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58화 (158/280)

제158화

힌트는 바로 곡의 비트에 있었다.

그렇다. 이스트 웨이브의 노래는 랩에 가까웠다.

하지만 반주는 달랐다. 반주에는 은은하게 고전 소울 음악 보컬이 깔려 있었다.

피치를 잔뜩 올려서 원곡의 흔적이 거의 없었지만, 분명히 정통 소울 알앤비였다.

생각해보면, 이스트 웨이브는 내 노래를 좋아해 주었다.

그는 힙합만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가 알앤비 소울풍 음악을 좋아했기에 내 노래가 마음에 들었을 터였다.

그런 각도로 다시 노래를 들어보니, 이스트 웨이브의 힙합곡의 베이스는 소울, 알앤비 음악들이었다.

그는 다양한 60~80년대 알앤비 소울 음악을 샘플링해서 뜯고, 변형해서 활용했다.

그가 샘플링한 곡의 원곡들을 들어보니 모두 내가 좋아했던 음악들뿐이었다.

'이거다!'

나는 여기에 이스트 웨이브와 곡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비결이 숨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스트 웨이브가 샘플링했던 원곡들을 차근차근 들어보기 시작했다.

* * *

내가 이스트 웨이브가 샘플링한 노래를 연습하면서 시간을 보낸 지 사흘 만에 천채왕에게서 호출이 왔다.

내 솔로 앨범 작업 관련 회의 요청이었다.

나는 이제는 슬슬 익숙해진, 양재동 고급 빌라촌 인근 녹음실로 갔다.

녹음실에 도착하자 천채왕이 문을 직접 열어줬다.

내가 놀라서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아이고, 직접 나오셨네요. 다른 직원분 시키시지.”

천채왕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일부러 그러려고 여기서 하는 거야."

"일부러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채왕이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비원더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제작하려고 하거든. 더 으리으리한 녹음실보다는 좀 소박한 녹음실에서. 스태프도 최소한으로. 그러려면 여기가 좋지. 사옥에 있는 큰 녹음실보다 여기가 더 잘 맞아."

"그럴까요… 저도 좀 큰 녹음실에서도 녹음해 보고 싶은데."

살짝 부루퉁해진 내 얼굴을 보며 천채왕이 달래듯 말했다.

"이번에 이스트 웨이브 만나면 더 으리으리한 곳을 보게 될 거야."

자연스럽게 주제가 '이스트 웨이브'로 옮겨졌다.

천채왕은 이스트 웨이브와 연락이 닿았다고 말했다.

이스트 웨이브는 흔쾌히 허락했다. 다만 하와이에 있는 자기 작업실에서 한번 만나자는 것이 조건이었다.

만나서 함께 곡 녹음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나야 전혀 나쁠 것이 없었다.

천채왕의 말처럼 나도 세계적인 팝스타의 녹음실과 녹음 방식이 궁금했다.

천채왕은 녹음실로 나를 들여보냈다.

녹음실 바깥방에는 환희와 재호가 쥐 죽은 듯 자빠져서 자고 있었다.

내가 그들을 가리키며 천채왕에게 물었다.

"쟤들 뭐 하는 거죠? 아직 자는 건가요?"

"네 곡 쓰겠다고 날 밤을 새웠다나 봐."

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날 밤을 샐 정도로 곡 쓰기가 어렵나요?"

"말했잖아. 비원더는 업그레이드돼야 한다고. 좀 어려운 과제를 줬어. 너도 이제부터 고생 좀 할 거다. 그래도 세계대회 나갈 친구들이니까. 조금만 화이팅하자.”

"네에..."

그 후 녹음실에서 천채왕이 이번 솔로 앨범에 대해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는 화이트보드에 직접 브리핑 내용을 적었다.

방음이 완벽한 녹음실이라, 천채왕의 목소리와 내용을 기록하는 김나리 직원의 타이핑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천채왕이 화이트보드에 큼지막하게 '권노을 솔로'라는 글자를 적었다.

그리고 내게 선언하듯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노을이 네 솔로 앨범은 한번 제대로 네 보컬을 보여주고 싶어."

"제… 보컬이요?”

나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티를 냈다.

"비원더는 아무래도 팀이니까.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지, 너무 튈 수는 없었어. 하지만 솔로 앨범이라면 다르지. 장르도 제약이 없고, 음역이나 분위기도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으니까, 이 자유를 최대한 활용해봐야지. 그렇게 해보려고."

나는 여전히 천채왕의 말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알앤비 소울풍 노래, 그중에서도 하모니를 중시하는 비원더의 노래 위주로 쭉 활동해 왔으니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천채왕에게 물었다.

"자유도를 높인다면 어떤 말씀이실까요?"

"아예 록도 해볼 수 있고, 댄스음악도 해볼 수 있고. 재즈라던가, 아예 제삼 세계 음악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거지."

“아… 그런 의미셨군요."

다른 음악 방향이라니 뭔가 새로운 여행을 잠시 떠나는 느낌이었다.

자유도가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천채왕이 서류를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곡을 최대한 많이 받아 볼 거야. 일단 10팀? 정도는 받아야지. 다 쓰지 않더라도."

"곡 선정은 어떻게 하나요?"

천채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너랑, 나랑, 키미 셋이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할 거야. 뭐 그렇다고 해도 누가 썼는지 대충 알겠지만. 뭐, 혹시나 의외의 곡을 줄 수도 있는 거니까."

내가 생각해도 실제로 그럴 것 같았다.

"이스트 웨이브가 주는 곡은 무조건 들어가는 거죠?"

천채왕이 살짝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워낙 대형 작곡가라 곡을 거절하기는 어려워. 근데, 그렇다고 얘 곡을 벌써 타이틀곡으로 정해두고 싶지는 않거든? 그건 내가 커뮤니케이션을 잘해볼게. 너는 최대한 확답을 피해 볼래?"

앤젤이 우려하던 상황이 내게도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지나치게 유명한 작곡가의 곡을 저자세로 받아서 대중에게 외면받는 곡이 되어 울며 겨자 먹기로 활동하게 될 판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다행히 기발한 생각이 있었다.

"문제없게 최대한 하겠습니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앨범 잘 될 거야. 노래 연습은 잘하고 있지?"

나는 그렇게 묻는 천채왕에게 가슴을 펴며 자신 있게 답했다.

"네, 매일 연습 중입니다."

"노래 연습은 너무 많이 해도 목이 상해. 적당히 하고. 노래는 악기니까 몸 관리가 중요해, 알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천채왕의 걱정스러운 조언은 계속됐다.

"몸 관리는 진짜 중요해. 나도 몸 관리에 거의 하루의 반은 보내는 거 같아."

그러면서 천채왕이 주머니에서 견과를 꺼내 털어 넣었다.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영양제를 입에 넣었다.

이후는 행정적인 회의였다.

나는 배영웅 매니저와 함께 이스트 웨이브의 녹음실에 방문할 일정을 전달받았다.

일정을 다 계획하고 나서야 회의 시간이 끝났다.

짐을 챙기고 회의실을 나서는 내게 천채왕이 뭔가를 꺼내 주었다. 티켓이었다.

"이게 뭔가요? 뮤지컬… 티켓이네요?"

그가 내 손에 쥐여 준 것은 90년대 유명 드라마 '해시계'를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 티켓 4장이었다.

천채왕이 내 질문에 대답했다.

"넵튠이 오늘 공연하거든? 바로 여기 근처 공연장이야. 한 번 참고할 겸 가서 봐, 다른 멤버들도 같이 데려가고."

"알겠습니다."

아는 사람의 뮤지컬 공연 관람은 또 처음이었다. 뭔가 기대되었다.

천채왕이 집을 나가는 걸 확인하고, 나는 녹음실에서 나와 재호와 하늘이가 곯아떨어져 있는 방으로 가서 둘을 깨웠다.

부스스한 표정으로 둘이 서서히 깨어났다.

"야, 일어나."

둘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재호는 거의 곡소리를 냈다.

"아이고, 아이고."

내가 살짝 농담을 건넸다.

"노래만 부르는 게 이리 편한 거였나?"

하늘이가 간신히 눈을 뜬 채로 말했다.

"형… 녹음 시작하면… 다 죽었어요. 제대로 지옥을 맛 보여줄 거야."

나는 피식거리며 하늘이에게 말했다.

"야, 됐고. 일어나."

하늘이가 내 말에 지지 않고 맞섰다. 아무래도 더 자고 싶은 모양이었다.

"왜요, 오늘 일정도 없잖아요? 밤에 녹음해야죠."

"선생님께 받은 뮤지컬 티켓이 있어."

하늘이가 갑자기 티켓을 보더니 벌떡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이거… 보고 싶었어요! 엄청!!!”

"아, 그래? 잘됐네."

"진짜 보고 싶었다구요!!!"

환희가 아닌, 하늘이가 저렇게 하이텐션인 건 오랜만이었다.

* * *

실제로 뮤지컬을 보니, 나는 하늘이가 왜 저렇게 흥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화려한 뮤지컬이었다. 번쩍이는 카지노 네온사인, 화려한 댄서들, 거기에 넵튠을 중심으로 한 3인의 주연배우의 절창까지, 정말 끝내주는 볼거리였다.

게다가 이 무대는 천채왕의 말대로 내게 공부도 됐다.

라이브로, 청중을 2시간 30분 동안 사로잡는 배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참고가 되었다.

심지어 노래만 부르는 것도 아니고, 춤과 연기까지 함께 하니 더욱 대단해 보였다.

특히 '라이브'라는 점에서, 2시간 30분을 끌고 가는 뮤지컬 배우들의 엄청난 에너지는 그대로 내게 참고가 되었다.

게다가 워낙 ‘해시계' 원작 드라마가 인기 드라마였다 보니, 나처럼 드라마를 안 본 사람도 대충 내용을 알고 있었다.

가만히 집중해서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감정에 몰입이 되었다.

같이 온 재호와 환희도 피로를 잊은 듯, 열광적으로 커튼콜 때 손뼉을 쳤다.

나는 환호하는 재호와 환희를 보니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재호랑 환희의 관점 차이도 재미있었다.

재호는

"야 진짜 편곡이 예술이다! 오케스트레이션을 어떻게 저렇게 해? 게다가 거기서 디스코가 나와서 허를 찌르는 건 어떻구."

이런 반응이었고 환희는,

"가사 너무 좋지 않아요, 횽? 게다가 같은 모티프가 반복돼서 나중에는 '사진 찍자'는 별것 아닌 가사만 나와도 눈물이 나잖아여."

이런 말을 했다.

아무래도 우리 셋 다, 서로 다르지만, 이번 공연으로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았다.

환희가 내 손을 갑자기 잡아끌었다. 내가 환희에게 물었다.

“왜?"

"뒤풀이 가야죠, 횽.”

"웬 뒤풀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넵튠 횽이 주연이잖아여. 오늘이 막공이라 거하게 뒤풀이할 거래여. 놀러 와도 된다는데여?”

환희는 잔뜩 신이 난 얼굴이었다.

"캐스트들 뒤풀이에 우리가 껴도 되는 거야?”

심지어 술을 안 마시는 재호마저 뒤풀이에 가고 싶었는지, 이렇게 묻는 내게 한소리를 했다.

"야, 옆자리에서 앉아서 먹으면 되지. 꼭 거기에 낄 필요 없거덩?"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굳이 그럼 갈 필요가 있냐?"

환희가 답답하다는 듯 내 팔을 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

"아, 횽! 그냥 잠자코 따라와여."

옆에서 우리 셋을 조용히 관조하고 있던 배영웅 매니저도 말했다.

"뒤풀이 장소만 알려주세요. 근처에 주차하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너무 늦게까지 마시지는 마시고요."

이쯤 되니, 갈 수밖에 없었다.

* * *

막상 뒤풀이 자리에 가서 보니, 나는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희의 말이 맞았다.

뮤지컬 캐스팅 중 상당수가 가수 출신이었다.

그들은 최근 잘 나가는 라이징 스타인 비원더를 모두 반갑게 맞아 주었다.

거기다가, 뒤풀이에는 또 다른 의외의 인물도 있었다.

그 인물은 바로 오창선 선배였다.

"여어~ 노을이 왔어? 비원더 너희들이 술자리에 다 오고 별일이다, 야."

내가 깜짝 놀라며 반갑게 오창선 선배를 맞이했다.

“창선 선배!"

"요새 노을이 너 아주 파죽지세더라, 야."

오창선과 나는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었다.

그동안 일본 활동하면서 있었던 일을 오창선에게 설명했다.

오창선은 그간 있었던 내 이야기를 감탄하면서 들었다.

오창선이 내게 말했다.

"야~ 한류 한류 하더니만. 이제는 한국서 1등 하면 바로 일본 가는구나? 부럽다, 야."

"선배는 일본 활동 안 하셨나요?"

내가 그에게 묻자, 오창선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때는 일본 활동 그런 거 없었어.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더 인정받는 시장이니까. 지금도 사실 그렇지. 한류 드라마다 아시아의 달 문루아다 뭐다 해서 그나마 일본 진출이 가능해진 거지, 난 평생 한국 활동만 했어."

"그러셨군요..."

오창선은 말끝을 흐리는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난 한국이 좋아. 일본까지 활동 병행하려면 너무 고달프잖아. 너는 어때? 그래서 이제 좀 쉬고 있는 거야?"

"네에, 뭐… 노래 연습도 하고 그러고 있죠.”

“나는 하도 쉬어서, 인제 그만 활동 시작하려고."

오창선은 나와 함께 '슈퍼스타 T’에 출연했다.

그때 당시 그는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했고 결혼 후에는 라이브 콘서트를 조금씩 하는 것 외에는 거의 음반 활동이 없었다.

이번에 드디어 신혼 공백을 깨고, 앨범을 내려는 모양이었다.

“언제 나오세요?"

오창선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글쎄? 한 9월? 아, 잠깐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9월이면 내 솔로 앨범이 나올 때쯤이었다.

오창선이 화장실에 간 사이, 그의 뒤에서 나를 지켜보던 오창선의 매니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못 보던 얼굴이었다. 그 사이에 매니저가 바뀐 모양이었다.

"...그때 너도 앨범 내는구나?"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침묵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오창선의 매니저가 팔짱을 끼고 내가 빈정댔다.

“앨범 발매, 늦추는 게 좋을걸? 개 발리기 싫으면. 잘 나가는 신인이라 아까워서 충고하는 거야."

'처음 보는 사이에 반말에 비꼬기까지?'

누군지는 모르지만, 별로 예의 바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도 가만히 지고 있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함께 활동하는 영광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제대로 승부해 보겠습니다."

나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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