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이스트 웨이브가 지적한 점은 재호의 창법이었다.
"저 친구 목을 너무 쥐어짜. 저렇게는 노래 오래 못 불러. 콘서트 한 번 하면 바로 Done! (끝이야.)"
나는 이스트 웨이브가 틀어준 비원더 라이브 영상 속 재호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들었다.
재호의 파트를 아무리 들어봐도 딱히 목에 무리가 가는 발성은 아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재호에게도 TYB 소속 보컬 트레이너가 계속 노래를 봐주고 있었다.
트레이너가 성대에 무리가 가는 창법을 그대로 둘 리는 없었다.
이스트 웨이브가 아무리 세계 최고 작곡가라도 아닌 건 아닌 거였다.
내가 이스트 웨이브에 되물었다.
"괜찮은 거 같은데요."
이스트 웨이브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한국 사람보다 3배는 더 과격한 고갯짓이었다.
"노우! (No) 거기 말고, 여기 봐."
"아하..."
이스트 웨이브가 지적한 건 재호의 독창이 아니었다. 바로 화음 파트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재호는 화음 파트를 조금 특이하게 부르기는 했다.
듣기에는 좋았다. 하지만 이 부분이 목에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고음을 살살, 다른 목소리에 스며들면서 들리게 부르는 기술은 정말 어려웠다.
재호는 자연스럽게 성대에 무리가 가는 방향으로 화음을 집어넣고 있었다.
문제는, 재호는 중저음 독창보다 화음 파트가 더 많다는 점이었다.
노래마다 클라이맥스에는 내가 주 멜로디를 불렀고, 환희가 중저음 화음, 재호가 고음 꾸밈음을 맡았다.
자연스럽게 재호가 노래를 부를수록 성대에 데미지가 갈 수밖에 없었다.
이스트 웨이브는 비원더의 라이브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내게 충고했다.
"사운드 굳(Sound good.). 듣기는 좋지만, 목에는 치명타야. 오래 못 가."
"화음은 확실히 그럴 수 있겠네요."
이스트 웨이브가 스페이스 키를 톡 쳐서 영상을 일시 정지시켰다.
그리고 기지개를 쭈우욱 피며 말했다.
"뭐, 나도 프로듀서로서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자꾸 코러스에 욕심이 나니까. 녹음하면서 되도록 더 좋은 소리를 찾아 이런 방식 저런 방식으로 코러스를 바꿔봤겠지. 그러다 찾은 게 지금 방식인 거겠고."
재호는 물론, TYB의 보컬 트레이너도 '화음' 파트의 창법까지는 미처 신경 못 쓴 게 분명했다.
나는 이렇게 이스트 웨이브에게 설명을 듣게 되니, 직접 곡을 작곡하는 프로듀서다 보니 곡에 대한 욕심에 자기 노래가 무너질 수가 있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비원더는 모든 무대를 라이브로 소화하는 팀이었다.
확실히 이런 식으로 노래를 부르다가는 오래 못 갈 것 같았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이스트 웨이브에 심각하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스트 웨이브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아. 답은 너한테 있다고."
"저한테요?"
"예~에쓰(Yes)! 파이어 키드! 네 파트 봐봐. 너는 코러스 파트도 전혀 목에 무리가 안 가게, 완벽하게 부르잖아.”
"아!"
이스트 웨이브는 소위 말하는 '진실의 미간'을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놀랐어. 아무리 뛰어난 메인보컬이라고 해도, 코러스는 또 다른 영역이잖아? 덩크 잘 넣는다고 리바운드 잘하는 거 아닌데. 파이어 키드, 너는 코러스까지 파이어던데! 가수만 아니면 내 공연 코러스로 섭외하고 싶을 정도야, 유노? (You know?)"
'그야 15년을 코러스로 밥벌이했는데, 그 정도는 해야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나는 이스트 웨이브에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여튼 나는 철저하게 코러스 교육을 받았다.
오창선 선배의 코러스 팀으로 들어가서, 기초부터 전문적으로 익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5년간 오창선 선배의 콘서트를 따라다니며 경험을 쌓았다.
내 입으로 하기에는 좀 간지럽지만, 아마 전국에서도 나만 한 코러스는 몇 없을 터였다.
'재호는 프로듀서니까, 너무 멋지게 화음 라인을 잡아 주니까, 당연히 재호가 코러스 노래도 잘 부를 거로 생각했어.'
그 녀석은 나처럼 회귀자가 아니었다.
15년의 보너스 경험치 같은 건 재호에게는 없었다.
그 녀석에게는 내 도움이 필요했다.
* * *
그 후, 내게는 쉴 틈이 없었다. 이스트 웨이브는 비트를 선택했으니 바로 가이드 녹음을 따자고 했다.
이스트 웨이브는 오늘 안에 다 끝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삘링이 사라지기 전에 진짜배기를 녹음해야 한다고, 유노? 파이어 키드? 파이어하게 불러 보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악보는커녕 가사조차 없었다.
"저… 가사도 없는데요?"
이스트 웨이브가 무슨 소리냐는 듯 내게 다그쳤다.
"뭔 소리야, 당연히 네가 써야지!"
"멜로디도요?"
"당연한 거 아냐?"
나는 너무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미국놈들은 다 이렇게 하나? 아니면 이스트 웨이브가 힙합 프로듀서라 유독 이런 건가?'
하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나는 한국 가수이니, 한국어 가사로, 그것도 전문가들이 쓴 가사를 심사숙고해서 골라서 그걸로 써야 했다.
"한국어 가사는 나중에 붙일 거 같은데요. 가사가 없는데 어떻게 불러요?"
"왓? (What?) 파이어 키드, 너 가이드 안 불러 봤구먼?"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재호와 환희가 쓴 곡은 다 재호 아니면 환희가 부른 가이드 보컬을 갖고 내가 최종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문루아 등 외부 작곡가의 노래를 불렀을 때도 나는 이미 작곡가가 녹음한 가이드 보컬을 따라 불렀었다.
한 줄로 요약하면, 해본 적 없었다.
"네, 없는데요."
이스트 웨이브는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
"방금 내가 러프한 스케치는 보여 줬잖아?"
"네."
너무 러프해서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걸 토대로 네 삘대로 불러. 저스트 고 포 잇! (Just go for it! 그냥 해)"
그렇게 나는 등 떠밀리듯 무작정 녹음실 부스에 앉았다.
부스에 앉자마자 비트가 흘러나왔다.
'진짜 그냥 이렇게 부르라고? 가사도 없이? 걍 한번 들은 노래를?'
이미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이라,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불러 젖혔다.
이스트 웨이브는 녹음실 앞 부스에서 헤드셋을 끼고 내 노래를 들었다.
입술은 앙다문 채로 손가락을 휘저으며 어깨춤을 추면서 자기 노래에 흠뻑 빠졌다.
정해진 가사가 없고, 심지어 한글은 못 알아듣는 작곡가 앞에서 노래를 부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래에서 욕지기가 나왔다.
대체 뭘 her쩌라는 거야
나한테 왜 이래
음표도 가사도 없이 어~쩌라~고
아 시바 어쩌 쩌라고~~
대체에에에~
배영웅이 내 가이드를 듣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스트 웨이브는 한국어를 모르니 계속해서 어깨춤을 추며 노래를 느꼈다.
예에에에에~~~~
2절로 넘어가려 하자 갑자기 이스트 웨이브가 콘솔로 음악을 멈췄다.
그리고 마이크에 얼굴을 갖다 대고 녹음실 속의 내게 말했다.
"버스(verse, 후렴 이전의 1, 2절) 부분에서는 애드립 치지 말아줘. 2절 후렴부터는 계속 넣어도 돼. 갓 잇? (Got it?)"
"네."
역시나 정상급 프로듀서였다. 이스트 웨이브는 허술해 보여도 예민하게 내 노래를 조율해갔다.
하지만 정작 큰 틀에서 그의 지시를 따르니, 나머지 부분은 노 터치였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큐에 불렀다.
"오케이, 나와."
이스트 웨이브가 쿨하게 나오라고 내게 손짓했다.
바깥에 나오니 토니가 아무 말 없이 '크으~'하는 소리를 내며 엄지 척을 해 보였다.
"아… 땡큐."
나도 바보같이 쪼개면서 토니에게 엄지 척을 해줬다.
벌써 이스트 웨이브는 엔지니어와 바쁘게 회의 중이었다.
그가 잠깐 고개를 돌려 나와 배영웅 매니저에게 말했다.
"방에서 잠깐 기다려. 뒷작업 조금만 하고 다시 연락할 테니까."
* * *
이스트 웨이브 저택의 오후의 게스트 베드룸은 새벽보다 더욱 좋았다.
쨍 한 햇살로 가득한 해변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이었다.
배영웅 실장이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대단했어요."
"아, 그랬나요?"
나는 쑥스러워서 머리를 긁적였다.
"멜로디 만드는 거 처음 해보셨죠?"
"네, 처음입니다."
내 대답에 배영웅은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이라기에는 너무 잘하던데요."
배영웅 실장이 사람 좋게 초승달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생각보다 가이드 보컬 녹음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원래도 애드립은 마음 가는 대로 바꿔서 부르는 타입이었다.
그 즉흥성이 알앤비 음악의 매력이니, 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르는 노래에 갑자기 멜로디와 가사를 적당히 붙이는 일도 애드립의 연장 선상이라고 생각하니 쉬웠다.
아무튼 녹음을 잘 끝낸 것 같아 다행이었다.
디테일한 녹음은 한글 가사가 나온 후에야 진행할 수 있었다.
일단 이번 출장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똑똑똑 두드렸다. 배영웅 실장이 문을 열어 보니 토니였다.
토니가 우리에게 짧게 말했다.
"이스트가 피처링 녹음은 내일이나 하자네. 오늘 저녁에 이스트 웨이브가 같이 놀자는데, 같이 갈 거지?"
내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어… 그래."
"1시간 내로 준비해서 입구로 와."
토니는 그렇게 말하고 곧바로 방문을 닫았다.
나는 한숨을 쉬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배영웅 매니저의 반응이 이상했다.
계속 '와... 와... 와...'라는 소리만 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배영웅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실장님?"
배영웅은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지금 우리, 팝스타의 파티에 초대받은 거잖아요?"
"이전에 문루아 선배도 갔었잖아요?"
배영웅이 손가락으로 엑스자 표시를 만들었다.
"그때는 한물간 친구였잖아요. 이스트 웨이브는 지금 가십난을 정복하는 최고 스타예요!"
나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다른가요?"
"모르죠. 소문에 의하면 매일 밤 모델들하고 파티를 즐긴다는데. XXX을 X으라고 한데나..."
배영웅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나는 귀를 막으며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악! 그만 해요. 듣고 싶지 않아요. 실장님 소속 가수한테 그런 말 해도 되는 거예요?"
배영웅이 씨이익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유! 노을 아티스트는 제가 믿죠! 절대 XXX를..."
"아, 그만요!"
하지만 나는 팝스타의 사생활이 어떨지 궁금하기는 했다.
내가 그 활동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이 들 정도는 되었다.
'대체 뭘 하면서 놀길래 저런 소문이 다 나지?'
* * *
두 시간 뒤.
나와 배영웅 매니저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
내가 먼저 침묵을 깨고 배영웅 매니저에게 한마디 했다.
"실장님… 쟤 진짜 찐따네요."
배영웅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진짜! 어떻게 저러고 놀죠? 완전 범생이."
...이스트 웨이브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하와이의 초대형 중고품 및 기증품 가게인 갓윌스토어였다.
이스트 웨이브는 매니저를 대동해서, 선글라스와 모자, 마스크를 푹 눌러쓴 채 진지하게 1~2달러짜리 티셔츠를 고르고 있었다.
"백화점 명품 섹션따위, 백인 부자들이 오염한 패션이야. 진짜 리얼한 건 이런 곳에 있지, 유노?”
‘...아무리 그래도 돈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갓윌스토어에서 옷을 사냐! 지독한 놈!"
가게 안을 둘러보니, 진짜 좋은 옷이 많기는 했다.
미국인들은 재활용을 안 하고 옷을 휙휙 버린다더니, 정말 새것 같은 좋은 옷들, 구제라고 할 수 있는 명품 옷들도 싼 가격에 나와 있었다.
'...내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나는 여전히 패션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대개 회사 소속 스타일리스트나, 아니면 재호가 골라주는 옷을 적당히 입고 다녔다.
게다가 일상복은 모두 여동생 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뭔가 아까워서 사진을 찍어서 재호에게 문자로 보여주기로 했다.
재호라면 혹시 좋은 옷을 고를 수 있을까 싶었다.
'응?'
나는 재호에게 보낼 사진을 찍다 우연히 이스트 웨이브를 발견했다.
이스트 웨이브는 심각한 표정으로 매니저의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내일… 오겠다고? 아, 그래, 피처링. 피처링… 오케이...?"
'내일 피처링이라면, 이스트 웨이브가 나보고 하라던 그 피처링 말인가?'
누군가, 이스트 웨이브가 내게 제안했던 피처링 자리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