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80화 (180/280)

제180화

재호가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당연하지. 지금 해야지 그럼 언제 하겠어?”

정말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천채왕이 불쑥 녹음실로 들어왔다.

“야 너희들~. 나만 빼놓고 무슨 재미있는 일 하려는 거야?”

키미가 반가움에 인사했다.

“선생님!”

“이번 녹음은 나도 같이 보려고 왔어. 괜찮지?”

천채왕이 슬쩍 녹음실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재호가 천채왕의 취향대로, 미지근한 해양 심층수를 한 잔 따라 주셨다.

천채왕이 물을 천천히 마시며 내게 물었다.

“노을아 자신 있어? 이번 녹음은 좀 어려웠다며?”

“내 재즈가 처음이다 보니.”

“그냥 편하게 해. 너 재즈 가수 되라는 사람 아무도 없어.”

“사실… 재즈 리듬을 이해하려고 재즈바도 가보고. 박찬용 선배님하고 이야기도 해보고 했는데요.”

천채왕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뭐하러? 그냥 하던 대로 하지.”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래도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래도 뭔가 좀 걱정이 된다. 노을아. 넌 재즈 가수가 아냐. 천하제일 알앤비 가수지. 재즈도 그렇게 부르면 되지 않을까?”

잠자코 듣고 있던 키미가 슬쩍 눈을 흘기며 한마디를 얹었다.

“선생님.”

“왜?”

“그냥, 들어 보세요.”

“들어봐?”

“들으면 알아요.”

옆에서 재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키미가 손짓으로 나보고 녹음실로 들어가라 했다.

“이번에는 여자키가 아닌, 남자 파트를 부르세요.

‘남자 파트’를 중얼대며 녹음실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곧 사라졌다.

음악이 나오는 그 순간, 고민은 녹아 버리고, 오로지 음악만이 남았다.

게다가 이제는 이 재즈 특유의 리듬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리듬에 맞춰 가볍게 손을 흔들며 노래를 시작했다.

가벼운 스윙 리듬의 관악기 소리에 맞춰 가볍게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리듬에 올라탄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얹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재즈 가수를 흉내 낸 모작은 아니었다.

재즈 리듬에 올라탔을 뿐, 권노을의 노래였다.

세심하게 비브라토를 리듬에 맞춰 컨트롤했다.

재즈는 좀 더 섬세한 컨트롤을 필요로 했다.

내가 주로 불렀던 발라드, 알앤비, 팝과는 달리 좀 더 경쾌하게, 춤추듯 부른다는 점이 달랐다.

뱀처럼 꿈틀대는 베이스를 타고 잔잔하게 노래를 마무리했다.

마지막에는 내 회심의 애드립 파트가 하나 있었다.

좀 심심할 수 있는 노래에 긴장감을 주는 소금 같은 파트였다.

5초 정도 음을 끌며 3단 고음을 날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회심의 알앤비 애드립으로 고음 프레이즈를 매조지었다.

노래가 끝나고, 나는 슬쩍 녹음실 바깥을 살펴봤다.

노래 부를 때 이 부분이 가장 어려웠다.

어느 녹음실도 녹음실 바깥 상황이 안 들렸다.

그저 표정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상당히 밝은 표정이었는데, 오늘은 유독 표정이 짐작하기 어려웠다.

고개를 두리번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천채왕의 목소리가 슬쩍 들렸다.

“권노을 답네.”

“네?”

“권노을답다고. 재즈 가수 같지 않아. 잘했어.”

싱긋 웃었다.

천채왕의 고민을 기우로 만들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때 키미 프로듀서의 코멘트가 콕 찔렀다.

“하지만 비브라토가 조금 과해요. 덜어내고 한 번 더 하죠.”

“예이~”

큰 그림을 제대로 그린 이상, 디테일은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 * *

두어 번 노래를 부른 후 녹음을 마무리했다.

특히 마지막에는 여러 가지 애드립 라인을 시험해봤다.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녹음실에 나오니 키미 프로듀서가 후 작업을 위해 이런저런 노트를 남기고 있었다.

키미가 내게 짧은 코멘트를 남겼다.

“후 작업만 좀 하면 되겠어요.”

재호가 내게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천채왕의 반응이 가장 강했다.

태양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야~. 재즈까지 잘하네.”

“제 노래 같았죠?”

“완전 네 노래 같았어. 릴리는 운도 좋다. 이런 노래에 참여도 해보고.”

“미래의 팝스타인걸요. 제가 영광이죠.”

“아니, 권노을 네가 더 굉장해. 이건 보증하지.”

‘곧 빌보드 폭격할 댄스 가수인데요.’

하지만 그런 말을 굳이 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릴리오브더밸리의 앨범 준비 상황도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릴리인더밸리 앨범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아 그거? 팝 시장은 앨범 발매가 좀 오래 걸리기는 하는데. 이번에는 원래 앨범 발매가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다음 달에는 나올 거야.”

조금 예민한 주제에 들어갈 차례였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 프로듀서 문제는 어떻게 됐나요?”

“아 그거. 여기저기 알아보니 맞는 거 같다더라고. 곡 키미 노래로 바꾸기로 했어.”

“그걸로 끝인가요?”

“글쎄 뭐. 법정에서 한 3~4년은 싸우겠지. 지루하게 싸울 거야. 정확히는 릴리하고 엑스 체인이 싸우는 건 아니고. 변호사들끼리 싸우는 거지만.”

“지치지 않을까요?”

“아 그야 뭐 지치지! 나도 사업하다 보면 법정 다툼처럼 지겨운 게 없어. 웬만하면 좋게 가려 해도 사업은 또 그런 게 아니니까.”

뭔가, 쉽게 쉽게 문제가 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릴리오브더밸리 입장에서 힘들겠네요. 한창 활동해야 할 때 법정 다툼에 엮였으니.”

“그래서 마리가 선물을 준다는데?”

“선물이요?”

“뭔지는 잘 몰라. 자! 일단 그건 그거고. 우리도 우리 갈 길을 가보자.”

* * *

이후로 몇 주간은 다시 밤샘에 가까운 강행군을 했다.

디럭스 버전 앨범 발매를 위해서였다.

뮤직비디오부터 앨범 부클릿까지 모두 새로 만들었다.

헉헉대며 만들면서도 머릿속에는 ‘마리의 선물이 뭘까?’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릴리오브더밸리가 내 디럭스 앨범 성공에 핵심 분수령이기 때문이었다.

잘되어야 할 텐데, 아쉽게도 미래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큰 기대와 약간의 궁금증을 안은 채로 내 솔로 앨범의 디럭스 버전이 나왔다.

[권노을 솔로 앨범 디럭스 버전 28일 발매]

권노을이 오늘 28일 솔로 1집 디럭스 버전을 발표한다.

권노을 솔로 1집 ‘세계’는 80만 장을 넘어 올해 최다 판매 신기록을 세웠다.

이번 앨범 타이틀곡은 팝가수 릴리오브더밸리가 참여한 ‘플라이 미 투 유어 홈’이다.

이에 걸맞게 할리우드 스타 메건 쥬얼이 출연해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를 배경으로 시원한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그 외에도 권노을의 블루스 감성을 엿볼 수 있는 ‘나의 기대’부터 권노을식 뮤지컬 송 ‘초콜릿 아이스크림’까지, 권노을의 다양한 매력을 엿볼 수 있는 신곡 총 3곡을 담았다.

-상술 지리네. 고작 신곡은 3개 임?

ㄴ 그래도 팝가수라니 신선하잖아.

ㄴㄴ 님 알바임? 릴리오브더밸리가 대체 누군데요. 이게 무슨 팝가수야.

ㄴ이번 앨범은 안 사. 1집 샀는데 뭐.

ㄴㄴ 222 이럴 줄 알았음 1집 안 사고 존버할걸.

-진짜 짜증 나는 게 뭔지 암? 이번 앨범보다 디럭스 버전 디자인이 더 맘에 들어!

ㄴ 나도 그래. 진짜 짜증난다? 이거 일부러 멕이려는 거 아냐? 왜 1집은 대충 흑백으로 내고, 디럭스 버전은 화사하게 오색을 넣냐고!

“하하….”

인터넷 기사 댓글을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인터넷 댓글만으로 진짜 민심을 알 수야 없다.

하지만 인터넷 댓글만 차가운 게 아니었다.

실제 판매도 썩 좋지 않았다.

80만 장을 넘어 100만 장을 향해 가야 하는 앨범인데, 디럭스 앨범은 고작 3만 장이 더 팔렸다.

원더풀 팬클럽도, 아직은 ‘디럭스’ 앨범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직은 내 디럭스 앨범에 마음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또 하나 큰 문제가 있었다.

월드컵에서 한국의 여정은 끝났지만, 월드컵 자체는 계속됐다.

게다가 이번 월드컵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인기 팀이 높게 오르며, 계속해서 높은 관심도를 유지했다.

월드컵 보느라 다들 음악방송은 뒷전이었다.

심지어 내가 노래를 알릴 수 있는 예능들도 결방이 속출했다.

다행히, 결승전을 마지막으로 월드컵은 곧 마무리되었다.

축구는 좋아하지만, 솔직히 월드컵이 끝나서 내 곡을 홍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여러 감정을 가진 채로, 동생과 이번에는 월드컵 결승을 함께 집에서 봤다.

동생이 또 내게 잔소리를 시전했다.

“오빠. 디럭스 앨범 나왔는데. 왤케 한가해? 좀 나가! 왜 비밀리에 앨범을 내?”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러겠냐… 나오는 예능이 없는걸. 음방 한번 가면 끝이야.”

“음방을 나왔어?”

“누가 요새 음방 보냐. 다 축구 보지. 너도잖아?”

“그건 그러네.”

박영환 열풍으로 잠깐 내 노래가 뜨긴 했지만, 그건 지나갈 인기였다.

진짜 열풍은 내 노래가 아니라 박영환이라는 ‘축구선수’였으니 말이다.

곧 나는 깨끗하게 잊혀지고, 박영환 선수만 남았다.

돼지 껍데기 과자를 입에 털어 넣었다.

씁쓸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시게 하기 위해서였다.

“으… 그 느끼한 걸 저렇게 휙휙 먹어?”

“얼마나 고소한데. 살도 덜 찌고.”

“난 차라리 안 먹고 만다!”

그러거나 말거나, 월드컵 결승 전, 폐막식이 시작됐다.

격렬한 힙합, 댄스 무대부터 발라드까지, 온갖 팝스타들이 총출동해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불렀다.

그중 압권은 역시 마지막을 장식한 셀레나 존스였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성량으로 대형 팝 발라드를 불렀다.

동생이 내게 물었다.

“저 사람은 영화 OST로 뜬 거지? 다 헐리웃 영화에서 들어 본 노래네.”

“아 너 몰랐어? 그 전에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우승해서 떴다더라고.”

“아 진짜? 몰랐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방영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나도 최근에,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를 준비하면서 안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이게 엄청난 기회라는 것을 실감했다.

지금 현존하는 팝스타들 중 상당수가 이 대회를 계기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좀 쳐지네. 대형 팝발라드로 폐막식 마무리는 좀 그렇지 않아?”

“그러게. 셀레나 존스가 신나는 노래가 있었나?”

그때였다.

갑자기 조명이 꺼지더니, 중독성 있는 신디사이저 음이 울려 퍼졌다.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였다.

“이건….”

그리고 무대에서 갑자기 릴리오브더밸리가 뛰쳐나왔다.

내가 참여한 타이틀곡을, 월드컵 경기 폐막식에서 공개했다.

내 파트인 2절은 셀레나 존스의 몫이었다.

역시나 짬밥 있는 베테랑 팝 가수답게 능숙하게 댄스도 소화했다.

심지어 탑 발라드 가수의 품격마저 느껴졌다.

발라드 가수의 깜짝 변신, 댄스의 신성의 등장, 두 가수 모두 윈윈이었다.

무엇보다 무대가 흥겨워졌다.

댄스 음악의 강렬한 비트가 플로어를 달구었다.

이제야 비로소, 월드컵 결승전을 치를 수 있는 분위기가 좀 되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솔직히 ‘플라이 미 투 유어 홈’ 개띵곡임. 반박시 음알못

ㄴ 나도 원래부터 그렇게 생각했음

-릴리인더밸리!!! 그 빌보드 1위 데뷔한 그 미친 신인? 그 사람을 벌써 섭외하다니 미쳤다 권노을

ㄴ 팝스타랑 킹오브싱어 권노을 듀엣이라니 혜자네 혜자.

-이 앨범 어디서 구하나요? 우리 동네 서점은 다 떨어졌던데.

어느새 인터넷은 내 디럭스 앨범을 찬양하는 댓글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흐뭇하게 댓글을 읽으며 용기를 얻었다.

기사를 보다 보니, 이번 주 발매 앨범을 소개하는 기사도 보였다.

호기심에 클릭해봤다.

어쩌면 이번 주에 나오는 신보도 내 앨범의 잠재적 경쟁자였다.

그런데, 이번 주 발매 앨범 중에 낯익은 앨범이 있었다.

‘하필 이놈이 왜 앨범 발매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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