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공연이 끝난 후 대기실은 아수라장이 됐다.
바질리스크 김종윤이 무대 감독에게 거칠게 항의를 했기 때문이었다.
“왜 임의로 무대 순서를 바꿔요! 저희가 마지막이라고 계약했잖아요!”
무대감독 또한 지지 않고 맞섰다.
“니들이 망친 분위기 간신히 레전드 선배 가수가 살려놨더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오창선 선배 들으면 어쩔라 그래?”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마지막으로 하는 게 약속이잖아요!”
분위기가 싸 해졌다.
바질리스크와 무대감독의 말다툼은 복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문도 닫았다.
그래도 다 들렸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혼잣말을 했다.
“구경이나 할까?”
박찬용 드러머가 막았다.
“가만히 있게!”
재호도 동의했다.
“이럴 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최고지. 뭐 주먹 쥐고 싸울 거야?”
“그건 아니지.”
“그럼 가만히 있어 그냥.”
조금 지나가 복도가 조용해졌다.
내가 슬쩍 물었다.
“가볼까요?”
배영웅 매니저가 먼저 일어났다.
“제가 가볼게요.”
배영웅 매니저가 슬쩍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바로 앞에 바질리스크 멤버들이 서 있었다.
짐짓 안 놀란 척 내가 물었다.
“무… 무슨 일이시죠?”
슬쩍 멤버들을 스캔했다.
다들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요한이 내게 물었다.
“미도리 보러 왔는데.”
“아 요한!”
미도리가 반갑게 인사했다.
요한이란 남자가 미도리와 지인인 바질리스크의 기타리스트인 모양이었다.
보컬리스트 김종윤은 보이지 않았다.
미도리가 기타리스트에게 물었다.
“요한. 윤은 어딨어?”
“방금까지 지랄하다 나갔다. 망한 게 다 우리가 곡을 구리게 써서라는군. 어차피 타이틀곡은 다 돈 주고 사 온 곡들인데 말야.”
내가 물었다.
“밴드가 곡을 사요? 그럼 밴드로 하는 의미가 없잖아요?”
기타리스트 박요한이 씁쓸하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말했었지. 안 들었지만.”
박요한에게 내가 말을 이었다.
“‘바질리스크’ 이전 음악을 쭉 들어봤습니다.”
“그래? 고마운데.”
“고마워하실 건 없어요. 미도리가 들려준 거니까요. 노래 좋던데요.”
박찬용이 거들었다.
“인디 때 노래는 괜찮더군. 연주가 굉장히 안정적이야.”
맞는 말이었다.
간단한 쓰리코드만으로 밀어붙이는 팝펑크 연주는 보기엔 쉬워 보였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단순한 진행으로 승부하기에, 오히려 리듬과 사운드가 변화무쌍해야 했다.
단단한 리듬감, 베이스의 그루브, 거기다가 기타의 확고부동하면서 강렬한 사운드가 받쳐줘야 했다.
초기 바질리스크의 음악이 그랬다.
한국의 열악한 인디 씬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오소독스한 사운드였다.
그렇다고 연주에만 매몰된 음악도 아니었다.
멜로디 감각도 훌륭했다.
가사에 착 맞는, 그러면서도 에너지로 가득한 멜로디였다.
굳이 부족하다면 한 부분이 부족했다.
“보컬이랑은 좀 안 붙더군요. 보컬리스트는 따로 쓴 거 아니에요?”
“그래.”
“처음에는 기타 치면서 노래까지 부르셨겠군요.”
“그걸 어떻게 알지? 내가 보컬일 때 노래는 남긴 적이 없는데.”
“초기 노래가, 요한 씨 목소리랑 더 어울리는 느낌이네요. 김종윤 씨 레인지에는 안 붙는 노래를 억지로 부르게 한 느낌이에요.
“그게 노래만 듣고 느껴지나?”
당연히 느껴졌다.
코러스 짬밥이 몇 년인데.
게다가 ‘바질리스크’처럼 밴드에 잘생기고 발라드 하는 보컬이 들어가서 죽도 밥도 안 되는 경우는 한둘이 아니었다.
너무 많은 예시를 봐서, 대충 봐도 감이 왔다.
“저는 바질리스크 본 모습이 더 좋아요.”
“뭐 이제는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게 됐어.”
“왜요?”
“종윤이가 우리랑은 못 하겠다고. 멤버 교체하겠다고 먼저 나가버렸으니까. 바질리스크란 이름은 기획사가 가지고, 기획사는 인지도 있는 보컬만 남기고 아예 새로 그룹을 만들려나 보더군. 그렇게 해도 잘됐으니까.”
가요계에서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잘된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잘된 거 아니에요?”
“뭐가?”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본인다운 음악으로. 저는 그런 음악 들어보고 싶어요.”
미도리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보탰다.
“응원할 게 요한.”
바질리스크의 멤버 3인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요한이 내게 말했다.
“고맙군. 용기를 줘서.”
“연락하세요.”
내가 배영웅 매니저의 연락처를 건넸다.
“뭘?”
“앨범 나오면요. 꼭 연락 주세요. 들어볼게요.”
“하하!”
요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우리 셋이 다시 태어나는 날이다. 앨범이 나오면… 꼭 들려주지.”
그리고 바질리스크 멤버들이 대기실을 나갔다….
박찬용이 그들을 보며 코멘트했다.
“옛날 생각나는구만. 연주를 아무리 잘해도 먹고살기 참 어렵지. 밴드면 더더욱.”
하지만 왠지, 그들의 음악은 잘될 것 같았다.
바질리스크의 뒷모습이 너무도 밝아 보였으니까.
그때였다.
배영웅이 다급하게 내게 전화를 가져왔다.
이름을 확인했다.
천채왕 프로듀서였다.
“선생님?”
-노을이 너, 지금 당장 회사로 와라!
“???”
* * *
천채왕의 다급한 호출에 퇴근을 포기하고 바로 압구정 TYB 본사로 향했다.
향하는 차 안에서 배영웅이 상황을 설명했다.
월드컵 거리 공연을 보던 미국의 최대 음반 배급사, 유니버스 스튜디오의 중역이 내 무대를 확인했다고 했다.
호기심이 생긴 그녀가 바로 ‘권노을’을 콜했고, TYB에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당연히 세계 최대 음반사의 중역의 제안에 깜짝 놀란 천채왕이 나를 바로 데려오겠다 한 것이었다.
본사에서 회의실로 들어갔다.
비원더는 회의실을 거의 쓰지 않았다.
최소한의 멤버로 운영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예외였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직원들이 많이 보였다.
팀장급, 심지어 임원급으로 보이는 인물들도 잔뜩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천채왕이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천채왕이 무겁게 배영웅에게 물었다.
“배 실장, 내용은 이야기했나?”
“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컨퍼런스 콜 이어 주게.”
천채왕이 지시하자, 어디론가 전화 연결이 되었다.
-헬로.
사무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어 억양은 묘하게 미국보다는 영국의 향기가 났다.
아니면… 캐나다라던가?
“안녕하세요.”
-원래 제작자에게만 연락하는데, 직접 목소리를 듣고 싶었어요.
“아 네… 무슨 일이시죠?”
-멋진 공연이었어요. 그런 공연, 미국에서도 몇 번 못 봐요. 훌륭해요.
“가, 감사합니다.”
희한한 감정에 휩싸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내가 월드컵 경기 응원 무대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봤다.
정말 어디서 터질지 모른다 싶었다.
마리가 계속 말했다.
-본론만 말할게요. 피처링 해줄 수 있어요?
“피처링이요? …누구요?”
-매니저한테 전화 돌려줘요.
천채왕이 잽싸게 내게서 전화를 돌려받았다.
이 정도면 매니저가 아니라, 오너인 천채왕이 이야기해야 할 안건인 모양이었다.
“협상은 저와 하시면 됩니다. 이사님.”
그리고는 천채왕이 내게 씨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옆에 변호사로 보이는 인물들이 자리를 잡고 천채왕에게 서류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지루한 통화가 끝나고, TYB와 유니버스 스튜디오가 합의한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유니버스 스튜디오가 밀고 있는 신인 가수 ‘릴리 오브 더 밸리’의 새 앨범에 피처링을 하기로 했다.
대신, 릴리 오브 더 밸리 또한 내 곡에 피처링을 하나 받기로 했다.
회의가 끝나고 배영웅이 천채왕에게 물었다.
“릴리 오브 더 밸리… 잘 모르는 이름이네요.”
천채왕이 선선히 대답했다.
“신인이니까.”
“신인가수 피처링보다는 유명 가수 피처링을 받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아니야. 우리 루아 미국 앨범 만들어 봤잖아. 지금 유명한 애들이라고 내년이라고 유명해지리란 보장이 없어. 그리고 릴리 앨범 들어봤는데 느낌이 좋던데!”
“그럴까요?….”
배영웅이 걱정스럽게 서류를 살펴봤다.
사실 배영웅 매니저의 말이 정론이었다.
제아무리 유니버스 스튜디오라도, 신인 가수가 성공할 확률은 1%도 되지 않았다.
오래 갈 확률은 더욱 낮았다.
‘과연 신인 가수의 앨범 피처링이 그리 대단할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릴리 오브 더 밸리는 올해 말, 전설적인 데뷔 앨범을 낼 예정이었다.
빌보드 ‘줄 세우기’를 시키고, 2020년대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수가 되었다.
그런 가수의 피처링을 받는다니, 무조건 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설적인 팝 댄스 가수가 될 사람에게 피처링을 받다니… 이게 웬 떡이냐!’
* * *
[발매 후 15일 차.
총 64만 장 판매.
앨범 판매량 100만 장 달성까지 앞으로 남은 판매량: 36만]
거리응원 열풍으로 상당히 많은 앨범이 더 팔렸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치까지 온 듯했다.
앨범 판매량이 더 이상 늘지 않고 있었다.
앨범을 아직까지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앨범을 산 듯했다.
그래서 천채왕 프로듀서가 내린 특단의 대책이 바로 ‘디럭스 버전’이었다.
해외 팝 스타도 당시에는 보너스 트랙과 신곡을 껴서 디럭스 앨범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나도 해보자고 했다.
레코딩 버전부터 라이브 버전까지 다양한 음원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화룡점정을, 릴리오브더밸리와의 듀엣곡으로 하려 했다.
이번에는 이전 피처링과는 달리, 제대로 만나지도 않고 파일만 전달하는 드라이한 방식의 피처링이었다.
연락 또한 매니저끼리 했다.
배영웅 매니저의 말대로라면 보통 피처링은 이런 경우가 더 많다고 했다.
자신이 곡 주도권을 갖기 어려운 신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스트 웨이브처럼 압도적으로 음악을 장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선 내 앨범에 들어갈 듀엣곡은 천채왕과 상의해서 정했다.
곡 컨셉은 ‘재즈’였다.
나는 릴리오브더밸리가 재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커리어 후반에 그녀가 재즈 앨범을 내고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천채왕에게 재즈 컨셉을 해보면 어떻겠느냐 물었고, 천채왕도 재미있게 봤다.
그래서 아예 유럽에 부탁해 본격적인 스윙밴드를 섭외하여 곡을 녹음했다.
“야! 노을이 너는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다 내냐. 천재 아냐? 댄스 가수 데리고 스윙재즈를 하자고?”
사실은 미래에 그녀가 하고 싶은 음악을 흉내 내본 것뿐이었다.
그렇게 우리 앨범이 착착 완성되어 가는 동안, 릴리오브더밸리의 곡도 도착했다.
비원더 멤버들과 함께 양재동 녹음실에 모여 릴리오브더밸리의 곡을 함께 들어봤다.
좋은 음질로 청취하고 싶었기에 부러 녹음실을 섭외했다.
“그럼 튼다?”
재호에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잔한 신스로 시작된 노래가 엄청나게 강렬한 베이스 소리와 함께 댄스가 되었다.
환희가 신음에 가까운 감탄을 했다.
“오우….”
나도 놀랐다.
확실히 팝 음악은 팝 음악이었다.
한국 음악에서 듣기 어려운 도전적이면서도 강렬한, 깊이 있는 사운드가 느껴졌다.
특히 공간감이 느껴지는 전자음의 베이스가 굉장했다.
노래를 다 듣고 재호가 감탄을 내뱉었다.
“사운드가 말이 안 되네. 댄스 음악을 어떻게 이렇게 뽑지?”
환희 또한 동의했다.
“누가 프로듀서인지 궁금해여.”
하지만 나는 근심이 생겼다.
‘하필… 범죄자의 곡을… 가져오다니. 이걸 불러야 돼, 말아야 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