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우선 역사물은 절대 하면 안 됐다.
격동의 한국사를 다뤘지만, 이 드라마의 시청률도 그야말로 격동이었다.
초반에 30%를 넘나들던 시청률이 애국가 시청률 수준까지 쪼그라들었다.
생각해 보면 드라마로 하기에는 30년의 세월은 너무 큰 소재였다.
전형적인 서류에서만 보기 좋은 드라마였다.
당연히 이 드라마는 패스였다.
전쟁 드라마와 추리 드라마는 둘 다 성과가 괜찮았다.
정확히는 추리 드라마는 20%를 넘는 의외의 성과를 보였고, 전쟁 드라마는 전 국민이 보는 국민 드라마가 되었다.
얼핏 생각하면 전쟁 드라마를 선택해야 하지 않나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드라마의 흥행이 아니다.
물론 망하면 안 되겠지만 너무나 훌륭한 드라마라면 30%냐 40%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전쟁 드라마는 워낙 스케일이 큰 대형 작품이고, 주제가가 나올 타이밍도 애매했다.
심지어 이전 생에서 이 드라마를 본 나도 이 드라마의 주제가가 뭔지 기억조차 안 났다.
그러나 추리 드라마는 달랐다.
중저가급 예산의 드라마라 그런지 몇 개의 음악이 계속 반복되었다.
주제가 또한 영화 속에서 쭉 반복되던 멜로디를 활용했다.
나도 지금까지 그 드라마의 주제곡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였다.
즉, 해답은 '추리물', 가장 잘 안 될 것 같은 세 번째 옵션이었다.
나는 천채왕과 배영웅이 토론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 슬쩍 둘에게 질문했다.
"혹시 노래는 나왔나요?"
천채왕이 내게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가이드는 나왔지. 가사도 작업 마무리 단계고."
배영웅도 말을 보탰다.
"드라마나 OST는 유독 급한 경우가 많죠. 막바지 가사 작업 중이라 모두 가이드뿐이네요."
내가 슬며시 웃으며 둘에게 제안했다.
"그럼 가이드를 들어 볼까요?"
세 곡 다 나쁘지 않았지만 단연 돋보이는 노래는 역시나 세 번째, 추리물의 주제곡이었다.
밴드 사운드기는 한데 강렬한 록이라기보다는 팝의 느낌이 났다.
2020년에 유행하는 말로는 '시티팝'스러운 느낌이랄까?
워낙 회귀 이전 생에서 유명했던 노래라 그런지, 더 듣기 좋았다.
'그래, 이거야.'
천채왕과 배영웅에게 내 의견을 전했다.
"저는 이 곡이 제일 좋은데요?"
천채왕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 이게 제일 세련되긴 한데… 좀 어렵지 않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펑크, 팝인데요. 가사도 긍정적이고, 저는 좋을 거 같은데요."
"그럼 이 드라마를 하자고?"
내 결정이 의외였는지 천채왕이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추리물 주제곡을 부르고 싶은 이유를 말했다.
"결국 저는 드라마도 잘 돼야 하지만, OST가 잘 돼야 하는 거니까요. 이 노래가 제일 가창력을 뽐내기도 좋고, 마음에 드는 거 같습니다."
"그래, 뭐… 주연 배우도 국민 할머니 김선자 배우니까…"
천채왕은 말끝을 흐리며 다시 '고민 모드'로 들어갔다.
배영웅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괜찮을까요? 추리 드라마가 잘 되기가..."
내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OST는 잘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추리 드라마가 워낙 없으니까, 오히려 잘 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천채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까짓거 한번 미친 짓 해 보지 뭐."
'걸려들었다.'
천채왕은 항상 '도전 의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특히 남이 안 하는, 리스크 있는 선택 하기를 즐겼다.
이전에 그가 내게 'TYB의 장수 비결'로 뽑은 것도 도전 정신이었다.
천채왕 같은 타입에는 이 노래가 안전빵이다, 이 드라마는 잘 될 거다 라고 설득하기보다는 그의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 편이 더 효과적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면 이 노래로 할게. 배 실장님, 연락해 줘요."
"넵."
배영웅 실장이 통화하는 동안 나는 천채왕과 다른 곡들을 결정하는 회의 일정을 잡고 있었다.
그때, 배영웅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방으로 돌아와 우리에게 말했다.
"이거 곡… 이미 오창선 씨가 하겠다고 했다는데요."
'갑자기… 오창선 선배가???!'
* * *
배영웅 매니저가 한번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겠다고 말한 것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오창선 선배는 내 가요계 몇 안 되는 지인이었다.
차라리 내가 직접 전화로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뚜~뚜~뚜~뚜]
"이런."
하필 오창선 선배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것 같았다. 앨범 내야지, 드라마 OST도 해야지 얼마나 부산스럽겠나 싶었다.
'아오! 하필 선배, 그 드라마 OST를 하려는 거야?'
* * *
나는 고민 끝에 배영웅 매니저와 함께 무작정 드라마 제작사로 쳐들어갔다.
일단 제작사와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해 보자는 의도였다.
가는 길에 배영웅 실장이 내게 신신당부했다.
"노을 아티스트님은 이야기하지 마시고, 지켜만 봐주세요. 계약은 제 전문 분야니까. 아셨죠?"
"알겠습니다. 이게... 흔한 상황은 아닌 거죠?"
배영웅은 시선을 도로에 고정한 채 되물었다.
"뭐가요?"
"한 가수에게 제안해놓고 갑자기 다른 가수로 바꾸는 일이요."
내 말에 배영웅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뭐 없는 일은 아닌데. 비원더처럼 1위도 해 본 가수한테 이러는 건 좀 경우가 없긴 하네요. 그 다른 가수가 오창선 님이라면야 뭐, 이해는 되는데."
이해는 되지만, 예의 있는 경우는 아니었나 보다.
우리가 드라마 제작사에 도착하자마자 입구에 낯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이전에 봤던 오창선의 매니저 중 한 명이었다.
내게 건방지게 굴었던 그놈이었다.
"뭐꼬? 왜 왔어? 건방지게. 아~ 우리 가수 곡 훔치려고 왔나?"
배영웅이 나와 오창선의 매니저 사이에 끼어들어 나를 보호하며 말했다.
"말이 심하시네요."
"쥐새끼처럼 남 노래 훔치려 하지 말고. 실력으로 하라고. 실력으로."
그렇게 말하고 오창선의 매니저는 성큼성큼 주차장으로 가 버렸다.
배영웅 매니저는 바로 드라마 제작사에 들어가 PD에게 정중하게 항의했다.
PD도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 정말 미안해요. 대 가수 오창선이라고 자꾸 이름값으로 위에서 내리꽂으니까, 어쩔 수가 없었어. 좀 봐줘요."
아무래도 저 매니저가 수를 쓴 게 분명해 보였다.
우리는 드라마 PD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오창선의 매니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있었다.
그의 이름은 오주선. 그렇다, 오창선의… 동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그의 안하무인 격의 태도가 이해가 갔다.
오창선은 대 가수였다. 그가 없으면 소속사가 돌아가지를 않았다.
그걸 믿고 지금 오주선 매니저는 행패를 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드라마 제작사에서 TYB 본사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배영웅 매니저에게 물었다.
"이거 흔한 일인가요? 가수 가족이 매니저 하는 일?"
배영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전에는 정말 흔했죠. 주먹구구식이었으니까요. 요새도 작은 규모면 간혹가다 나와요."
하여간, 저런 일부 미꾸라지들 때문에 건실한 중소기업까지 똥칠을 당한다.
"오창선 선배가 그러다니 실망이네요."
내가 착잡하게 말하자, 배영웅이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본인은 동생이 남들한테 어쩌고 다니는지 모르지 않을까요? 의외로 오창선에게는 좋은 동생일지 몰라요."
"좋은 동생이라… 좋다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바로 오창선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노을이! 전화했어?
"아, 네, 선배..."
나는 0.1초 정도 고민했다. 오주선 매니저, 바로 형의 동생이 어떤 진상짓을 하는지 아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족 이야기인데, 쉽게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가볍게 이야기했다.
"요즘 앨범 준비 잘 되세요?"
-싱겁기는, 뭐 바쁘지.
나는 그냥 적당히 안부만 묻고 통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마침 오창선이 내가 궁금해하는 주제로 끌고 들어가 주었다.
-...그… 혹시 준석이가 뭐 너랑 이야기했냐?
"준석 씨… 매니저요? 그 머리 짧은?"
나는 속으로 잘됐다 싶었다.
-그래, 걔가 좀 초보야. 좀 봐줘."
"네… 알겠습니다."
오창선이 말하는 뉘앙스로 추측건대 본인 동생이라는 사실은 비밀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왠지 좀 사연이 있어 보였다.
아무래도 좀 조사가 필요해 보였다.
* * *
실로 나는 오랜만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MP3로 과거와 미래의 기사를 더 찾아봤다.
대충 내용을 알 것 같을 때 멈추지 않고 끈기 있게 더 살펴보는 게 비결이었다.
10페이지 넘게 오창선과 관련된 기사를 살펴보다 보니 대충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단은 오창선의 결혼이었다.
회귀하기 전의 생에 오창선은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회귀해서 역사를 바꾸면서 생긴 나비효과로 인해 오창선의 운명도 바뀌었다.
그는 원래 사귀던 스타일리스트와 결혼했다.
문제는 이 결혼이 오창선의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이었다.
연예인들 가족 중, 연예인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창선의 동생 오주선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형이 결혼하면, 예전처럼 자신과 가족을 챙기지 않을 거로 생각한 오주선은 갖은 수를 써서 결혼에 훼방을 놓으려 했다.
보다 못한 오창선이 동생에게 살길을 알려 주겠답시고 매니저 자리를 제안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오주선이 오창선의 매니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신입이면서도 오창선과의 관계 때문에, 되려 오만불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오창선이 필요한 기획사에서는 사장조차 그를 컨트롤 할 수 없었다.
여러 상황으로 볼 때, 그가 오창선의 힘을 이용해서 내게 먼저 제안이 들어온 드라마 OST를 협박해서 빼앗으려 하는 중이었다.
대충 내용 분석은 끝났다. 문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만 남았다.
* * *
그날 밤, 나는 야식으로 치킨을 사 들고 양재동 녹음실로 갔다.
벌써 2주 가까이 녹음실에서 칩거하며 내 솔로 앨범 곡 작업을 하는 재호와 환희를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녹음실에 들어가니 재호와 하늘이가 파리한 표정으로 컴퓨터를 골똘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왔다."
재호와 하늘이가 퉁명스럽게 인사했다.
"형, 왔어요?"
그나마 재호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손만 덜렁 올리고 '여어' 한 마디가 전부였다.
내가 둘에게 두 손 가득 들린 통닭을 보여줬다.
"간식 가져왔다."
하늘이가 갑자기 통닭을 보더니 눈을 반짝거렸다.
"항상 노을 형님을 존경해왔습니다!"
재호의 반응도 웃겼다.
"빨리 줘!"
내가 재호에게 은근히 장난스럽게 쏘아붙였다.
"너 튀긴 거 안 먹잖아?"
재호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튀기지만 않으면 되거덩? 내 취향대로 전기구이 통닭으로 사 왔지?"
"당연하지."
재호의 까다로운 입맛이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유명했으니 말이었다.
내 대답에 재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젓가락으로 통닭을 집으며 재호가 농담조로 말했다.
"다행이네. 너무 배고파서, 프라이드 치킨 가져왔으면 그냥 껍질 벗겨서 살만 먹을까 했거덩."
"더러운 이야기 하지 말고 먹기나 해라."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작업을 해 온 건지, 재호와 환희 모두 허겁지겁 내가 사 온 통닭을 해치웠다.
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닦는 하늘이에게 물었다.
"요새는 작업할 때는 '주하늘'인 거냐?"
"방에 재호 형 말고 아무도 없잖아요. 본 모습으로 있는 게 편해요. 특히 창작할 때는… 주환희로는 안 돼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자신에게 솔직해야지 곡이 나온다, 이거구만?"
하늘이가 머리를 살짝 긁었다.
그러고는 눈을 찌푸리면서 세심하게 단어를 고르더니 천천히 내게 말했다.
"그... 거... 보... 다는…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 하겠어요! 주환희는 어쨌든 제게 연기거든요. 그거 하는 동안은 음악을 못 만들겠어요. 음악을 만드는 동안은, 음악 생각만 하고 싶어요."
재호가 그런 하늘이를 보며 감탄했다.
"오올~ 멋진데?"
나도 오랜만에 주하늘이 듬직하게 보였다.
주하늘이나 주환희나 방향이 다를 뿐 평소에 못 미더운 건 마찬가지였는데, 곡 작업을 할 때는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뭔가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잠깐."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가 없다.'
내 고민이 이 한마디로 바로 풀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