겠어?”

둘과 달리, 나는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다.

우선 조지에게 툭, 질문을 들이밀었다.

“뭘 바라시죠?”

조지가 잘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끔뻑였다.

“에?”

“가이드를 맨입으로 해주실 리는 없잖아요? 자원봉인가요? 구세군 냄비처럼?”

“아 그건 아니오. 함께 일하자는 거지. 서구권 활동 에이전트를 내가 해주는 조건이오.”

한마디로, 비원더의 매니저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질문을 이어갔다.

“지금은 위너 소속이 아닌 거 같은데. 그럼 어디 계신 거죠?”

“내 회사를 차렸소. 항상 소원이었지. 비원더 같은 재능있는 친구들이 묻히는 걸 너무 많이 봐서 말이오. 안타깝게도 마켓은 그런 리스크를 지지 못하게 하지. 내 직관을 믿고 일하고 싶었소!”

조지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환희가 감탄했다.

“좋은 일 하시네여.”

내 생각은 환희와 조금 달랐다.

포장은 화려했다.

하지만 내실이 없었다.

결국, 그의 경력 대부분이 금융 관련이었고, 음악 관련 경험은 대형음반사 위너에서 재무 담당 이사로 있던 1년이 전부였다.

심지어 지금은 위너의 소속도 아니다.

음악계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대형 음반회사와도 이제는 연이 끊긴 상태였다.

도대체 그가, 자신의 어떤 능력으로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다는 제안인지조차 불분명했다.

“그래서, 가이드가 대체 뭘 해준다는 거죠?”

“그건 말해줄 수 없소.”

“왜죠?”

“기밀이니까. 계약을 한다면 그때부터 하나씩 알려주지. 이 정보가 아니면 예선 통과조차 어려울 거요.”

조지의 눈을 쳐다봤다.

그 속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을 포착했다.

‘역시… 이상하단 말이야.’

애초에, 글로벌 비전은 전 세계 가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래 대회’다.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기껏해야 노래 오디션 아닌가?

특수 요원을 뽑는 시험이 아니란 말이다.

음악 오디션이 ‘가이드’가 필요하고 ‘엄청난 비밀’이 있고, 그게 말이 될까?

그렇게 해서 주최 측이 얻는 유익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굳이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어.’

생각을 정리한 뒤, 조지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러면 조지. 내가 먼저 묻죠. 비원더는 이번 데모 테이프에서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무… 무슨 말이오? 제일 유명한 거 부르면 되는 거 아니오?”

“그래요. 우리 노래 중 제일 유명한 게 뭔가요?”

“시, 실례하오.”

조지가 부리나케 커피잔을 들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방금 전까지 ‘한국 커피는 맛이 없다’며 툴툴대던 사람이 말이다.

재호가 내게 물었다.

“그런 걸 뭐하러 물어봐?”

“저 사람 말이 믿어지냐?”

“뭐?”

“글로벌 비전? 대단한 대회일지 몰라. 하지만 그래 봐야 노래 경연이야. 가이드가 왜 필요해? 게다가 설사 가이드가 있다 해도, 음악을 모르는 재무 담당 임원이 가이드를 한다고? 그게 가능하겠어?”

재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조지가 돌아왔다.

“으… 음식남녀! 그 노래를 추천하오!”

“왜요?”

“그, 그야 가장 대중적인 곡이잖소.”

“호오, 마치 그사이 검색이라도 하고 오신 것 같네요. 하지만 틀렸습니다. 그 곡은 1위 못해본 곡이에요. 저희 노래 중 두 번째로 유명한 노래고요.”

조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그건….”

“아 됐습니다.”

내가 말을 끊었다.

변명을 들어 줄 시간은 없었다.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그럼 그 곡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어떻게 라니?”

“장르. 편곡. 파트 배분… 무엇이든지요. 뭔가 전략이 있어야 하잖아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그건….”

조지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마치, 음악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그때였다.

내 뒤통수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식 남녀를 한다면 좀 더 강렬하게 바꿔야겠지? 예를 들면 휭크(funk) 밴드 컨셉이라던가?”

‘이 목소리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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