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너, 광고 들어왔다.”
천채왕의 입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단어가 흘러나왔다.
‘광고’! 참 좋은 말이었다.
딱히 돈이 좋아서… 도 맞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광고는 영향력의 끝판왕이다.
광고를 하게 됐다는 건, 내 영향력이 그야말로 절정에 달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돈보다 그게 더 기분 좋았다.
‘아니, 그렇다고 딱히… 딱히… 돈이 싫다는 건 아니야.’
천채왕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올 겨울 시즌 옷 광고야.”
“제가요? 재호가 아니라?”
사실 나는 내가 보기에도 패션 감각은 없었다.
스타일리스트가 주는 옷을 입었다.
아니면 재호가 골라준 옷을 그대로 착용했다.
재호가 골라준 옷을 입을 때가 제일 스타일리쉬했다.
내가 광고주라도 재호를 쓸 것 같았다.
재호는 현재 광고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귀공자 같은 외모, Y대라는 스펙, 거기다가 자체 프로듀서라는 위광까지 갖췄다.
특히 고등학생, 여대생은 물론 4050 여성까지 잡았다는 점이 강력했다.
이 점이 광고시장에서 먹혔다.
세탁기부터 냉장고까지.
재호는 온갖 제품의 광고 모델로 활동했다.
재호가 광고하는 제품만 가지고도 결혼 준비가 다 될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다.
“근데… 왜 전가요?”
“그야 노을이 니가 노래가 짱이니까.”
“노래요?”
“아, 노래광고야 이거.”
“아….”
‘어쩐지’ 싶었다.
“그럼 노래만 부르면 되는 거죠? 라디오 CM인가요?”
“무슨 소리야. 요즘 라디오 누가 들어. TV 광고야. 니가 주제가를 부르면서 출연하는 거야. 약간 뮤지컬 같은 거지.”
“아하…!”
천채왕이 광고 조건을 알려줬다.
‘억!’ 소리 날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다.
이거면… 동생의 학비, 교재 걱정은 당분간 안녕이었다.
조금은 따뜻한 가을,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따뜻 정도가 아니라 이건 잭팟인데?’
한국 오디션 ‘킹 오브 싱어’의 1회 우승으로도 이 정도인데, 글로벌 비전 우승으로는 어떤 효과가 나올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다.
* * *
천채왕은 키미와의 작사 미팅을 바로 주선해주었다.
바로 3시간 뒤에, TYB 사옥 내 회의실에서 회의가 잡혀 있었다.
시간이 애매하게 떴다.
‘이럴 때는 역시 카페인가?’
어쩔 수 없이, TYB 사옥으로 가서 1층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카페에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넵튠 한이었다.
넵튠 한은 보이 밴드 리더이자, 내 선배 솔로 가수였다.
내가 데뷔했던 ‘슈퍼스타 T’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까지 가장 친하게 지내는 가요계 선배였다.
“오! 노을쓰!”
“선배님 어쩐 일이세요?”
넵튠이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지난주에 뮤지컬 끝나서 한량처럼 좀 쉬고 있다.”
“여기서요?”
“여기처럼 안전한 데가 어딨어? 시큐리티 분들이 바로 저기 있는데.”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뮤지컬은 어떠세요?”
“좋지. 너도 봤잖아?”
“대단하던데요.”
넵튠 한이 초대해서 본 뮤지컬은 정말 신세계였다.
춤, 노래, 연기, 그리고 무대 장치까지.
우리 연예계 모든 기술이 총 집약된 느낌이었다.
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너무 힘들어. 두 시간 넘게 관객들에게 들려야 하니까. 필요한 에너지가 정말 말이 안 될 정도야. 이거 하려고 담배도 끊었잖아.”
“술은요?”
“술은 절대 못 끊지!”
하하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실 나는 아직까지 목이 아프다거나 그런 경험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재호와 환희는 종종 성대의 피로를 호소하곤 했다.
“저는 아직 그런 경험은 없어서요.”
“너 목도 안 쉬어? 공연도 해봤잖아?”
“네… 그냥 말 좀 몇 시간 안 하면 괜찮던데요.”
“너는 부모님에게 감사해라. 축복받은 성대네. 아주 가수 하라고 떠먹여 줬구만!”
성대도 가수에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는 한참 작업 중인 내 솔로 앨범으로 옮겨갔다.
넵튠이 감탄했다.
“야 벌써 솔로 앨범이야?? 와~! 진짜 특별취급이네.”
“그런가요?”
“야 나 때는 말이야. 3년 차까지는 솔로의 ‘솔’도 못 했어. 노래도 도레미파솔라시도에서 솔은 빼고 불렀어.”
푸훗 하고 웃음이 터졌다.
“선배님이야 워낙 ‘천신군단’이 전설적인 팀이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일본에서도 계속 1위 하셨잖아요.”
“그건 모르겠고! 여튼 나는 6년 차가 돼서야 간~신히 싱글 하나 냈다. 그것도 메인 댄서들이 낸 다음에 나왔어.”
“제가 빠른 거군요.”
“그럼. 하긴 뭐, 노을이 너 정도로 노래하는 1년 차 가수면 그러고 싶을 거 같긴 해.”
“과찬이세요.”
“어? 근데 그러고 보니 너? 곡 수급은 누가 해? A&R팀 최근에 박살 난 거 알지?”
넵튠 한도 역시나 최근 사태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배후에 내가 있었다는 거야 알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 곡은 이미 수집 완료했고요. 가사가 문제인데. 키미 선생님이랑 제가 같이 쓰기로 했습니다.”
“둘이… 같이?”
“네. 협업하면 프로다우면서도, 저 다운 가사가 나올 거라고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노을아. 키미 선생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어? 나 솔로곡 할 때 딱 한 번 같이 녹음해 봤는데. 초죽음이었어 초죽음. 나 울 뻔했다니까!”
“그… 그 정도인가요? 뭐가… 그러신가요? 이전에 비원더 녹음에서는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완벽주의셔. 아니, 당연히 훌륭한 작곡가는 다 완벽주의자지. 근데 그 정도가 엄청나.”
넵튠 한의 말의 골자는 ‘가수’와 공동 ‘창작자’에게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뜻이었다.
가수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면 충분했다.
하지만 공동창작자는 아니었다.
자신에게 뭔가 영감을 주어야 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작업물이 나올 때까지, 100번이고 반복해서 작업하는 것이 키미 프로듀서라고 넵튠 한은 경고했다.
갑자기 몇 시간 뒤 회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거… 준비 좀 해야겠는데?’
* * *
여러 고민을 안은 채로, 키미 작곡가의 회의에 참여했다.
키미는 보온병에 담긴 홍차를 홀짝거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바지에 캐주얼한 차림, 숏컷까지, 그야말로 편안한 모습이었다.
“왔어요?”
“네.”
“저랑 같이 작사하자고 했다면서요?”
“아… 그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나요?”
사실이었다.
“각오해요. 저는 적당히는 절대 작업 안 해요.”
“적당히라고 하시면… 완벽하게 써야 하나요? 저는 작사를 한 번도 안 해봐서.”
“그런 거는 제가 책임져야죠. 게다가 노을 군 앨범의 경우에는 ‘노을 군이 다 쓴 것처럼’ 보여야 하니까 완벽하면 오히려 안 돼요. 약간 어설퍼야죠.”
“그럼… 어떤?”
“가사의 ‘야마’가 있어야 해요. 어떤 팍 꽂히는 키워드! 그거 없으면 저 작업 시작 안 해요. 될 때까지 할 거예요.”
“아 그럼 그건… 키미 작곡가님이 안 해주시나요?”
“그거까지 제가 하면 그냥 제가 다 만드는 거죠! 시작은 노을 군이 해야 해요.”
“아… 알겠습니다.”
내가 직접 큰 아이디어를 짜야 했다.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미션이었다.
“아, 드라마 OST는 제외예요. 그건 드라마 제작국에서 가사 정하니까… 그냥 운에 맡겨야 해요. 컨트리 곡부터 시작할게요?”
“알겠습니다.”
컨트리 곡이 사실 제일 난감했다.
이 곡은, 진짜 가사가 중요했다.
컨트리라는 장르 자체가 한국에서 은근 생소했다.
조금 푸근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이 곡에는 매우 착 달라붙는 가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곡 자체는 사실 매우 좋았다.
잔잔한 현악기가 초반을 주도했다.
후반에는 적당히 락킹한 기타가 귀를 간지럽혔다.
임팩트 있는 컨트리이자 록 발라드였다.
나를 위한 고음 부분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노래가 너무 쳐지지도 않았다.
좋은 가사만 만난다면, 충분히 피어날 수 있는 포텐이 있는 씨앗이었다.
“어때요? 뭐 생각난 거 있어요?”
“뭘 드리면 좋을까요? 후렴 가사?”
키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완성본을 달라는 게 아니에요. 키워드를 달라는 거죠.”
“키워드… 인가요?”
“곡의 제목이어도 좋고 주제여도 좋고. 아니면 딱 한 마디 캐치한 부분이어도 좋아요. 여튼 이 곡 전체를 좌지우지할 어떤 소재 거리를 달라는 거예요.”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주문이었다.
무엇을 소재로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곡이 되는 게 작사의 묘미다.
이를 위해서는 시작점이 매우 중요했다.
키미 프로듀서도 그렇기에 이 부분을 강조한 것일 테고.
야마가 좋아야 잘 되는 건 확실했다.
임팩트 있는 제목과 주제의 드라마가 성공하듯, 일단 시작이 좋아야 했다.
‘잠깐… 임팩트 있는 드라마?’
다행히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곡이 좀 우습지만… 좀 옛 추억을 생각나게 하잖아요? 있지도 않은 첫사랑이 떠오르는 느낌?”
“그런 거 같기도 하네요.”
“그러니까… 추억이 떠오르는 키워드를 생각해봤습니다.”
“뭔데요?”
“‘달고나’요.”
“에에?”
80년대 생들에게만 해도 달고나는 추억의 음식이었다.
2020년대에는 K- 드라마 열풍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는 키워드였지만, 2천 년대 중반에는 슬슬 잊혀져 가는 음식이었다.
키미는 ‘달고나’라는 단어를 노트에 적었다.
그리고는 골똘히 생각한 뒤 내게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달고나를 어떻게 풀어낼 거예요? 노을 군은 발라드 가수니까 되도록 사랑으로 비유해야 하는데?”
“달고나랑 사랑이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요?”
“달고나는 이쑤시개로 자신을 쪼아댑니다. 고통스럽죠. 이 부분이 서로 삐걱대며 맞춰가는 연인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고통스럽긴 하죠.”
“하지만 그 결과는… ‘제 진짜 본 모습’ ‘더 나아진 제 자신’을 찾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구속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방관을 포장한 자유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 사람의 최선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다듬고, 기다려주는 모습이었다.
아직 연인은 없지만, 동생의 운명을 바꿔 가면서 내가 얻은 깨달음을 그대로 풀어냈다.
“좋아요.”
키미 프로듀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한 곡은 잘 넘어간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키미 프로듀서는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이 곡이랑 비슷한 컨트리 하나 들려줄 테니까 한번 불러 봐줘요.”
“네?”
“노을 군이 컨트리는 어떻게 부르는지 보려고요. 그에 맞춰서 써야죠.”
지당한 말이었다.
역시 키미 프로듀서는 빈틈이 없었다.
대한민국 최대 대형 기획사 TYB의 투탑 작곡가 중 한 명다웠다.
“그럼… 준비해두신 곡이 있나요?”
“이 곡이에요.”
다행히 익숙한 곡이었다.
키미는 한창 주가를 날리는 팝펑크 여가수의 발라드 ‘함께하자(Come With Me)’를 선곡했다.
과연, 노래 전주를 듣다 보니 분위기가 내 노래와 비슷했다.
키미가 준 영어 가사 프린트를 읽고 더듬더듬 노래했다.
*
새벽 세 시.
아무도 없는 시간.
하지만 나는 너와 있어.
너를 느낄 수 있어.
너도 그러니?
점점 감정이 고조되었다.
막상 어색했던 자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눈 녹듯 사라졌다.
마지막 후렴에서는, 마음껏 내 감정을 토해냈다.
*
함께해
함께해
지금 이 순간 아무도 너와 없더라도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있더라도
함께해
함께해
너랑이라면 절벽에서라도 떨어져도 좋아.
노래가 끝났다.
몰입했던 감정을 간신히 추슬렀다.
꾹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키미 작곡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