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오창선의 매니저 오주선의 사무실.
1년 차 매니저임에도 오주선은 독실을 갖고 있었다.
그가 만렙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형이 레전드 가수 오창선이라서였다.
오늘은 오주선의 사무실에 은밀하게 손님이 왔다.
그 손님은 추리 드라마 '명탐정 수녀'의 제작 스태프 장민기였다.
장민기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조심스레 말했다.
"이건 비밀이에요."
오주선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래, 그래, 겁먹지 마! 우리 형이 다~아 해준다고! 이제 너희 드라마 대박 났어! 알아?"
장민기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고는 더욱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속하신..."
"아, 그래, 그래! 쏠게 18! 룸살롱 풀코스로 모시겠다고. 형도 못 가본 거로 해줄게."
그렇게 말하고 오주선은 껄껄대며 웃었다.
장민기는 움츠러든 어깨를 하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오창선 씨도 그런데 가요?"
"아니! 그 쉐키는 꽉 막혀서 안 가! 답답하기는."
장민기가 이를 꽉 깨물었다. 좀 더럽고 치사해도, 오창석 섭외에 성공했으니 참을 만했다.
레전드 가수 오창석은 드라마 OST를 부른 적이 없었다.
이번에 사상 최초로 오창석이 부른 드라마 주제곡을 공개하면, 그것만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장민기와 오주선 두 사람은, 곧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다.
곧 두 사람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장민기가 전화를 받았다.
바로 그는 흙빛이 되어 급하게 짐을 챙겼다.
그는 황급히 회사로 돌아가야겠다 했다.
"뭔데? 뭐 이리 급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오주선도 동행했다.
* * *
이제 오주선의 훼방을 물리칠 준비는 끝났다.
나는 오주선을 물리칠 작전을 세우자마자 배영웅 매니저에게 내용을 전달했다.
배영웅 매니저는 바로 나와 함께 드라마 제작사로 가서 신 대표에게 내가 준비한 모든 내용을 전달했다.
예상대로, 신 대표는 노발대발하며 오창선을 억지로 선택한 직원을 호출했다.
'남은 건… 그냥 감상하는 것뿐인가?'
그때였다. 우당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장민기가 들어왔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신봉준 대표가 사무실로 들어와 장민기에게 호통을 쳤다.
나와 배영웅 매니저는 회의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하지만 나는 이런 진귀한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조심조심 문을 열고 광경을 확인했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신 대표의 호통에 장민기가 당황하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무… 무슨 말씀을?"
"'하노이' 들어봤어?"
"물론이죠."
'하노이'는 베트남전을 소재로 제작 준비 중인 전쟁 드라마였다.
신홍 드라마의 차기작 '명탐정 수녀'와 동시간대 방영 예정이었다.
게다가 방영 시작 시기도 '명탐정 수녀'와 1주일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워낙 스타 캐스팅을 했고, 제작비도 많이 들어간 드라마인 관계로 '명탐정 수녀'의 최대 난적으로 뽑혔다.
"거기 드라마 주제가를 오창선이 부른다고 했다는데?"
장민기가 고개를 조아리며 되물었다.
"거기 드라마를요...?"
"몰랐어?"
"처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장민기가 슬쩍 오주선을 노려봤다.
하지만 대표의 호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뭐? 레전드 가수 오창선이 역대 최초로 드라마 OST를 부르면 대박이라고? 얌마 바로 1주일 전에 경쟁작에 꽂았어!"
장민기는 뒤를 돌아 오주선에게 소리를 질렀다.
"상도가 있지! 하노이 드라마 주제곡을 승낙했어요?"
오주선은 '별것 아닌 걸로 왜 지랄이야'라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될지 모르니까 좀 적당히 잡은 거지! 얘가 되고 쟤는 안 되고 그럴 수 있으니까."
"승낙했으면 말을 해야죠. 이제 어쩔 거예요?"
오주선은 얼굴에 들이대는 벌레를 쫓아내는 듯한 손짓을 하면서 장민기에게 말했다.
"아, 겁나 땍땍거리네. 됐어, 걍 취소해 그럼. 18, 장동현 나오는 하노이 하면 되지. 낡아 무너질 것 같은 드라마에 특별히 형 꽂아 주려 했더니만."
오주선의 오만한 말에 드디어 신 대표도 뚜껑이 열렸다.
"뭐, 인마?"
"하노이보다 구린 건 맞... 지 않아... 요."
오주선이 뭔가 엄청난 말을 할까 하다가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신 대표는 인상을 팍 쓰고 손을 휘휘 저으며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야야, 됐고. 저 새끼 내보내. 오창선이 아니라 마이클 넬슨이 와도 저 새끼 회사랑은 일 안 해. 나가, 나가. 그리고 주제가는 TYB 권노을이랑 한다. 알겠어?"
그 말을 끝으로 오주선은 질질 끌려 사무실 바깥으로 던져지듯 나갔다.
오주선이 끌려나가자마자 직원들이 소금을 뿌렸다.
신 대표는 장민기 담당자에게 징계를 각오하라며 역정을 내고는, 배영웅 실장의 손을 꼭 잡았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드라마, 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
사실 알고 보면 간단했다. 나만 컴백을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오창선도 준비 중이었다. 당연히 나보다 경력도 많고, 인지도도 있는 오창선에게도 비슷한 발라드 OST 제안이 왔을 터였다.
일반적인 매니저라면 한 번에 동시간대에 방영하는 드라마 두 개의 제안을 승낙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주선은 달랐다. 그는 초짜였다.
거기다가 형의 백을 믿고 오만하기까지 했다.
역시나, 슬쩍 배영웅 매니저를 통해 확인해보니 오주선은 나에게 제안이 들어온 드라마 3개 모두 하겠다고 질러 놓은 상태였다.
그걸 안 다음부터는 간단했다. 드라마 제작사들끼리 소통하게 하면 끝이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오창선에게 해당 내용을 정리해서 내가 직접 통화로 알려줬다.
내 말을 다 들은 오창선은 잠시 자신이 확인해보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내게 전해 들은 내용을 어딘가에서 확인한 오창선은 딱 한 마디를 남겼다.
-그 새끼, 나가야지.
이걸로 일단, 내가 원하는 '수녀 명탐정'의 OST는 내 것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다음은 이제 곡 선정과 가사 선정이 남아 있었다.
보통 아이돌 기획사인 TYB는 수록곡 선정, 가사 선정, 그리고 타이틀곡 선정까지 모두 회사가 전담했다.
가수는 회사가 원하는 곡을 부를 따름이었다.
하지만 천채왕은 비원더는 달라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비원더는 시작부터 '싱어송라이터 그룹'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노래를 만들지 않는 나라도 적어도 곡 선정에는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 천채왕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곡 선정 회의가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
* * *
그날 밤에는 반가운 연락이 왔다. 문루아 선배였다.
-노을 씨, 한국이죠?
"네, 한국입니다."
그녀는 살짝 뜸을 들였다가 물었다.
-바빠요?
오늘은 딱히 일정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잘됐네! 그럼 우리랑 좀 놀아줘요.
난데없는 문루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요?"
문루아는 어느새 프리를 선언한 방송인 이유미와 함께 아시아 투어를 하고 있었다.
의외로 이유미는 현장 MC로 활약을 톡톡히 하는 모양이었다.
특히 구수한 사투리로 한국 공연 시, 지방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고 했다.
나는 그들과 만날 곳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떠오른 곳이 있었다.
"그럼, 거기서 뵈면 어때요?"
* * *
내가 문루아와 이유미를 초대한 곳은 양재동 녹음실이었다.
재호랑 환희가 녹음을 끝내고, 자빠져서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있던 그곳이었다.
그동안 내 곡을 쓰느라 고생한 그 둘에게 뭐라도 좀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녹음실에 가서 널브러져 있는 재호와 환희를 깨웠다.
"야, 일어나!"
둘이 주섬주섬 일어나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래도 여전히 퀭해 보였다.
나는 그런 재호와 환희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둘에게 말했다.
"문루아 선배가 놀러 오고 있어. 오랜만에 한국 와서 보고 싶대. 뭐 사 오라고 할까?"
환희가 눈을 반짝였다.
"오, 조아여, 조아여! 치킨?"
재호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환희가 어깨를 흔들며 응석 부렸다.
"아, 왜여!"
"식단 관리해야지. 저번에 전기구이 통닭 먹었을 때도 칼로리 초과했다구."
단호한 재호의 말에 환희는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으으… 답답한 소리 하고 있네여!"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럼, 뭐?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라고 할까?"
재호가 눈을 감고 한참 생각하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드레싱 없이 식초와 소금만 뿌린 샐러드라면..."
환희가 질색했다.
"오~ 노!! 그런 걸 먹느니 걍 맨손으로 오시라고 해여."
절로 고민이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난감해하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빈손으로 오라고 하냐..."
그러다 번득, 뭔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이러면 어때?"
* * *
내 제안으로 제1회 비원더 다이어트 요리 대회를 시작했다.
칼로리는 낮고, 맛은 있는 음식을 만들어 대결하는 대회였다.
심사위원 겸 재료 담당은 문루아와 이유미가 해주기로 했다.
"요리 시간은 딱 30분 드리겄슈~."
이유미가 걸쭉~한 사투리로 대회 시작을 알렸다.
시작하자마자 나는 급하게 재료를 찾았다.
우선 올리브유. 기름 중 맛있고 다이어트에도 좋은 올리브는 필수였다.
거기에 나는 토마토, 닭가슴살 등 필요 재료를 가져와 다듬기 시작했다.
재료 손질을 하며 슬쩍 곁눈질로 재호와 환희를 봤다.
쓱 보기만 해도 그 둘이 뭘 할지 대충 보였다.
둘 다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담백한 요리를 준비하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네놈들은 모르지. 돼지의 마음을.'
돼지로 30년 넘게 살아본 나는 그 마음을 알았다.
다이어트는 자제력을 갉아먹는다.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이어트 음식은 칼로리가 낮은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모름지기 맛이 있어야 했다.
당연히 재호와 환희의 요리가 내 요리만큼 맛있기는 어려울 터였다.
* * *
요리 대화를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자 문루아가 땡! 하고 종을 쳤다.
"자! 다들 가져와 주세요."
우선 환희부터 요리를 가져왔다.
접시를 들고 오는 그의 모습은 아주 의기양양했다.
"이거 먹으면 루아 선배도 다른 거 못 먹을 걸여?"
문루아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톡 쏘아붙였다.
"빨리 줘요."
"네네에~"
문루아랑 이유미가 우물거리는 사이, 환희가 자기 요리를 설명했다.
"곤약이 칼로리가 적긴 한데. 너무 맛없자나여. 그래서 어떻게 먹으면 좋을까 고민해봤는데… 굽는 게 제일 맛있더라고여."
환희의 요리는 무려… 곤약 스테이크였다.
곤약을 스테이크처럼 큼지막하게 썰어서 채소를 곁들여 정성스럽게 구웠다.
의외로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이유미가 반색하며 말했다.
"어~머! 너무 괜찮다, 얘. 생각보다 좋은데요? 곤약이 무슨 맛이 날까 싶었는데 희한한 맛이 나네?"
"바로 그거예여. 매실, 간장, 맛술을 섞어서 육즙처럼 맛을 냈어여. 꼭 요리 같죠?"
한 입을 베어먹은 문루아가 말했다.
"그렇긴 한데... "
"한데?"
환희가 침을 꼴깍 삼키며 되물었다.
"간장, 매실액... 심지어 설탕까지. 이건 다이어트 식단이라기엔 너무 당질이 많은 거 아닐까요?"
"아! 이렇게 안 하면 맛없어서 못 먹는단 말 예여."
떼쓰는 듯한 환희를 보며 문루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그럼 곤약 말고 다른 재료를 썼어야죠. 스테이크도 충분히 다이어트 음식인데, 어째 이게 스테이크보다 더 다이어트에 안 좋을 거 같아요."
아무래도 환희는 꼴찌 각이었다.
다음 차례는 재호였다.
재호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요리를 접시에 담아 심사위원들에게 전달했다.
역시 재호답게, 깔끔한 플레이팅이 되어 있었다.
재호의 요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문루아가 입을 열었다.
"까나페… 인가요?"
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드셔보시죠."
문루아와 이유미가 슬쩍 한 입씩 먹어봤다.
재호가 자기 요리에 관해 설명했다.
"카나페는 집에서 TV 보면서도 먹을 수 있구, 입에도 안 묻어서 좋아하는데요. 크래커가 은근 칼로리가 높아서 먹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크래커를 바꾸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떠오르더라구요. 그래서 여러 시도를 해봤는데 제일 괜찮은데 두부였어요. 제가 두부를 좋아하거덩요."
문루아가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하네요."
좋은 피드백이 나오자 재호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렇죠?"
음식을 다 먹은 이유미가 재호에게 말했다.
"재호 군은 저랑 초면이죠?"
"네, 초면 맞구요. 대 선배님이시니 편하게 말 놓으세요."
"아유, 그래, 고마워. 얼굴이 참 잘 생겼다. 밀가루 인형 같네!"
호들갑스러운 이유미의 칭찬에 재호는 덤덤히 답했다.
"감사합니다."
이유미는 목을 가다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근데, 이건 나는 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참치랑 채소만 덜렁 놓으니까 먹기 좀 괴로워."
그녀의 말에 재호가 살짝 당황했다.
"아, 다이어트라..."
"나는 살 좀 쪄도 좋으니까! 여기에 마요네즈 좀 섞어서 맛있게 먹고 싶어!"
문루아가 이유미에게 장난을 걸었다.
"그러니까 언니가 살이 안 빠지지!"
"이거시~? 너 날씬하다고 지금 나 무시하냐? 허벅지가 내 팔뚝만 한 게 팍!"
이유미는 문루아를 째려보며 때리는 시늉을 했다.
"아하하, 해 볼 테면 해봐! 내가 운동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알아?"
...좌우지간 분위기를 보니 재호는 환희보다는 높은 점수지만, 그다지 고평가를 받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대회 승자는 나인 것 같았다.
자신 있게 심사위원에게 내 요리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번에는 제 요리 맛보시죠."
심사위원들이 내 음식을 확인했다. 원래도 큰 문루아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이게… 뭐예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