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78화 (178/280)

제178화

천채왕이 눈을 끔뻑였다.

“무슨 곡인데?”

내가 컴퓨터를 살짝 조정해서 미리 다운 받아둔 노래를 재생했다.

“들어보세요.”

“지금?”

천채왕의 질문에 대답할 틈도 없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키미가 엑스 체인의 곡을 듣고는, 자극받아서 만든 노래였다.

얼핏 듣기에는 엑스 체인의 느낌이 났다.

하지만 듣다 보면, 케이팝다운 화려함도 살짝 가미되어 있었다.

1절은 엑스 체인의 느낌이 나는 심플한 비트로 가고. 2절의 한국 느낌 나는 부분을 내가 피처링을 하면 충분해 보였다.

노래를 듣고 난 뒤, 천채왕의 표정이 뭔가 미묘했다.

그가 살짝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뭔가 괜찮긴 한데 잘 그림이 안 그려지는데? 내가 팝가수 노래를 프로듀싱 해본 적이 없잖아 노을아. 이게 좋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제 노래라면 어떨까요?”

“너는 댄스 가수가 아니잖아. 팝 댄스 솔로는 또 느낌이 다르니까.”

“그렇군요.”

천채왕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었다.

직접 팝가수에게 노래를 불러 보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과감하게 키미 작곡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자마자 키미에게 지금까지 사정을 설명하고는 천채왕에게 전화를 넘겼다.

천채왕 또한 놀란 눈치였다.

“뭐? 이게 키미가 만든 곡이었어? 어디 보자… 야. 한국 사람이 쓴 곡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게다가 내 눈앞의 사람이라니.”

천채왕이 하하호호 통화를 좀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내가 물었다.

“어떻게 하시기로 했나요?”

“일단 가이드를 좀 수정해야겠어.”

“네?”

“노을이 니가 지금 한 번 불러봐. 배 실장님, 녹음실 좀 비워 주세요~.”

* * *

바로 녹음실로 자리를 옮겨, 시험 삼아 가이드 곡을 불러 보았다.

가이드 곡 가사는 모두 영어였다.

영어라기보다는 외계어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말이었다.

‘외국인에게 줄 곡 가이드 보컬 녹음은 또 처음인데.’

내가 미래의 팝스타의 첫 히트 싱글에 피처링하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내가 부르는 이 곡이, 그대로 빌보드 차트 1위 곡이 될 운명일 수도 있었다.

떨렸다.

노래 부르기 전 키미 프로듀서에게 전화했다.

어떻게 부르면 좋겠냐 묻기 위해서였다.

키미 프로듀서의 조건은 간단했다.

-그냥 미친 듯이 신나게 불러줘요. 내일 죽을 사람처럼.

그런 류의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없었다.

제법 어려운 요청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팝가수야 팝가수. 빌보드 1위를 곧 할 가수! 그 가수가 영원히 기억될 릴리오브더밸리의 첫 히트곡!’

그 곡에 내 목소리를 영원히 박아 넣을 기회였다.

당연히, 놓치고 싶지 않았다.

대충 연습을 끝내고, 녹음실로 가려는 길에 천채왕이 스치듯 말했다.

“잘됐다.”

“네? 이거… 범죈데요.”

“아니! 범죄에 엮일 수도 있는 지금 상황이 잘됐다는 게 아니고, 네가 이 곡을 불러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게 잘됐다고.”

“어째서일까요?”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 준비를 할 수 있잖아. 거기서는 전 세계인 상대로 장기 레이스를 해야 해. 별별 미션이 다 있어. 팝댄스곡 미션도 있을걸? 그런 경험을 미리 해보는 건 아주 좋지.”

실전 연습이라 생각하고 임하라는 뜻이었다.

녹음실에 들어가 음악을 기다렸다.

곧, 키미 프로듀서가 제공한 주술적인 신디사이저 소리가 들렸다.

댄스음악은 발라드처럼 감정을 세밀하게 계산할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는 비트가 주는 그루브에 미쳐야 했다.

그야말로 혼을 놓아버리는 느낌으로.

리듬에 맞춰 노래를 불러댔다.

가이드이니만큼 노래 자체도 ‘턴이업!’ ‘예아!’ ‘렛츠 댄스!’ 같은 추임새뿐이었지만 말이다.

노래가 끝나고, 녹음실을 나왔다.

천채왕의 표정이 미묘했다.

“왜 그러시죠?”

“…이거 여성 키를 그냥 불렀네? 한 옥타브 올려서?”

“네. 뭐 원래 그런 노래니까요.”

“야 노을아 그게 말이 되냐? 한 옥타브 올려서 록발라드도 아니고, 리듬감 살려서 댄스곡을 부른다는 게. 햐… 괴물 같은 놈.”

“아 그게 그렇게 되나요?”

천채왕은 바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거면 되겠어. 가서 담판을 짓고 올게. 노을이 너는 우리 타이틀곡 노래연습 하고 있어!”

천채왕이 서둘러 어딘가로 뛰어나갔다.

이걸로 일단 급한 불은 끈 듯했다.

* * *

천채왕이 나간 뒤에야 양재 녹음실에서 아직도 재호와 환희가 숙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니들 여기서 뭐하냐?”

환희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뭐 할 거 같아요 횽. 당연히 곡 작업하는 그잖아요.”

“숙소 생활 시작했냐?”

“그래야 할 거 같아여. 곧 저희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 준비해야 하니까여.”

“벌써 그렇게 됐나?”

글로벌 버전 송 콘테스트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당연하져 횽.”

묵묵히 듣고 있던 재호도 환희 말을 거들었다.

“대회 중에 곡을 쓰기 시작하면 이미 늦어. 상대는 전 세계의 베테랑 뮤지션들이잖아. 10년씩 활동한 사람들이 평생 준비한 곡들을 꺼내 든다구.”

“하긴….”

엑스 체인의 노래를 들었을 때의 충격이 다시 생각났다.

정말 강렬한 노래였다.

한국 가요에서는 선뜻 선택하지 못하는 단순함이 거기에는 있었다.

그 단순함!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강렬하게 사람을 빠져들게 했다.

엑스 체인의 경우에는 댄스곡이었지만, 아마 댄스곡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록 음악부터 재즈, 클래식, 팝, 심지어 힙합까지, 온갖 종류의 음악들과 대결을 한다 생각해야 했다.

심지어 지난번 세계 대회 우승자는 레게 음악가였다.

“…확실히 좀 문제가 될 것 같네.”

“그래. 팝가수들에게 지지 않을 곡을 써놓아야지. 너도 솔로 활동 끝나면 녹음실 들어와.”

좋은 생각이었다.

바로 동의했다.

그리고는 재호와 환희가 그간 써놓은 곡들을 확인했다.

일부러 재호는 장르에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컨셉의 곡을 시험 중이었다.

그중에는 록발라드, 댄스, 포크 음악, 성악곡 심지어 불경을 테마로 한 실험적인 종교음악까지, 그야말로 온갖 장르가 다 들어 있었다.

환희 또한 지지 않고 다양한 곡을 썼다.

세계 대회를 준비하다 보니 영어 가사의 비중을 잔뜩 늘렸다.

당장 써먹기에는 부족한 노래였지만 그래도 미리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듯했다.

그러고 보니 불현듯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꼭 곡을 우리가 쓸 필요는 없잖아? 우리 명의면 되는 거 아냐?”

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져?”

“그럼, 그냥 전 세계 작곡자들에게 비트를 받고, 우리 셋이 그걸 우리에게 맞게 수정해서 준비하면 어때? 그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재호가 무릎을 쳤다.

“그걸 왜 생각 못 했지? 당장 매니저님한테 물어봐야겠네.”

일단 최대한 많은 실탄이 필요했다.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직접 만들지 않아도 됐다.

재호가 말을 얹었다.

“…하지만 얼굴 모르는 작곡가랑 작업하는 게 꺼려지기도 해. 누구인지 모르잖아?”

“무슨 말이야?”

“범죄자가 쓴 곡이면 노래하고 싶어?”

“음….”

하필 타이밍도 좋았다.

성폭행범의 노래를 부를 뻔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이미 천채왕에게 말한 이상, 곧 전 세계를 달굴 뉴스가 될 예정이었다.

둘에게 프로듀서 엑스 체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가 신인가수를 협박하고 다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자 환희가 혀를 찼다.

“와… 쓰레기네여. 그런 거보다야 대형기획사가 낫겠어여.”

재호도 말을 덧붙였다.

“그래, 그런 놈들인지 어떻게 알고… 참 어려워.”

“그렇다고 꼭 ‘우리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하고만 작업할 수는 없잖아? 그것도 너무 우리를 가두는 거 아니야?”

재호 또한 애매한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싫어. 잘 알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하고만 음악 하고 싶어. 가능하면 그렇다는 거거덩?”

환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참… 복잡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창작자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따라줘야 했다.

그들 마음에 안 드는 음악은 비원더의 음악이 아니니까.

* * *

그사이에 통화가 끝났는지 천채왕이 다시 나를 호출했다.

천채왕의 대답은 간결했다.

“마리가 고민하더니 알아보겠다더군.”

“그러면…?”

“뭐 고소를 하면 역고소, 항소는 기본이니까. 몇 년은 걸리겠지. 그게 법치주의 국가니까.”

“그렇군요.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군요.”

“마리는 타이틀곡을 바꾸고 싶어 해. 키미 노래 들려주니까 괜찮다고 했어. 하지만….”

하지만?

“무슨 문제가 있나요?”

“엑스 체인과 릴리오브더밸리의 사이가 안 좋아지겠만, 엑스 체인의 인맥인 다른 작곡가들도 앨범에서 곡을 뺄 것을 우려하더라고. 그렇게 되면 앨범이 더 이상 원래 컨셉이 아니게 되니까.”

“비열하네요.”

그런 식으로 압박해서 신인 가수들을 이용했던 것이 분명했다.

많이 해본 놈의 솜씨였다.

사실, 릴리오브더밸리는 전혀 모르는 가수였다.

잘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랴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녀와 타이틀 피처링 품앗이를 약속한 상황이다.

그녀가 잘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내 피처링이 내 커리어에도 좋은 영향을 줄 테니까.

그러자면 그녀의 데뷔 앨범이 흥행해야 했다.

키미가 모든 곡을 작곡해 줄 수는 없었다.

곡이 더 필요했다.

“엑스 체인보다 더 프로듀싱에 힘이 있는 사람…… 이 필요하겠군요.”

“그래. 작곡해줄 필요도 없어. 작곡가 풀이 필요한 거니까. 내가 해줄까 했지만. 나는….”

“네… 팝가수랑 작업은 안 해보셨으니까요.”

팝가수…. 팝가수…. 팝가수?

팝가수랑 작업을 해본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

이스트 웨이브가 떠올랐다.

“선생님. 이스트 웨이브에게 연락해주시겠어요?”

“왜?”

“릴리오브더밸리를 소개해주면 될 것 같은데요.”

그 김에 겸사겸사 비원더 곡도 좀 받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이스트 웨이브의 곡은 확실히, 한국에서 안 먹혔다.

앨범에서도 수록곡 신세였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먹혔다.

이스트 웨이브의 곡이라는 이름값과 실제 팝 감성을 자극한 멜랑콜리한 무드 덕분이었다.

일본, 구룡도 등 아시아 차트에서 어느 정도 반응이 왔다.

심지어 유럽, 호주, 캐나다 등에서도 탑 10안에 드는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특히 서구권은 아예 홍보를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긴 결과가 의미가 컸다.

이스트 웨이브 또한, 타이틀곡 선정 여부에 신경 쓰지 않았다.

곡 자체가 마음에 든다며 또 작업하자는 말을 했다.

심지어 신규 앨범에 내 노래도 넣겠다며 피처링 녹음도 해둔 상태였다.

‘…내 이전 생 기억에 따르면 그게 앞으로 3년 뒤라는 게 문제지만.’

천채왕 또한 ‘이스트 웨이브’라는 내 말을 듣자마자 대충 내 생각을 눈치챈 듯했다.

“…그래, 이스트 웨이브라면 좋은 대안이 되겠네. 힙합 프로듀서지만 EDM 씬과 협업도 자주 했고.”

하나하나 문제가 해결되어 가고 있었다.

천채왕은 이스트 웨이브와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그 김에 ‘비원더’의 곡도 좀 받아달라는 요청도 했다.

이번 앨범이 끝나면, 비원더의 음악을 전 세계에서 수급하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이걸로 모든 문제가 대충 해결된 것 같았다.

근데 뭔가… 뭔가… 하나가. 정작 가장 중요한 게 준비가 안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벽에 붙인 달력에 시선이 꽂혔다.

……!

내일까지… 정작 내 타이틀곡을 녹음해야 했다.

그런데 녹음이 전혀 되지 않았다.

내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장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재즈를… 소화할 수 있을까? 그것도 단 하루 만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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