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그때였다.
미도리에게서 전화로 연락이 왔다.
-노으루 군!
“안녕하세요.”
-지금 시간 좀 돼요?
미도리는 지금 ‘바질리스크’의 멤버들과 함께 홍대에서 밥을 먹고 있다고 했다.
기존 기획사 및 보컬 김종윤과 연을 끊고 하는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어차피 연습을 더 한다고 곡을 잘 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장소 또한 재즈 라운지였다.
뭔가 재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과감하게 환경을 바꿔 보기로 했다.
“갈게요.”
* * *
미도리와 바질리스크 멤버들은 홍대의 모 재즈 라운지에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내가 먼저 바질리스크에게 인사했다.
“다들 새 출발 축하드려요.”
박요한이 내게 악수했다.
“고맙군. 덕분에 새로 시작할 수 있었어.”
“이름은 뭐로 바꿨어요?”
“살렸어. 그런 이름 따위 필요 없다는군.”
김종윤 솔로 앨범으로 기획사가 활동할 예정이라 했다.
내가 솔직한 감상을 남겼다.
“발라드 솔로 할 정도 가창력은 아닌 거 같았는데요.”
미도리가 푸훗 웃었다.
“신랄하네요.”
“저는 바질리스크의 원래 음악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기대할게요. 준비 잘되고 있나요?”
바질리스크는 착실하게 음악을 준비 중이었다.
그들과 함께 바질리스크의 새로운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강렬한 팝펑크 음악과는 대조적인, 잔잔한 재즈 연주가 들렸다.
귀를 기울였다.
내가 딱 바라는, 잔잔하면서도 리드미컬한 재즈 음악이었다.
박요한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음악 좋지?”
“그러게요. 굉장히 고급스럽네요. 요한 님도 재즈 기타 치시나요?”
“설마! 재즈는 모든 장르 중에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야. 감히 도전할 엄두도 안 나.”
나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다른 어떤 장르와는 달리, 재즈곡은 정말 건드리기 어려웠다.
게다가 녹음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냥 어색한 채로 불러야 하나?’
그러던 중에도 재즈 연주는 계속되고 있었다.
정말 화려한 즉흥연주였다.
나도 저렇게 유려하게 내 목소리로 연주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고민을 그만두고, 서서히 시선을 돌려 밴드를 살폈다.
“어!”
그곳에는, 많이 익숙한 사람이 앉아 드럼을 치고 있었다.
내 모든 공연에서 드럼을 쳐주는 박찬용 드러머가 그곳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박찬용 선배!”
* * *
작은 바에서의 연주는 훨씬 자유로웠다.
연주 세션이 끝나고 박찬용 매니저가 반갑게 우리를 보고 인사했다.
심지어 뒤풀이를 겸해서, 우리의 자리에 합석했다.
내가 그의 취향인 하이볼을 따라주며 말을 걸었다.
“재즈도 하시는 줄 몰랐어요.”
“나밖에 없을걸세. 보통 록, 팝을 하는 드러머는 재즈는 어려워하지.”
“선배는 어떻게?”
“오래 하다 보니 이거저거 다 하게 된 거 아니겠나. 별거 아니네.”
“일반적인 음악과 전혀 다르던데요.”
재즈 라운지에 온 덕에, 바로 눈앞에서 재즈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박찬용의 재즈 드럼 연주는 평소와 전혀 달랐다.
일단 리듬감이 미묘하게 변화무쌍했다.
주요 리듬은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조금씩 변화를 줬다.
사운드도 달랐다.
드림 스틱이 아닌 브러쉬로 쓰다듬는 듯한 사운드가 섞여 있었다.
좀 더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아무래도 드럼이 다르다 보니, 불러야 하는 노래의 리듬감도 달라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박찬용이 되물었다.
“갑자기 재즈에 관심이 많아졌나?”
“제가 사실… 재즈곡을 불러야 하거든요.”
박찬용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가 갑자기 하이볼을 저 멀리 치웠다.
그리곤 말했다.
“마침 내 연습실이 여기 근철세. 와보겠나?”
* * *
바질리스크와 미도리에게 인사하고, 박찬용의 연습실로 향했다.
정말 박찬용의 드럼 연습실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박찬용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 곳이 있지만 이 홍대 재즈바가 내 음악의 고향 같은 곳이라네. 일부러 연습실도 재즈바 근처에 구했지. 그래야 바에서 연주하는 연주자를 슬쩍 불러서 합주도 해볼 수 있고 말일세.”
“그렇군요.”
박찬용다운 심플한 연습실이었다.
그저 드럼과 자신의 사운드를 확인할 수 있는 음향 장비, 그것뿐이었다.
박찬용이 음악을 틀었다.
화려한 기타 연주가 주도하는 퓨전 재즈 음악이었다.
이에 맞춰, 박찬용이 깔끔하게 재즈 연주를 시작했다.
너무나도 섬세하고 잘게 비트를 쪼개, 가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굳건하게 음악 전체를 지탱했다.
그야말로 재즈의 심장과 같은 연주였다.
연주가 끝나고 박찬용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
“어떤가?”
“너무 좋은데요… 경쾌하고 힘 있고. 저도 이런 드럼에 어울리는 노래를 하고 싶네요.”
“노래라니?”
박찬용에게 새로운 곡 발표 계획을 말했다.
신인 팝 가수와 듀엣을 부를 예정이고, 그 장르가 하필 재즈였다.
그런데 도저히 재즈 느낌이 나지 않아서 고민인 상황이다, 라고 전달했다.
잠잠히 듣던 박찬용이 툭, 말을 뱉었다.
“기분 나쁘군.”
“네? 왜요?”
“왜 그런 재미있는 곡에 나를 안 끼워 준 건가!”
“아 제가 한 게 아니고… 워낙 급해서 재호랑 키미 프로듀서가 휘리릭 미디로 찍은 걸로 압니다.”
“그까짓 거 그냥 내가 한번 똑같이 쳐주면 되는데….”
박찬용이 한참을 투덜대더니 내게 말했다.
“재즈는 평생 파도 완성하기 어려운 장를세. 아무도 자네가 완성도 높은 재즈 보컬이 하루아침에 될 거라곤 생각지 않아. 그냥 하면 되지 않겠나?”
사실 나도 박찬용 드러머와 비슷한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납득이 100% 가지 않는 장르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뭔가 좀 더 잡히는 것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뱍찬용이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서 브러쉬와 드럼 스틱을 가져와 내게 쥐여 주었다.
“한번 쳐보겠나?”
“연주요?”
“하룻밤 만에 드럼 연주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네. 스틱 하나로 하이햇 리듬 치는 법만 하나만 연습해보면 어떻겠나?”
드럼을 하이햇에 가져다 대 봤다.
강렬한 ‘챙!’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이크조차 필요 없는 악기만의 파워가 느껴졌다.
서서히 하이햇을 쳐보기 시작했다.
[챙 챙 챙 챙 챙 챙 챙]
그리고 박찬용 드러머의 연주를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박찬용 드러머가 연주했던 느낌은 이런 게 아니었다.
좀 더 미묘한 그루브… 강약 조절이 있었다.
“뭔가 다르네요.”
“그렇게 쉽게 배울 수 있으면 내가 어떻게 먹고살겠나. 자. 내가 보여줄 테니 다시 잘 들어보게.”
[채챙 채챙 채챙 채챙]
같은 소리라도 박찬용의 소리에는 좀 더 리듬이 느껴졌다.
강약 조절로 만든 묘한 리듬감에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감탄이 나오는 연주였다.
“도저히 선배님 같은 느낌은 안 나네요.”
“내 연주를 흉내 내려 하지 말고, 그 안에 들어있는 박자감을 잘 찾아보게.”
“연주 안에 들어있는 박자….”
이후 박찬용 드러머와 특훈이 시작됐다.
“더!”
“더!”
“조금만 더!”
처음에는 짜증 났는데, 나중에는 괜찮아졌다.
아니, 아예 ‘감정’이란 것이 사라졌다.
그저 세상에 드럼과 나, 단 둘뿐이었다.
그렇게 하이햇을 치고, 치고, 또 쳤다.
스틱만 잡아도 심벌즈를 치는 감각이 느껴질 때 즈음, 뭔가 이전과는 다른 청아한 소리가 들렸다.
[채챙]
“……!”
박찬용 드러머 또한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얼른 물었다.
“괘… 괜찮았나요?”
“방금 전 그 하이햇은 괜찮았네.”
“그럼 이제 재즈 드럼 칠 수 있는 거죠?”
“무슨 소리. 이 속도로는 기본 리듬도 3개월은 무릴세!”
“…….”
그날은 새벽까지 드럼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
* * *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 보니 양재동 연습실이었다.
시간은 이미 오후 3시를 넘어가 있었다.
새벽까지 박찬용의 연습실서 연주하다 쓰러진 나를 배영웅 매니저가 데려다준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고, 재호가 들어왔다.
“일어났어?”
“어….”
“어제 박찬용 선배님 연습실서 드럼 연습했다며? 뭘 한 거야?”
“드럼 연습했지. 잘 아네.”
“갑자기 그런 걸 해서 뭐 하게? 연주자 되려구?”
“그건 아니고… 너는 드럼 연주해 본 적 있냐?”
“연습 삼아 좀 해본 적은 있지만… 미디로 찍지 전문적으로는 못 하지. 왜?”
“한번 꼭 박찬용 선배한테 가서 배워봐. 도움이 될 거야.”
“그래서 너는 뭘 배웠어? 이제 연주 가능한 거야?”
“아니! 전혀 안 되지.”
재호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내게 핀잔을 줬다.
“그럼 그게 무슨 소용인데?”
내가 눈을 꼬옥 감았다.
내 머릿속에는… 내가 이번에 부를 재즈 타이틀곡, ‘플라이 미 투 유어 홈’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보였다.
그중에도, 가상의 드러머가 보였다.
…사실 재호와 키미 프로듀서가 미디로 찍은 드럼이니까, 존재하지 않는 드러머였다.
하지만 그 가상의 드러머의 ‘리듬’이 이제는 손에 잡혔다.
내가 만지고, 가지고 놀 수 있는 어떤 질감의 물체로 변한 느낌이었다.
“나는 노래에 엄청 도움이 됐어. 드러머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한 것 같아. 너도 도움이 될 거야.”
곧 녹음을 다시 재개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 저절로 어떻게 노래해야 할지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번 녹음은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호가 나를 툭 쳤다.
“그럼 준비 다 됐다고 키미 선생님한테 전달한다? 곧 녹음 약속 잡을게.”
* * *
1시간 후 양재동 녹음실.
…‘플라이 미 투 유어 홈’ 노래가 끝났다.
가볍게 한 번 완창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녹음실 바깥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답답해서 내가 녹음실에 나왔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피드백을 요청했다.
“노래 어땠어요?”
재호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다시 불러야 돼 너!”
“왜 화를 내?”
“너가 화음이잖아? 근데 멜로디 파트를 불렀어. 애드립 파트도 가져갔구.”
“아… 나도 모르게 버릇대로 해버렸네.”
비원더에서 나는 언제나 가장 높은 음을 냈다.
혹시 재호가 가성 고음 애드립을 가져갈 때는 있었지만, 진성으로 부르는 가장 높은 음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도 모르게, 가장 높은 고음들을 내가 불러 버렸다.
여성 가수와의 듀엣이니만큼 당연히 내가 아랫음을 불러야 했는데 말이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키미 프로듀서가 잠자코 말했다.
“그래도 기가 막힌 노래였어요.”
“아 감사합니다.”
“믿어지지가 않네요. 여자 음역대로 재즈를 부르다니.”
“아… 감사합니다.”
키미가 손을 튕겼다.
‘딱!’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다시 불러야 하는 건 변함없어요. 다시 들어가요. 이번에는 파트 지켜주세요.”
“네이~. 한 번만 들려주세요.”
키미가 선선히 노래를 들려주었다.
키미가 들려준 노래를 듣자 슬며시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전에 내 노래는, 재즈 같지가 않았다.
록이나 발라드, 아니면 기껏해야 블루스 정도의 리듬감만 있었다,
드럼 특훈을 끝낸 후에는 달랐다.
재즈 싱어다운 느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거기에 내가 원래 구사하던 알앤비 감성도 적절히 섞였다.
딱 내가 바라던 방식의 노래였다.
‘감 잡았어!’
노래를 부르러 들어가려는데 키미 프로듀서가 중얼대는 말이 들렸다.
“좋네요. 바로 다른 장르를 흡수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 앞으로는 이런 게 필요해요. 곧 글로벌 비전 콘테스트 데모 테이프를 만들 때가 오니까요.”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벌써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