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70화 (170/280)

제170화

키미 작곡가는 잠시 후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러곤 언제 울었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

아무 말도 차마 하지 못했다.

침묵이 흘렀다.

키미는 나직한 목소리 내게 말했다.

“고마워요.”

“네? 어떤….”

“절 울게 만들어줘서.”

그녀가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여태까지 본 키미의 웃음 중 가장 밝은 웃음이었다.

“프로듀서님은… 잘… 안 우시죠?”

“울 거 같아요?”

“아니요.”

“잠깐, 방금 대답 너무 빨랐어요?”

“죄송합니다.”

키미가 코를 팽 풀었다.

표정 변화가 없는 걸 보아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키미가 펜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적으며 이야기했다.

“저도 이제 5년 차 프로 작곡가예요. TYB에서 한 50곡은 발표했을걸요? 점점 일이 돼요.”

“뭐가요? 작곡이?”

키미가 고개를 저었다.

입술에는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

“음악이요. 음악으로 감동받는 일도 없고, 우는 일은 더 없어요. 이게 음반 성적이 어느 정도 나올까, 행사는 하루 몇 개 뛸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해요.”

“프로가 되신 거군요.”

“때가 묻은 거죠. 오랜만이었어요. 노래 듣다 울다니. 무슨 중학생도 아니고. 차암….”

“무슨 생각 하셨….”

“거기까지.”

“네네….”

“그럼 이제 다른 곡도 한번 확인해 볼까요?”

* * *

다른 곡들은 의외로 쉬웠다.

뭐랄까, 노래 멜로디 자체에 이미 이야기가 깃들어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단어로 구체화하기만 하면 됐다.

‘넵튠 선배는 엄청 각오하라 하셨는데.’

선배의 충고와 달리, 회의는 술술 풀렸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모든 곡의 키워드가 다 완성된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10곡을 두 시간 만에 회의를 끝낸 셈이었다.

키미가 노트를 덮으며 마무리했다.

“자! 일단 오늘 이야기는 끝났어요. 수고했어요.”

“저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되나요?”

“어떻게 하냐고요?”

“네. 이제부터 가사 작업을 해야 하니까….”

“할 거 다 했어요. 기다리면 돼요. 제가 마무리는 다 해놓을 테니까. 그럼 와서 불러요. 너무 싫은 단어나 표현 있으면 얘기하세요. 고쳐는 줄게요.”

이렇게 쉽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참았다.

‘그럼 더 어렵게 해줄까요?’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왜요? 시시해요? 그럼 더 어렵게 해줄까요?”

…내가 말을 안 해도 결과는 같았다.

“아, 아닙니다. 그냥 뭐 도울 게 더 없나 해서요.”

“노을 군이 참 아이디어가 많네요. 다 괜찮았어요. 그래서 좀 짧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회의가 길어지나요?”

“그냥 일주일은 기본이라고 해 두죠.”

등골이 오싹해졌다.

두 시간 회의도 이리 피곤한데, 일주일이면 완전히 탈진해버릴 것 같았다.

나는 감사를 표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키미가 내 뒤통수에다 대고 추임새를 넣었다.

“아, 맞다! 공지 하나 있어요.”

“뭘까요?”

“드라마 OST 하나 하기로 했다면서요? TBC꺼?”

‘명탐정 수녀’의 OST가 벌써 완성된 모양이었다….

이 노래는 TYB 제작이 아니었다.

드라마 제작사가 직접 외주를 줘서 맡긴 노래였다.

당연히, 나는 그냥 가서 노래만 부르면 됐다.

TYB 외의 회사에서 음반 녹음은 처음이었다.

“뭔가… 걱정되네요.”

“뭐가요?”

“TYB는 다들 아시는 분이고. 최종 결정하시는 천채왕 선생님도 잘 알아서 편한데. 낯선 곳에 간다고 하니까요.”

“편한 일만 하면 발전이 없어요. 그냥 가요. 게다가….”

“게다가?”

“노을 군 노래에 누가 토를 달 리가 없잖아요.”

* * *

며칠 뒤.

배영웅 매니저와 함께 서울 강남의 모 녹음실로 갔다.

녹음실에 들어가니 범상치 않은 남자가 키보드 앞에 앉아 있었다.

흰 머리에 뿔테안경을 쓴 동글동글한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김영훈.

90년대에 가요제 동상으로 커리어를 시작, 현재 가장 잘 나가는 트로트 작곡가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발라드, 알앤비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이번 곡은 그의 팝, 알앤비 특기를 살린 곡이었다.

그에게 90도 각도로 허리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저기 잠깐 앉아 있어. 걔지? 슈퍼스타 T 우승한 애.”

“네네 맞습니다.”

“어어 그래. 저기 잠깐 앉아.”

그리고 그는 다시 등을 돌려 드라마 제작진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나를 무시하는군.’

딱 봐도 느낌이 왔다.

이건 대형기획사 아이돌을 무시하는 음악가들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할 말은 없었다.

이전 생에서 나도 그렇게 행동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저 그런 아이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이돌이 무시할 존재인 건 아니지만, 아이돌과는 달리 나는 오디오형 가수라는 뜻이다.

녹음실에서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영훈은 계속해서 드라마 제작진과 수다 중이었다.

‘뭘 기다리고 있는 거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녹음실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박찬용 드러머였다.

이번에는 드럼이 아닌, 퍼커션 녹음을 하고 있었다.

내가 받은 가이드에는 없던 악기였다.

아무래도 원래 트랙에 추가 녹음을 하는 중인 듯했다.

‘그런데 녹음 중에 저렇게 떠든다고? 그것도 박찬용 드러머 같은 베테랑 중 베테랑 앞에서?’

그때였다.

떠들던 김영훈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마이크에다 대고 녹음실에 말을 걸었다.

“형님! 방금 아주 조오오금 싱코페이션이 잘 안 됐어요. (싱코페이션: 리듬의 강약에 변화를 줌) 뚠따따 뚠따따 따따뚠. 요 느낌으로요. 아시겠죠?”

박찬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박찬용이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김영훈은 다시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성격은 건방지지만, 귀는 확실히 예민한 편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한국 최고의 드러머 박찬용의 연주에서 빈틈을 찾을 수 있을 정도의 고수였다.

“자! 그럼 한번 녹음해볼게요. 노을 씨. 가사지 프린트해 왔지? 보고해.”

나는 물론 배영웅 매니저까지 얼굴이 굳었다.

가수를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가사 외워 왔습니다.”

“오~ 그래? 성의 있네. 그럼 없이 부를 거야?”

“아니요, 혹시 모르니 가져는 가야죠.”

“그래그래. 가서 불러 봐요. 정 못 쓰겠으면 가이드 가수 노래랑 사아아알짝 섞으면 아무도 몰라봐! 걱정 말고 편하게 해요?”

김영훈은 나를 얕보고 있었다.

얼핏 들으면 친절한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 속에는 ‘너 같은 애는 제대로 된 가수도 아니니 적당히 불러.’라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내게 살짝 귀띔했다.

‘너무 우리 무시하죠?’

그는 김영훈의 눈치를 봤다.

아마 못 들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예민한 귀는 음악에만 해당되는 모양이다.

‘그러네요.’

‘매운맛 좀 보여주세요. 부탁이에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비장한 마음으로 녹음실에 들어갔다.

곧 전주가 흘러나왔다.

‘명탐정 수녀’의 확정된 주제가 제목은 ‘빛을 찾아서’였다.

단 하나의 진실, 그 빛을 찾겠다는 주인공 수녀의 각오가 담겨 있는 노래였다.

*

하루 이틀

허무에 굴복하는 날들

진실은 어차피 없다고

남처럼 살라고

그럼 편하다고

리듬감 있는 휭크(funk)노래였지만 시작 가사는 은근히 잔잔했다.

브라스 리듬에 맞춰서 가볍게 노래했다.

라임을 맞춘 단어들을 톡톡 강조했다.

그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그루브가 형성됐다.

굳이 신나게 부를 필요가 없었다.

좋은 노래였다.

‘김영훈 저 사람, 좀 건방질지 몰라도 실력은 확실하네.’

노래는 후렴을 넘어 브릿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 노래는 역시 고음이 중요했다.

후렴도 제법 고음이지만, 최고는 브릿지였다.

어마어마한 고음을 5초 넘게 끌어야 했다.

아마 김영훈이 ‘적당히 해 가이드 보컬한테 시켜서 섞을게~’라고 말한 부분이 이 부분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동네 마실 나가듯 익숙한 음역대의 고음이었다.

*

난 찾을 거야

멈추지 않아

기다려줘~ 어어어어어어~

완벽하게 고음을 끝까지 끌었다.

그러고도 약간 숨이 남아서 노래 끝에 살짝 ‘호!’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나도 모르게 신이 난 모양이었다.

그렇게 신나게 후렴을 부르며 곡을 마무리했다.

노래를 끝나고 녹음실을 봤다.

녹음실에 들어오기 전과는 달리 김영훈은 말을 멈추고,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김영훈의 눈엔 초점이 없었고, 입은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뭐지? 무슨 문제 있나?’

마이크에서 소리가 들렸다.

“야~~ 방금 그거 니가 부른 거 맞지? 원테이크로 이렇게 부른다고? 미친 거 아니야 이거! 야 너 몇 살이야?”

“스물한 살입니다.”

“스물한 살이 이렇게 부른다고? 야 미쳤네 미쳤어. 아니 TYB 너무한 거 아니에요 형님? 아이돌 기획사가 이런 보컬까지 데려가면 어떡해? 채왕이 형한테 한마디 해줘요!”

박찬용 드러머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을 군 노래 들으면 보통 이렇게 되더군. 나도 처음엔 식겁했지.”

“형님도 아셨어요?”

“슈퍼스타 T 드럼을 내가 쳤지 않나. ‘킹 오브 싱어’ 우승할 때도 내가 쳤지.”

“아 맞다! 킹 오브 싱어! 아~~ 다들 그거 보랬는데 안 봤는데. 거기 나왔어요?”

“우승했네.”

“야… 그럼 그럴 만하네. 신동이네 신동. 자자 노을 님 나오세요. 나오시고, 잠깐 쉬었다가 더블링 (풍성한 효과를 위해 같은 소절을 똑같이 반복해서 녹음하는 기법.) 녹음만 하고 갈게요?”

“알겠습니다.”

녹음실에서 나오자 김영훈이 호들갑을 떨며 나를 맞이했다.

갑자기 유자차와 따끈한 물을 전달하는가 하면, 덥지 않냐며 미니 선풍기까지 가져다주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노을 님! 편하게 말해요. 어차피 곧 갈 거 같으니까. 별로 만질 게 없어요. 한두 번 더블링만 하고 가면 될 거 같네.”

“알겠습니다.”

“아쉽네. 이야기 좀 더 해야 하는데. 가기 전에 우리 매니저한테 연락처 좀 줘요. 저 다음 앨범 때 녹음 좀 부탁하게.”

배영웅이 살짝 끼어들었다.

“활동은 저한테 연락 주시면 됩니다.”

“아~ TYB 너무하네. 좀 봐줘요 좀. 그래그래 배 실장님한테 연락할게. 야~ 내가 살면서 대형기획사 실장님한테 연락을 다 해보네. 꼭 해줘요 알겠죠? 노래 너무 잘해. 꼭 같이하고 싶어.”

“하하. 감사합니다. 아 저 그리고….”

“왜요? 뭐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어요? 가사라도 바꿔줄까? 작사가 대기하고 있어요. 바꿔줄 수 있어.”

이제는 좀 부담스러울 정도의 대접이었다.

“아 그런 건 아니고요. 더블링 말고 코러스도 아이디어를 짜봤는데요.”

김영훈 눈이 거의 두 배로 커졌다.

“코러스 라인을 짰다고요?”

이전 생에 나는 코러스였다.

당연히 노래를 보면 코러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곡은 특히 코러스 라인에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들어갈 여지가 많았다.

그 부분을 미리 스케치해 두었다.

내가 직접 준비한 코러스 라인을 불러줬다.

“와~~~ 스물한 살이 코러스 라인을 만든다고? 게다가 이렇게 어려운 진행을?”

“얼핏 보면 머니코드만 쓴 대중적인 곡 같지만. 요소요소에 잘 안 쓰는 코드, 잘 안 쓰는 진행을 넣어 두셨더라고요? 그 부분을 코러스로 살려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걸 알아주네! 맞어! 여기 여기 여기! 포인트마다 필살 코드를 심어놨지! 이걸 코러스가 빡! 하고 건드려주면 좋아 안 좋아!”

“…질문하신 건가요?”

“빨리 가서 녹음해줘요. 제발! 야 매니저? 여기 회 좀 시켜봐. 제일 비싼 걸로! 알았지?”

아무래도 오늘은 좀 융숭한 대접을 받을 모양이었다.

* * *

녹음이 끝나고, 기분 좋은 뒤풀이가 시작됐다.

박찬용 드러머가 슬쩍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곤 내게 질문했다.

“준비는 되었나?”

“뭐… 말씀이실까요?”

“뭐라니? ‘킹 오브 싱어’ 정규방송 1화 노래 말일세. 다음 주면 노래 시작해야 할 텐데?”

“아하 그거요…….”

이미 곡은 생각해 둔 상태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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