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나는 의기양양하게 녹음실에 들어갔다.
내 파트가 들어가기 전, 이스트 웨이브가 랩 하는 벌스(verse)부분부터 슬쩍 가성 애드립을 넣었다.
일부러 너무 튀지 않게, 잔잔한 꾸밈음을 넣었다.
우우우 우우우~
노래를 듣던 이스트 웨이브가 내 가성을 듣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힙합곡에서 피처링 보컬은 영화로 치면 깜짝 등장하는 게스트와 갔다.
미리 이 친구가 온다는 사실을 슬쩍 떡밥으로 깔아주면 후렴에서의 존재감을 배가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후렴에 들어서 다시 노래했다.
최대한 힘을 빼고, 가느다란 느낌으로 노래했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 아주 작지만 확고한 희망을 담았다.
아프지만 다가갈 거야.
모든 것이 무너져도
내 유일한 길을 찾을 거야.
데스티니의 노래는 흠잡을 데가 없이 깔끔했다.
하지만 피처링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었다.
정작 이 노래의 '감정'에는 너무 튀었다. 너무 힘이 넘쳤다.
이 노래는 고향으로 돌아와 본 이스트 웨이브의 좌절과 탄식, 그리고 그 속에서 찾은 아주 작은 희망을 품겠다는 결단을 담은 곡이었다.
회귀하기 전, 이전 생에서 이스트 웨이브의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이스트 웨이브는 뉴욕의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던 래퍼였다.
그런 그가 떼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느낀 것은 외로움이었다.
여전히 가난에 찌들어 사는 동네 친구들, 그리고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기 어려운 자신에 대해 절망했다는 인터뷰를 봤다.
그 복잡미묘한 감정을 담아 쓴 곡을 부를 땐, 온갖 기교를 부리며 힘차게 부르면 안 됐다.
것보다는 세밀하고 단단하게 불러야 했다.
나는 노래를 부르며 이스트 웨이브의 감정에 공감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내가 손을 뻗어 잡은 이스트 웨이브의 감정에 내 감정을 이입해서 노래했다.
그게 유일한 방법일 거야…
* * *
노래가 끝났다. 하지만 부스 바깥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뭐지?'
-...나와
이스트 웨이브가 짤막하게 한 마디만 남겼다.
나는 너무 조용해서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걱정하며 녹음실을 나왔다.
데스티니는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봤다.
이스트 웨이브 또한 얼굴을 내게서 돌려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깬 건 토니의 박수 소리였다.
"야~~~ 브라보! 브라보! 어떻게 이렇게 노래를 잘해? 야, 이스트 너, 우냐?"
"...꺼져, 인마."
이스트 웨이브는 자꾸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 하는 신음소리를 공중에 대고 질렀다.
내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괜찮냐고! 난 그레에에에이트 하지! 좋아, 이 곡은 파이어 키드에게 준다. 데즈, 상관없지?"
흥분한 이스트 웨이브와는 달리 데스티니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트 웨이브가 나와 데스티니에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자자, 그럼, 오늘은 나 이거 마무리 조금만 하다 갈 테니까. 가 봐. 파이어 키드! 오늘까지 우리 집에서 자라고. 내일 보내 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이스트 웨이브는 일단 음악 작업을 시작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인사도 대충하고 녹음실에 틀어박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는 이 친구가 왜 작곡가로 성공했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 * *
졸지에 토니에게 이끌려, 나와 배영웅 매니저, 그리고 데스티니 3인만 거실에 덩그러니 남았다.
데스티니가 전화기를 꺼냈다. 나는 고개를 내밀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에 전화하려고요?"
데스티니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삐딱하게 답했다.
"상관할 바 아니잖아."
'왜 반말을 이리 자연스럽게. 이 예의범절 없는… 아 그것도 유교 국가스러운 건가?'
나는 한마디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말했다.
사실 그녀에게 해줄 말이 있었다.
"당신, 속이 안 좋죠?"
데스티니가 살짝 코끝을 찡그렸다.
"아니? 그게 왜?"
"그냥 그런 거 같은데요. 이스트 웨이브가 데즈는 칩 앤 살사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는데, 제일 좋아하는 음식도 안 먹었잖아요."
"나 데즈라고 부르지 마."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 그냥 넘어가요. 여튼, 실제 녹음도 아닌데 음식도 안 먹고 신경도 날카로운 게, 좀 속이 안 좋은 거 같은데."
"네가 신경 쓸 바 아니야."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약 봉투를 꺼냈다.
동생이 줬던 청심환이었다.
"우리는 속 안 좋을 때 이런 거 먹는데… 혹시 심장병 없죠? 저혈압도?"
"...그런 거 없어."
나는 청심환을 데스티니에 내밀며 씨익 웃었다.
"그럼, 한번 먹어볼래요?"
"...됐어."
내가 심신 안정 효과가 있는 건 사실인데… 라고 말해도 그녀가 워낙 강고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약 봉투를 휙 그녀에게 던졌다.
"뭐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먹고 싶으면 먹어요. 말면 마는 거고. 그냥 주는 거예요."
데스티니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이걸 뭘 믿고 먹지?"
"아니, 그럼 먹지 말던가. 내가 당신한테 이상한 약 줘서 뭐 해요?"
그녀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약 봉투를 집었다. 그리고는 딱 한 알만 콰득 씹었다.
"으윽! 뭘 준 거야!"
데스티니가 신경질을 내며 얼굴을 콱 찌푸렸다.
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은 서서히 펴졌다.
계속 얼굴을 찡그려서 생겼던 미간의 주름도 사라졌다.
아직 무표정이지만, 조금 더 편안한 느낌으로 변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 내일도 여기 있을 거예요?"
"...뭘 준거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기 얼굴에 손을 갖다 댔다.
"스트레스 받을 때 한국 사람들이 먹는 약이에요. 내일도 여기 있을 거냐고요?"
"...매니저한테 말해서 오늘 가려고 했는데."
조금 쭈뼛거리는 데스티니에게 나는 툭 던지듯 말했다.
"내일 또 여기 와요. 이스트 웨이브의 곡 중에 당신이랑 어울리는 거가 하나 있으니까. 토니, 그 곡 뭐였죠? '모두 부서져 버려도.'"
토니는 손가락을 튕기며 답했다.
"오~ 그 곡? 딱인데!"
토니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가 생각해도 잘 어울리는 곡인 모양이었다.
이스트 웨이브가 들려준 다음 앨범 곡 중, 딱 데스티니와 잘 어울리는 노래가 한 곡 있었다.
'모두 부서져 버려도'라는 곡이었다.
"...강력한 어쿠스틱 기타 리프 주도로 진행되는 곡인데 좀 로큰롤 느낌이라 데즈... 데스티니가 부르면 딱 맞을 거 같은데요."
조심스럽게 말한 내 의견에 토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그래, 딱이야. 내일 내가 직접 이스트한테 전해줄게."
내가 씨익 웃으며 데스티니에게 물었다.
"됐죠?"
데스티니는 계속 자기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배가… 편안해졌어… 이게 뭐지?"
"뭐, 그러라고 준 거예요. 하지만 이런 거에 의존하는 건 안 좋으니까, 좀 마음 편하게 가지라고요, 앞으로는."
사실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데스티니는 엄청난 신경과민 상태였다.
노래에 너무 몰두하고 완벽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나는 딱 보고 알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랬으니까.
회귀하기 전, 노래로 뜨지 못한 나는 자꾸 예민해졌다.
매일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나만의 루틴을 만들고, 그 루틴에 맞춰서 생활해야만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다고 믿었다.
양말부터 팬티까지 모두 입어야 하는 순서를 정했다.
노래 부르기 전에는 맑은 삼계탕만 먹었다.
물도 똑같은 종류의 물만 마셨다.
그러면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다.
물론 어느 정도 건강 관리는 해야 했다.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불러대면 성대에 치명타였다.
당연히 관리는 해야 했다.
하지만 양말 신는 순서가 노래랑 무슨 상관인가?
그런 건 없었다. 그저, 불안한 마음을 붙잡기 위한 나만의 미신일 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노래를 부르니, 당연히 감동이 없지.'
내가 노래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면, 우선 나부터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했다.
관리는 철저히 하되, 마음은 편하게 먹을 것, 그게 노래를 잘하는 비결이라는 것을 나는 회귀한 다음에야 깨달았다.
재호, 환희, 그리고 문루아 같은 좋은 동료와 함께해서 마음이 편해지자, 내 스탯은 제자리걸음인데도 신기하게 노래는 점점 좋아졌다.
그리고 이것은 거기에서 비로소 얻은 깨달음이었다.
"남을 행복하게 하려면 우선 나부터 행복해야죠. 그게 가수 아닐까요? 데스티니."
"...데즈라고 불러. 다들 날 그렇게 불러. 난 이만 갈게."
데스티니, 아니 데즈가 핸드폰을 켜서 매니저를 차분히 호출했다.
그 사이 토니가 나를 불렀다.
"파이어 키드, 이스트가 불러. 녹음을 제대로 다시 해보자는데?"
"녹음이요?"
나는 일의 진행이 너무 급한 거 아닌가 싶었다.
토니는 씨익 웃으며 내게 답했다.
"그래. 방금 걸로는 가능성을 봤으니까, 이제 자기 계획대로 다시 제대로 녹음해 보자고 하더라고."
팝스타 앨범에 실리는 곡 피처링 녹음이라니, 나 역시 바라던 바였다.
* * *
아무리 팝스타와 함께하는 녹음이라고 해도, 의외로 별다른 것은 없었다.
더 장비가 좋고, 디테일보다는 느낌 위주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내가 하던 것과 같았다.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다 보니 밤이 늦었다.
이스트 웨이브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녹음 후, 후작업을 하고 있었다.
노래 작업할 때의 이스트 웨이브는 꼭 철인 같았다.
나는 노래 작업을 하다 하다 쓰러지듯, 게스트 침실에 가지도 못한 채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아… 내일 일찍 비행기로 가야 하는데... 는데... 는데...'
어느 정도 잤을까? 너무 편안하게 자는 내 몸을 느끼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어!"
서서히... 어딘가에서 나를 깨운 목소리가 들렸다.
"인천 공항,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
배영웅 매니저가 기지개를 켜며 내게 말했다.
"도착했네요. 일어서시죠."
나는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아니, 저... 이스트 웨이브 집에서 자지 않았나요?"
배영웅 매니저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못 일어나시더라고요. 그냥 제가 데려왔어요."
"...그럼 이게 끝이에요?"
'내 하와이에서의 마지막 밤은? 아니 하다못해, 비행기 비즈니스석의 식사는? 그러고 보니, 멤버들하고 동생 선물은 샀어야 했는데...'
배영웅 매니저가 무심하게 짐을 들며 말했다.
"선물은 적당히 사 왔어요. 내리세요."
...그 덕에 최악은 면했지만, 그래도 나는 뭔가 찜찜한 것이 아쉽긴 했다.
진짜 노래 작업만 하다 온, 알뜰한 출장이었다.
새삼 내 돈 주고 가는 여행과는 다르다는 걸 실감하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 * *
집에 도착하자마자 동생 반응이 가관이었다.
"선물은?"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선물이 든 쇼핑백을 동생에게 들이밀었다.
"...옛다."
나도 뭔지 모르는 선물을 줬다.
그 왜, 인생은 뭐가 나올지 모르는 초콜릿 상자라고 하지 않았나. 아 이건 아닌가…
“이게 뭐야! 초콜릿이잖아. 이건 한국에도 있어!"
역정을 내는 동생을 보며 나는 아주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필… 배 실장님 이런 흔한 초콜릿을… 인생이 초콜릿 상자란 거지, 진짜 초콜릿 상자를 줄 필욘 없잖아요!'
나는 초콜릿의 포장을 유심히 살펴봤다. 자세히 보니 설명이 보였다.
"아! 야야, 이거 봐, 이거 봐. 마카다미아너트가 안에 들어 있잖아. 귀한 거야, 귀한 거! 하와이에서 먹는 거야."
동생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에...? 그게 뭐야, 그래 봐야 견과류잖아."
"맛있대."
사실 나도 안 먹어 봤지만.
나는 동생이 의심스럽게 포장을 뜯고 초콜릿을 하나 날름 먹는 걸 가만히 살펴만 봤다.
동생의 리액션을 확인해야 했으니까.
"오...? 오… 오...!"
초콜릿을 오물오물 씹던 동생의 얼굴이 서서히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그제야 나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좋아하니 다행이네."
"호호, 오라버니 근데… 면세점에서는 혹시 보신 건 없으실까요?"
갑자기 안 하던 아양을 떠는 동생을 보며 나는 횡설수설했다.
"음? 아 음… 저..."
"오... 라... 버어... 니?"
"아, 그게 저 잠들어 버려서… 악! 야, 왜 꼬집어!"
...아무래도 오늘은 한 따까리 제대로 당해야 하는 날인가 보다.
* * *
동생에게 다음 해외 출장 때는 쇼핑 체크리스트를 받아와 사주기로 약속을 한 후에야 폭풍은 끝이 났다.
'...그래도 고맙네.'
사실, 부모님이 없는 지금,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동생이 대견했다.
다행히도 비원더가 빠르게 성공한 덕에 이제부터는 광고, 행사가 들어올 테니 큰 걱정이 없을 터였지만 여태까지는 좀 빠듯했다.
학비와 생활비는 문제없었지만, 동생에게 주는 용돈은 살짝 겸손(?)했다.
그래도 투정 하나 없이 부자들이 굴러다닌다는 음악 관련 전공으로 학교를 잘 다니는 동생을 보면, 저절로 용기가 솟았다.
'월드 스타가 되면, 적어도 동생 용돈 주는 데는 걱정 없겠지? 집도 한 채 사줄 수 있으려나.'
그렇게 내가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순간에, 호출이 왔다.
천채왕의 연락이었다.
[지금 당장, 녹음실로 와. 급한 회의가 있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