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토니에게 준 이스트 웨이브가 내게 다가왔다.
내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나요?"
이스트 웨이브는 당황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상황을 설명했다.
이스트 웨이브와 통화한 상대는 '데스티니 아이'였다.
나와 함께 '슈퍼스타 T’ 오디션에 참가했던 애드리아나가 소속된 걸그룹, '루비 아이'의 메인 보컬이기도 했다.
...게다가 루비 아이는 최근,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 미국 예선을 우승해 미국 후보로 선정되었다.
당연히 콘테스트 측에 미국 대표는 압도적인 우승 후보였다.
다시 말해 데스티니 아이는 내가 만약 글로벌 비전 본선에 참가하게 된다면, 가장 유력한 라이벌 중 하나가 될 존재인 셈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스트 웨이브의 녹음실로 오고 있었다.
내가 이스트 웨이브에 물었다.
"...왜요?"
"나도 까먹었는데, 내가 데즈(데스티니를 짧게 줄인 애칭)한테 다음 앨범 피처링을 부탁했나 봐? 그거 녹음하겠다고 오겠다네."
"갑자기요?"
이스트 웨이브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오늘 오겠다는데?"
"오늘이라니..."
토니가 굳은 표정으로 나와 이스트 웨이브 사이에 끼어들어 말을 이었다.
"그거 내 실수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이스트 웨이브가 토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토니는 목덜미를 손으로 문지르며 난감해했다.
"지난번에… 파이어 키드 노래를 듣고 너무 영감을 받았어. 그래서 음반사에 아시아의 괴물 신인을 발견했다, 그 친구가 불처럼 뜨거운 피처링을 해줄 거라고 떠벌리고 다녔지."
이스트 웨이브가 머리를 감싸 쥐며 말했다.
"...그 말이 데즈 귀에 들어간 거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데스티니도 하고 저도 하면 되죠."
이스트 웨이브가 미간을 찡그리고 입꼬리를 양쪽으로 쭈욱 당기며, 아랫니를 보이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파이어 키드, 너는 데즈 모르지?"
"모르죠."
나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걔는 완벽주의자에, 질투의 화신이야. 네 피처링이고 뭐고 다 뺏으려 할걸? 싸이코야, 싸이코."
이스트 웨이브의 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사람이랑 왜 음악 작업을 하려 해요?"
"음악에 미친 애니까. 노래도 싸이코적으로 화끈해."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봤던 '루비 아이'의 공연에서도 단연 데스티니가 가장 돋보였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을 정리해보면 이랬다.
지금 나는 세계 최고의 팝스타의 앨범에 피처링할 기회를 잡았다.
당연히 놓칠 수 없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그런데 그걸 미국에서 최고로 노래를 잘하기로 소문난 라이징 스타이자, 음악 세계대회 미국 대표가 빼앗으려고 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다 알고 있음에도 나는 이상할 정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데스티니의 노래를 직접 들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어찌 됐든 라이벌을 미리 볼 수 있는 셈이니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스트 웨이브가 나를 툭툭 쳤다.
"왜 실실 웃냐, 파이어 키드?"
* * *
나는 재호의 도움을 받아 갓윌스토어에서 쇼핑을 끝냈다.
독특한 패턴의 정장 몇 벌, 티셔츠 한두 벌, 그리고 신발을 잔뜩 샀다.
재호의 말로는 운동화 코너가 그야말로 금광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옷을 사고 이스트 웨이브 저택으로 돌아오자, 으리으리한 만찬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스트 웨이브가 나와 배영웅한테 앉으라 손짓했다.
"뭐해? 앉아."
내가 우물쭈물하며 이스트 웨이브에 물었다.
"이게… 뭔가요?"
"저녁이지."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이스트 웨이브에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저녁을 이렇게 먹어요?"
식탁에는 초호화판 식사로 가득했다.
베이징 덕부터 불도장까지, 엄청나게 희귀하고 맛있는 음식들뿐이었다.
나는 그 음식들을 열심히 먹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근데 왜 중국 요리를 먹죠? 평소에 중국 요리 드시나요?"
이스트 웨이브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중국 요리 좋아하지 않아?"
...미국인이 보기에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그게 그거인 모양이었다.
나름 자기 딴에는 대접해 준다고 중국 요리를 준비한 듯했다.
하긴, 한국 사람도 덴마크 요리와 스웨덴 요리, 노르웨이 요리를 잘 구별하지는 못하니까 이해는 했다.
다행히 나는 중국 요리를 좋아했다. 게다가 최고급 중국 요리라 건강에 나쁘지도 않아 보였다.
"네, 뭐 좋아하긴 하는데..."
이스트 웨이브가 너털웃음을 하며 말했다.
"먹어, 먹어. 우리 쉐프가 고생했다고."
"집에 쉐프도 있어요?"
"왓? 그럼, 맨날 시켜 먹냐?"
...이 인간, 아예 자신이나 가족이 요리한다는 옵션은 머릿속에 들어 있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우리와 문화가 참으로 다르다는 생각하며 이것저것 맛봤다.
조금 배가 부르자, 나는 비로소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토니는 일이 있는지 자리에 없었다.
그릇을 치우고 음식을 가져다주는 웨이터 한 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들리는 모던 재즈 외에는 음악 소리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부잣집이라서 엄청나게 크긴 한데 인테리어는 단출했다.
너무 물건이 없어서 집보다는 애플 스토어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스트 웨이브가 베이징 덕을 통닭처럼 먹음직스럽게 뜯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밤에는 뭐 할까요?"
이스트 웨이브는 입안에 있는 베이징 덕을 삼킨 뒤 답했다.
"아, 나는 어제 녹음 후반 작업 좀 할 거야. 파이어 키드는 좀 쉬어."
나는 어제는 밤늦게까지 깨어 있었던 덕에 정신없이 잠만 잤지만, 오늘은 좀 지루할 듯했다.
"... 뭐 방에만 있어야 하나요? 다른 거 할 거 없나요?"
이스트 웨이브가 무슨 걱정을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냥 토니한테 영화관 열어달라 그래."
나는 물론 배영웅 매니저까지 당황해 헛기침했다.
배영웅 실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영... 화관이요? (Theatre)"
"응, 영화관. 다른 손님 없으니까 영화도 네가 맘대로 골라."
그게 뭐 별거냐는 듯한 이스트 웨이브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집에 영화관이 있어요?"
"한국 가수들은 없어?'
이스트 웨이브는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이 부자 놈아!!!'
그날 밤은 배영웅 매니저와 단둘이서 레이 찰스의 전기 영화를 초대형 스크린으로 봤다.
내가 심드렁하게 배영웅 매니저에게 말했다.
"단둘이서 보니까 막 그렇게 좋진 않네요."
배영웅 매니저도 퉁명스럽게 말했다.
"돈 지랄이죠, 돈 지랄."
못 먹는 포도 시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이게 별로인 건지 우리도 알 길이 없었다.
'하여튼 팝가수, 이상해.'
* * *
나는 영화가 끝나고 잠에 들기 전, 문루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데스티니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문루아는 애드리아나와 매우 친했다.
분명 데스티니에 대해서도 들은 구석이 있을 터였다.
-여보세요?
"선배, 잘 지내죠?"
문루아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뭘 물어봐요. 전화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뭐 부탁하려고?
역시 문루아는 눈치가 빨랐다.
"네, 사실은..."
나는 문루아에게 데스티니와 엮이기 시작한 일을 이야기했다.
문루아는 이야기를 꼼꼼히 듣더니 피식, 큭큭 웃었다.
"왜요?"
내 물음에 문루아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답했다.
-아니, 너무 데즈스러워서요."
"데즈?"
-데스티니 친구들은 다들 줄여서 데즈라고 불러요. 여튼 걔가 좀… 노래에 대해서는 쌈닭이라고 애드리아나한테 들었어요. 투지로 불타는 스타일? 나쁜 애는 아니래요.
"나쁜 애는 아니라고 하면..."
문루아는 나를 다독이는 듯한 말투로 차분하게 말했다.
-실력으로 눌러버리지, 치사한 암수 같은 건 안 쓴데요.
...충분히 골치 아픈 타입일 것 같았다.
"노래는 잘해요?"
-개 잘한대요. 그…
문루아가 갑자기 뜸을 들였다.
"왜요?"
-...애드리아나 말로는 노을 오빠 제외하고 비슷하게 노래 부르는 사람도 못 봤데요. '미국에서도'.
"미국에서도...?"
팝의 나라 미국, 그곳에서 (애드라이나가 보기엔) 최고 수준의 보컬리스트라니, 대체 어느 정도일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누가 와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 * *
다음 날, 나는 일어나자마자 여느 날과 다름없이 루틴을 끝냈다.
브런치를 이스트 웨이브와 가볍게 먹고는 녹음실로 왔다.
...녹음실에는 손님이 이미 와 있었다.
그 손님은 바로 데스티니 아이였다.
"이스트."
"왔군, 데즈."
이스트 웨이브와 데스티니가 악수했다.
데스티니는 길게 늘어뜨린 금발 드레드록에, 레이커스 저지, 레이커스 트레이닝 복의 차림이었다.
카리브해 흑인 특유의 밝은 피부에,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편한 옷차림을 했는데도 폭발적인 스타의 아우라가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내가 예의 바르게 데스티니 아이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데스티니는 내게 눈짓으로만 살짝 인사했다.
그리고는 바로 이스트 웨이브에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피처링 나랑 하겠다며? 다른 사람이랑 하겠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야? 나랑은 하는 건 맞는 거야? 앨범 언제 나오는데? 왜, 곡은 안 들려줘?"
이스트 웨이브는 양손을 그녀를 향해 펼쳐 보이고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나아~(nah, 아니야) 아무것도 결정된 거 없지만, 너는 꼭 피처링 할 거야, 할 거라고. 걱정하지 마.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온 거야. 나도 다 계획이 있는데."
데스티니가 코웃음을 쳤다.
"이스트가? 웃겨! 어차피 질질 끌다가 음반사가 닦달하면 로빈한테 사정사정해서 2주 만에 훌쩍 만들 거면서."
"윽!"
'아무래도 정곡을 찔린 모양인데.'
그때, 토니가 산더미같이 팝콘과 토마토에 올리브유와 고급 치즈를 듬뿍 뿌린 샐러드를 가져왔다. 간식인 모양이었다.
이스트 웨이브가 모두에게 권했다.
나는 냉큼 받아먹었지만 데스티니는 고개를 저었다.
"안 먹어."
"너 칩 앤 살사 좋아하지? 좀 줄까?"
삐진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이스트 웨이브가 권하자, 데스티니는 소리를 냅다 질렀다.
"안 먹는다고!"
'나이는 데스티니가 한 10살은 어릴 텐데 반말이냐.'
영어에도 존댓말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격조를 갖추고 대접하는 표현이 있었다.
하지만 데스티니는 전혀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다.
고압적으로 위에서 내려 뭉개는 듯한 표현투성이였다.
최고의 작곡가 이스트 웨이브가 왜 저러고 살지 싶은 정도였다.
데스티니가 인상을 팍 쓰며 이스트 웨이브에 말했다.
"노래 들려줘."
"들려달라고?"
"피처링할 거야."
막무가내로 구는 데스티니의 말에 이스트 웨이브가 깜짝 놀랐다.
"와앗?"
"하자고 빨리. 들려줘."
이스트 웨이브가 한숨을 쉬더니 데스티니를 녹음실로 들여보냈다.
내가 그에게 귓속말했다.
'너무 버릇없는 거 아니에요?'
'내 말이.'
'근데 봐줘요?'
'노래 들어 봐. 무슨 말인지 알 거라고.'
그리고 이스트 웨이브가 마이크에 대고 데스티니에게 곡 내용을 알려줬다.
"요, 데즈, 이게 파이어 키드… 노엘에게 피처링 참여하게 할까 하는 곡이야."
"그거 들려줘."
데스티니는 나를 째려봤다.
"파이어 키드가 한다고..."
그녀는 이스트 웨이브의 말을 끊으며 고집을 부렸다.
"틀어줘."
이스트 웨이브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곡을 설명했다.
"가난했던 내가 성공하고 나서, 다시 어릴 때 동네에 가보고 나서 쓴 곡이야."
이스트 웨이브가 곧장 피처링을 생각했던 곡 중 하나를 틀었다.
그의 다음 앨범에 수록될 노래 중 하나였다.
미니멀한 드럼 비트에 잔잔한 피아노 연주와 전자 베이스로 구성된 단촐한 곡이었다.
이스트 웨이브의 랩이 잔잔하게 이어지다 훅(후렴)으로 들어갔다.
우우우우~ 예에에에~
아프지만 다가갈 거야.
모든 것이 무너져도
내 유일한 길을 찾을 거야.
노래는 좀 러프했지만 멜로디는 기가 막혔다.
노래 자체가 굉장히 멜랑콜리하면서도 캐치해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어울렸다.
"간다."
"오케이."
바로 데스티니가 노래를 불렀다.
우선 그녀는 이스트 웨이브의 랩을 중얼중얼 따라가며 감정을 잡더니, 후렴 부분에서는 바로 얼굴을 리듬에 맞춰 좌우로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노래를 들어보니 정말 좀 오만해도 될 법한 보컬이었다.
여태까지 내가 직접 본 보컬 중에는 가장 강렬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재즈 싱어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테크닉과 끝 음 처리가 있으면서도, 오페라 싱어 뺨칠 정도로 파워풀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어.'
이스트 웨이브가 내게 귓속말했다.
'어때?'
'진짜 대단하네요.'
이스트 웨이브가 씨익 웃었다.
'롸잇? (Right? 그렇지?) 십 년에 한 번 볼 목소리야. 파이어 키드 너처럼. 저러니까 성격이 개 같아도 봐주게 된다니까.'
데스티니가 의기양양하게 '봤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태도를 보아하니 역시나 그녀는 본인의 실수를 캐치하지 못했다.
내가 이스트 웨이브에 말했다.
일부러 데스티니도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들여보내 주세요. 저도 녹음해 볼게요."
이건 어느 누가 봐도 이 곡 피처링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