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다음 날 아침.
천채왕은 어제 내게 통화로 전달한 대로 꼭두새벽부터 내 집 앞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천채왕을 너무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서둘러서 밖으로 나왔다.
천채왕이 수행 직원들과 함께 카페 3층 구석에 숨어 있었다.
나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슬쩍 앉아 천채왕에게 인사했다.
"아이고, 선생님… 여기까지 오시고."
천채왕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오는 게 더 편할 거 같아서. 너는 시차 적응 잘 됐니?"
"네, 괜찮습니다."
천채왕은 배영웅 실장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체질도 월드 스타'라며 감탄했다.
사실 MP3 덕분에 시차 적응은 문제없었다.
앞으로 해외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이것도 나만의 무기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천채왕은 선글라스를 쓰고, 머리를 푹 벙거지 모자로 눌러 쓴 덕에 동네 등산 나온 아저씨처럼 보였다.
그는 아무래도 유명 인사다 보니 외출 시에는 철저하게 자신을 숨겼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천채왕에게 내가 질문했다.
"근데 굳이… 그러실 필요 있나요? 이제 소인중 대표도 없는데. 그냥 회의실에서 만나도 될 거 같은데요."
천채왕이 고개를 저었다.
"가끔 나가는 것도 좋지 뭐. 인제 와서 TYB에서 만나는 건 비원더답지 않잖아. 그렇지?"
배영웅 실장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천채왕이 바로 내게 '하와이는 어땠냐?'며 질문했다.
"저… 그게."
나는 솔직하게 이스트 웨이브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한국보다 좀 많이 자유로운 레코딩 방식에 당황했던 일부터 시작했다.
우연히 이스트 웨이브의 새 앨범에 수록될 곡 피처링을 잡은 이야기를 할 때는 천채왕까지 몰입해서 '오~'하고 소리를 냈다.
"야! 노을아, 나도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한국 가수한테 빌보드 최고 작곡자가 먼저 피처링 제의를 하다니! 내가 진짜 영광이다, 야. 이런 친구를 다 제작을 다 해 보네."
"아… 그 정도인 건가요?"
얼떨떨해하는 내게 배영웅 실장 또한 그만큼 대단한 일이라며 자신감을 더 가져도 된다고 격려했다.
하지만 그들의 칭찬은 거기까지였다.
천채왕이 눈을 번득이며 주제를 바꿨다.
"이스트 웨이브한테서 데모 음원 받아서 확인했어. 너도 들어봤지?"
"네, 확인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땠어?"
그렇게 묻는 천채왕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의 눈에서 내 뒤통수까지 꿰뚫을 것 같은 눈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나는 도통 그 눈빛이 어떤 감정인지 읽기 어려웠다.
이럴 때는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제일 낫다.
"좋은 수록곡인 거 같습니다."
천채왕이 파하하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좋지. 너도 좋을 거고, 팝답고, 세련됐고, 10~20년 지나도 듣기 좋을 음악이야."
천채왕의 말은 사실이었다. 회귀해서 15년 전으로 돌아온 내가 듣기에도 2021년까지 듣기 좋을 노래였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건 아니었다. 지금, 우리는 2006년,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한국 대중을 위해 앨범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너무 세련된 곡은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천채왕 또한 이와 같은 부분을 지적했다.
"타이틀곡으로 대중을 흔들기에는 좀 부족할 거 같아. 문제가 되면 더블 타이틀곡이라고 말하고 수록하면 될 거 같아. 하지만 충분히 화제는 되겠지. 어때? 이스트 웨이브에게 곡 받기를 잘했어? 네 요청으로 진행해 본 건데."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천채왕을 바라봤다.
"네, 너무 좋았습니다. 저도 선생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그래..."
천채왕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3층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천채왕이 배영웅 실장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배영웅 실장님."
"넵."
"그럼, 어제 말했던 그 이야기를 해 볼까요."
"알겠습니다."
어제 말했던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나는 금시초문이었다.
배영웅 실장이 웬 리포트를 꺼냈다.
내가 배영웅에게 '이게 뭐냐' 묻자 천채왕은 별거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부터 배영웅 실장이 이야기해 줄 거라, 자, 실장님?"
"넵."
배영웅 실장이 건조하게 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비원더의 여태까지 비용을 담은 서류였다.
그 내용을 들어보니... 정말, 생각보다 비원더 활동에는 돈이 많이 들었다.
직원들 월급은 물론, 머리 헤어 메이크업 비용부터 의상, 기름값, 식사비, 심지어 해외 출장비까지 모두 돈이었다.
한마디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에 필요한 비용이 들었다.
그에 반해, 비원더는 음악방송 1위를 했지만, 수익 활동이 너무 적었다.
광고를 찍을 틈도 없었고, 행사를 뛰지도 않았다.
심지어 비원더는 유료 콘서트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봐도 비원더는 돈 먹는 하마였다.
천채왕이 나지막이 내게 속삭였다.
"놀랐어?"
나는 눈썹을 팔(八)자 모양을 만들며 답했다.
"네, 생각보다 저희 돈 많이 잡아먹네요. 이렇게 해도 괜찮나요?"
"보통은 어떻게 하냐면 말이지. 수익 활동을 돌려, 본전이 남게. 땅 파서 장사하는 거 아니니까."
천채왕이 말하는 수익 활동이라 하면 광고부터 행사까지, 온갖 일들을 말했다.
00년대는 아직, 행사가 더 돈이 잘 되는 시절이었다.
게다가 비원더는 공식 팬클럽이 이제 조금씩 조직되고 있을 정도로 팬덤이 끈끈하지 않은 상태였다.
음악방송 1위를 할 정도로 인지도는 높았지만, 수익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
"...행사를 하루에 3개 뛰냐, 4개 뛰냐에 따라서 회사 수익이 크게 차이 나겠네요."
내가 심각하게 고민하며 말하자, 천채왕도 진지하게 거들었다.
"원래대로 라면, 이제부터 한참 행사를 돌려야 했지. 여름에 할 행사도 많으니까. 예능 하면서 광고도 돌리고."
하지만 비원더가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여 제의를 받으면서 계획이 꼬였다.
세계적인 대회에 참가 제의를 받았으니, 비원더로서는 이를 준비하는 데 온 역량을 집중해야 했다.
그 말인즉, 당분간 또 수익 활동에 집중하기는 어려워졌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이번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 참여가 끝날 때까지는 그럴 확률이 높았다.
천채왕의 말을 듣던 내가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저희, 뭔가 회사의 골칫덩이기도 하겠네요."
"왜?"
"노래는 알려져서 인지도는 높은데, 회사에 이바지하는 수익이 크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앞으로도 당분간 그럴 것 같고요."
천채왕은 내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골칫덩이까지야. 너희가 게을러서 돈을 못 벌면 그럴 텐데. 너희는 누구보다 열심이야. 그냥 좀 꼬인 거지. 게다가 글로벌 비전이 어디 동네 개 이름도 아니고, 이런 거에 우리 회사 소속이 참여해 보는 것도 영광이야. 다만."
"다만?"
천채왕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회사로서 수익화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게 된 것도 사실이야. 뭐 글로벌 비전에서 우승은 무리겠지만, 좋은 성적이라도 거두면 백 배, 천 배, 만 배를 거둘 테니 감안해야겠지! 그래도 회사는 회사야."
"네..."
한 마디로, 비원더도 회사에 돈을 좀 벌어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뭘 할까 했는데, 걍 쉽게 가자, 우리."
"쉽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천채왕이 씨익 웃었다.
"정석으로 가는 거야."
천채왕이 생각한 정석 수익모델은 간단했다. 음반이었다.
좌우지간 음반은 간단했다. 앨범이 팔리면 그대로 일정 퍼센트가 회사 수익이 됐다.
문제는 2006년은 이미 음반의 전성기가 지난 시점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천채왕에게 이런 걱정을 토로했다.
"요새 CD 점점 안 팔리지 않나요?"
천채왕도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동의했다.
"앞으로 점점 더 안 팔리겠지. 다 MP3가 될 거야. 그러니까 더 멋지지 않니?"
'응? 멋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라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더… 멋져요?"
"우리가 한번 앨범으로 마지막 밀리언 셀러를 만들어 보는 거야. 올해 안 되면 내년은 더 어려워져. 이번에 우리가 밀리언 셀러를 만들면, 영원히 그 기록은 안 깨지지 않을까? 불멸의 기록이 되는 거지!"
'영원하진 않는데요 선생님.'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내 생각을 뱉어낼 수 없었다.
2020년대가 되면 아이돌들이 200만 장도 거뜬히 팔아 치우는 시대가 된다는 걸 말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천채왕의 이야기 자체는, 나도 찬성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근데… 저희가 팔고 싶다고, 100만 장을 팔 수 있을까요?"
"노래가 좋아서 100만 장이 팔리지는 않아. 그렇다고 비원더는 단순 아이돌은 아니니까 팬덤으로 100만 장 팔기도 좀 어렵고."
역시 천채왕의 분석은 날카로웠다.
"그렇겠죠."
내가 입술을 오므리고 생각에 잠겨있는데, 천채왕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밀리언 셀러를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어. 솔로 발라드 가수 앨범 제작이 오랜만이기도 하고. 재밌을 거 같은데!"
"근데 100만 장이 팔린다면 제 솔로보다는 비원더가 낫지 않을까요? 저희도 곧 2집 내야 할 텐데."
조심스러운 내 의견에 천채왕은 단호한 태도로 응했다.
"그건 안 되지."
"네?"
천채왕의 복안은 이랬다. 비원더 2집은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를 대비한 월드 와이드 앨범이어야 했다.
그 안의 곡은 국내만이 아닌 세계를 겨냥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천채왕이 총을 조준하는 시늉을 하며 이야기했다.
"타겟을 좁혀야지. 비원더 2집은 전 세계 시장을 노릴 거야. 그걸로 한국 시장에서 아주 잘 되긴 어려워. 노을이 너 솔로 앨범으로 한국인 입맛을 잡는 거야. 100만 장 팔아보자. 돈 벌어야지."
그의 말에 나는 살짝 농담조로 말했다.
"백만 장 팔려면 트로트라도 하나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천채왕은 다큐로 받았다.
"트로트는 좀 그래도, 미국식 트로트랄까? 컨트리는 좀 넣어볼까 해. 풍성하게 해야지."
이 말을 시작으로 천채왕이 내게 이런저런 앨범 판매 전략을 공유했다.
우선 블록버스터급 대형 뮤직비디오가 있었다.
"해외 뮤직비디오가 좀 먹히더라고. 이전에는 유럽에서 찍었으니까, 다음에는 미국에서 촬영하면 괜찮을 거 같아. 로케는 조율 중이야. 타이틀곡 결정되면 다시 이야기하자."
"알겠습니다."
또한 곡 수집도 중요했다. 천채왕은 비원더의 멤버들에게 곡을 받은 건 물론, 국내외 정상급 작곡자들에게서 다양한 방식으로 곡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내 솔로 앨범은 상당히 풍성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천채왕의 전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드라마 주제가를 부를 거야."
"드라마요?..."
내가 의아해하자, 천채왕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드라마 몇 개에서 급하게 주제곡 제안이 왔어. 아무리 성공한 음반도 1백만 장을 팔지 못하지만, 성공한 드라마는 오백만 명도 보잖아?"
천채왕의 말이 맞았다. 시청률 10%가 넘는 드라마가 1백만 장 판매 음반보다야 흔했다.
성공한 드라마의 주제가를 부를 수 있다면, 상당한 파급력이 있을 터였다.
배영웅이 서류를 내게 줬다. 드라마 트리트먼트들이었다.
말없이 천채왕의 옆을 지키던 배영웅이 트리트먼트에 관해 설명했다.
"비원더가 음원차트 1위도 하고, 한 여파로 무려 3개 드라마가 급하게 주제가 의뢰를 했습니다. 다 하기는 무리겠고요. 3개 중에 1개 정도는 할 수 있겠죠."
천채왕이 무겁게 말을 얹었다.
"이왕이면 잘 될 드라마면 좋겠지?"
나는 쌓인 트리트먼트들을 슬쩍 확인했다.
우선 첫 번째 드라마. 베트남전을 무대로 한 전쟁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현지 파견 기자와 군인의 사랑을 다룬 전형적인 대형 블록버스터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의 라인업에는 장동현, 김혜리 등등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스타들이 즐비했다.
주제가는 스케일이 큰 동양풍의 발라드를 불러 달라고 요청이 왔다.
두 번째 드라마는 시대극이었다. 그것도 아주 과거가 아닌 60~90년대 근대사를 다루었다.
트리먼트를 읽어보니, 온갖 과거사를 관통하는 '포레스트 검프' 느낌의 드라마였다.
거친 삶에서 작은 희망을 노래하는 밝은 풍의 록 음악을 불러 달라는 제안이 들어 있었다.
마지막 드라마는 블랙 코미디 겸 추리극이었다.
주인공인 경찰서장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본인이 다니는 성당의 할머니 수녀님이 그의 비밀이었다.
그녀는 성직자로 활동하며 사람들의 온갖 범죄 하소연을 들은 경험과 지혜를 살려 범죄를 해결했다.
'의외의 명탐정'이 이 드라마의 모토였다.
천채왕과 배영웅이 진지하게 논의했다. 천채왕이 먼저 말했다.
"아무래도… 전쟁 드라마 아니겠어? 장동현인데."
배영웅도 사람 좋은 웃음을 유지한 채로 코끝을 찡그리며 자기 의견을 말했다.
"선생님, 이 역사물도 잘되지 않을까요? 특수분장과 세트로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 세대를 전부 다룬다고 하니."
...하지만 이건 내게는 너무 쉬운 선택지였다. 회귀자인 나에게는, 어떤 드라마가 성공할지가 훤히 눈에 보였다.
'이걸 어떻게 티 안 나게 정답을 알려주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