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57화 (157/280)

제157화

양재동 모처 고급 빌라촌에 있는 천채왕의 녹음실.

천채왕이 TYB 대표 작곡가인 키미와 점심 식사를 즐기며 회의 중이었다.

천채왕이 손수 준비한 바비큐 요리에, 키미가 가져온 샐러드가 오늘의 메뉴였다.

오늘의 안건은, 비원더의 원재호와 주환희와 함께 만드는 권노을의 솔로 앨범 프로듀싱이었다.

음식을 말없이 먹고 있는 천채왕에게 키미가 말을 쏟아냈다.

"선생님, 애들이 재능이 있는 건 맞아요. 하지만 이건 반대예요. 솔로 앨범은 싱어송라이터랑 또 다르잖아요. 잘 아시다시피, 이건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천채왕은 잠자코 음식을 먹으면서 키미의 말을 들었다.

키미가 하나하나 문제점을 들었다. 우선 편곡의 깊이가 문제가 됐다.

원재호는 프로듀서로서 경험이 매우 부족했다.

주환희 또한 솔로 발라드 음악의 멜로디나 가사를 써본 적이 없었다.

키미는 여태껏 비원더가 잘 해왔던 분야와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것의 위험성을 설파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천채왕이 말했다.

"그야 얘들이 쓰면 좀 부족하겠지. 키미 네가 쓰면 훠~얼씬 더 완성도가 높겠지. 그걸 누가 부정하겠어?"

"맞아요! 그러니까 저… 아니, 전문가를 쓰자는 거죠."

잠깐 흥분했던 키미는 금방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이란 게 있잖아. 나는 싱어송라이터 그룹을 지금까지 프로듀싱하지 않았어. 댄스 아이돌이라는 TYB의 전문 분야에서는, 춤추고 노래하며 매력 발산하는 가수가 곡까지 쓰는 건 무리라고 봤어. 예외는 간혹 있지만."

"뭐 그렇죠."

키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천채왕도 덩달아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지만 비원더는 싱어송라이터 팀이잖아. 자기들의 생각이 곡이 된다는 게 이 팀의 핵심 매력이라 보거든. 아~ 이 팀이 굳이 다른 작곡가 위주의 곡을 쓴다? 난 잘 모르겠어."

키미가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천채왕 또한 여러 상념에 빠졌다.

그러다 천채왕이 무언가 생각난 듯, 키미에게 말을 건넸다.

"아! 그러고 보니 어차피 안 된다."

“뭐가요?”

"노을이가 솔로 앨범에 꼭 하나 했으면 했던 게 있어. 뭔 줄 알아?"

키미가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알려주세요."

"권노을이 '킹 오브 싱어'에서 이스트 웨이브를 만났잖아. 그 이후로 연락처가 생겼거든. 이스트 웨이브 측에서 먼저 우리한테 연락을 줬어. 권노을에게 관심 있다고.”

"네에..."

키미가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루아 정도는 아니지만, 키미도 상당히 포커페이스인 편이었다.

안경이 갑옷처럼 눈빛을 보호해서 한층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하지만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천채왕은 키미가 놀랐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럴 만했다. 한국 가수가, 그것도 아직 데뷔 1년 차가 세계 최고 작곡가의 관심을 받았다.

이례적인 일 정도가 아니라 한국 음악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매우 놀랄 만했다.

천채왕이 말을 이었다.

"노을이가 이스트 웨이브에게 한 곡을 받고 싶데."

"네에?"

키미의 눈이 확 커졌다.

“그러니까, 어차피 비원더만의 앨범은 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면 키미 네가 쓴 곡도 하나 솔로 앨범에 넣지 뭐. 그럼 되지?"

키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아니요! 그건 안 돼요!"'

이건 천채왕에게도 의외의 대답이었다.

지금껏, 키미가 권노을의 보컬리스트 역량에 반해, 권노을 앨범에 메인 프로듀서를 탐내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안 돼? 왜?"

키미가 주먹을 콱 쥐며 말했다.

“이렇게 된 거, 승부해요! 누가 이기는지. 저도 내고, 비원더도 내고, 이스트 웨이브도 내고. 블라인드로 평가하죠. 대신 비원더 곡에 가산점 주기 없기에요."

야심 찬 키미의 제안에 천채왕이 살짝 망설였다.

"야, 블라인드라고 해도, 너도 알다시피 솔직히 누가 뭘 썼는지 다 알잖..."

천채왕의 말을 키미가 자르며 치고 들어왔다.

"제 곡은 절대 모를 거예요. 제 작곡가 인생을 걸고, 권노을에게 딱 맞는 곡을 써주겠어요. 키미의 곡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곡을 써줄게요."

천채왕은 키미를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허, 참... 뭐 맘대로 해."

천채왕은 미팅을 하며, 작곡가들끼리 권노을을 차지하기 위한 신경전도 대단하단 걸 체감했다.

워낙 권노을이 출중한 보컬리스트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보컬 실력을 들은 작곡가라면 한 번쯤 도전하고 싶은 재료인 모양이었다.

식사를 끝낸 키미가 싱크대에 접시를 가져다 놓으며 천채왕에게 말했다.

"저, 선생님, 이건 제 곡 쓰라는 건 아니고요."

"어어."

'그런 뜻이잖아?'

굳이 천채왕은 자기 속마음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키미가 말을 이었다.

"이스트 웨이브 곡, 노을이가 잘 소화할 수 있을까요? 잇츠 쇼타임이 이스트 웨이브 곡 썼지만 잘 안됐잖아요!"

키미의 말에 천채왕도 기억나기 시작했다.

“아아, 그랬지. 곡에 먹혀버렸지. 워낙 유명한 프로듀서다 보니까, 이스트 웨이브의 곡을 잇츠쇼타임이 부르는 느낌이었지. 잇츠쇼타임의 노래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어. 심지어 한국 시장에서 통하는 노래도 아니었고."

키미가 신나게 그의 말을 거들었다.

“망했죠, 그 곡. 작곡비만 낭비하고. 노을이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니에요?"

천채왕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나는 아닐 거 같은데? 내가 아는 권노을은 그럴 애는 아니야.”

이상하리만치 천채왕은 권노을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가 곡을 주더라도, 왠지 권노을은 그 곡에서 자기만의 개성을 찾을 것 같았다.

이 생각은 어떤 근거에 비롯한 논리가 아니었다. 그저 느낌일 뿐이었다.

하지만 왠지, 천채왕에겐 이 느낌이 틀릴 것 같지 않았다.

권노을은, 그런 믿음을 주는 보컬리스트였다.

* * *

오늘은 앤젤의 TYB 첫 출근 하루 전날이었다.

내가 앤젤의 담당 매니저가 배정되기 전에, 미리 앤젤과 함께 회사 사옥을 한 바퀴 돌면서 그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 주기로 했다.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었다.

나와 배영웅 매니저는 30분 먼저 약속 장소인 TYB 사옥 1층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앤젤이 딱 맞춰서 걸어 들어왔다. 내가 장난스럽게 쏘아붙였다.

"야! 앤젤 왔냐! 신입이 빠져가지고 말이야.”

앤젤이 팍 짜증을 냈다.

"아, 뭐야! 벌써 텃세냐?"

나는 피식 웃으며 앤젤을 데리고 다니며 TYB 구석구석을 보여줬다.

유기농 음식으로 가득한 구내식당부터, 온갖 최신 운동기구로 가득한 체력단련실을 거쳐, 누구나 고급 녹음 장비와 악기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음악 연습실까지.

내가 시설을 보여줄 때마다 앤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그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소인중 대표는 이런 거 안 해줬어?"

"야, 말도 마! 그 새ㄲ… 그 친구(?)는 돈 되는 일만 열심이지, 이런 거 없었어. 막 라면에 김밥만 먹고 무대에 서고 그랬거든. 아니, 그런데 노래가 잘 될 리가 있냐?"

나는 어이없는 소인중의 행태에 할 말을 잃었다.

"허어…"

새삼 TYB를 선택한 내 안목에 감사했다. 물론 미래를 아는 회귀자였기에 잘못될 수는 없었지만.

한 바퀴를 다 돌자 지쳤는지 앤젤이 다시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앤젤이 커피를 쭈우욱 들이키더니,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야, 대기업, 대기업 하더니. 대형기획사가 좋긴 좋다, 야. 시설 다 더럽게 좋네. 내가 써도 될지 모르겠네."

"내일부터는 너도 소속인데 뭐. 계약은 다 했어?"

앤젤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했지, 뭐."

"천채왕 선생님이랑?"

내 물음에 앤젤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설마! 실장이란 사람이랑 했어. 너는 자주 보냐?"

“자주까진 아니지만..."

흐려지는 내 말끝을 타고 앤젤의 호들갑 떠는 소리가 올라왔다.

"나는 아직 끗발이 약해서 거기까진 안 된다, 야. 천채왕이면 가요계의 제왕이잖아!"

'나한테는 약간 동네 형 같은데. 건강 음식 빌런인...'

앤젤의 반응을 보며 나는 새삼 천채왕의 대단함이 느껴졌다.

일단 나는 주제를 바꾸었다.

“TYB에서는 솔로 가수로 활동하는 거야?"

"일단 그러려구. 사실 나, 노래를 좀 완성하고 싶그던. 그런 의미에서는 TYB가 좋지. 워낙 레슨 해주는 교사진이 빵빵하니까. 3개월 이내에 내가 너 능가하는 가수 된다."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앤젤을 지긋이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해볼 테면 해 봐라."

"짜식… 그냥 해본 말이지. 니를 내가 어떻게 이기냐? 사람 구실 하는 가수는 돼야지. 여튼, 카피 가수 말고.”

앤젤은 아직도 ‘킹 오브 싱어'에 출연해서 이스트 웨이브 심사위원에게 (나와 비교해) '카피 가수'라는 혹평을 받았던 흑역사를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잠깐, 이스트 웨이브?'

그러고 보니 이스트 웨이브에 대해서라면 앤젤에게 물어볼 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앤젤 너, 이스트 웨이브한테 곡 받은 적 있지?”

앤젤이 살짝 표정을 찌푸렸다.

"있지!"

"왜 인상을 구겨? 안 좋았어?"

내 물음에 앤젤의 얼굴이 더 찌그러졌다.

"왜 물어봐?"

"아, 나… 이번에 솔로 앨범 작업할 건데."

앤젤이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야, 축하한다. 야, 팀도 안 깨졌는데 벌써 솔로야? 완전 이거 미는 멤버구만?"

나는 얼떨떨해하며 답했다.

"아, 그래, 고마워. 여튼 그래서, 이번에 한 번 이스트 웨이브에게 곡 받아보려고.”

갑자기 앤젤이 다시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눈썹이 팔자 모양이 되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앤젤이 내게 물었다.

"꼭 그래야 하겠냐?"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앤젤에게 물었다.

"왜, 너... 이스트 웨이브랑 곡 작업하는 거 별로였어?”

"별로? 글쎄? 별로라면 별로고. 지옥이라면 지옥이고, 그랬지."

그렇게 말하고 앤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옥… 까지냐?"

"뭐, 이스트 웨이브가 나쁜 놈은 아냐. 다만..."

앤젤이 이스트 웨이브와의 작업기를 알려줬다.

처음에 이스트 웨이브는 원격으로 작업하려 했다.

하지만 이를 소인중이 만류했다.

소인중은 앤젤이 이스트 웨이브와 직접 만나서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나누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잇츠쇼타임 멤버들은 이스트 웨이브와의 미팅에 기대가 컸다.

그야 그럴 만했다. 이스트 웨이브는 현재 세계 최고의 작곡가였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뤄진 그와의 미팅은 너무도 달랐다.

만나자마자 잇츠쇼타임 멤버들은 이스트 웨이브의 페이스에 말렸다.

워낙 넘치는 에너지로 단호하게 딱딱 말을 끊으며 작업했다.

심지어 멜로디는 너무 러프해서 결국 한국 작곡가, 한국 작사가가 붙어서 죄다 마무리해줘야 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스트 웨이브의 곡을 너무 한국적으로 바꾸자 이렇게 바꾸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작업물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앤젤은 말했다.

나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앤젤에게 물었다.

"그럼, 그냥 파기하면 되는 거 아냐?”

"그 돈 주고 산 곡을 어떻게 파기해?"

나는 미간은 찡그리며 말했다.

"아니, 그럼… 타이틀곡에서 치워 버린다거나."

“이스트 웨이브 곡을? 그게 말이 되냐? 이미 방송부터 마케팅 전략까지 다 그거 생각하고 짰는데!"

나는 흥분한 앤젤을 다독이며 말끝을 흐렸다.

"아니 그래도 노래가 납득이 안 되면 엎어야지…"

앤젤의 경고가 뭔지는 알 것 같았다.

이스트 웨이브는 한국에서 뜰 노래를 작곡하는 작곡가가 아니었다.

그저 세계적인 작곡가일 뿐이었다.

즉, 이스트 웨이브의 곡은 한국으로서는 다소 용도가 달랐다.

거기다가 이스트 웨이브는 자존심도 셌다. 곡 수정도 잘해주지 않았다.

자신이 준 곡이 타이틀곡이 되지 않아도 문제가 되었다.

그는 유연하지도 않고, 쓸데없이 고압적이면서, 그렇다고 주는 노래가 한국 시장에서 히트할 곡도 아니었다.

앤젤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또 하나, 결정적으로 이스트 웨이브는 우리처럼 팝 음악을 듣는 사람이나 알지. 대중한테 유명한 가수는 아냐."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앤젤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좀 아니라 이거야. 잘 생각해봐. 괜히 곡 받았다가 부담스러워 지그던."

“일단 한 번 생각 해볼게."

* * *

오리엔테이션을 끝내고, 나는 바로 연습실로 향했다.

이번에는 내 노래 연습을 할 차례가 아니었다.

나는 그 대신 이스트 웨이브의 노래를 연습해보기로 했다.

다 아는 노래였지만, 노래를 불러보면 또 느낌이 다를 터였다.

"야, 이거 어려운데…”

이스트 웨이브의 노래는 내가 이제껏 불러왔던 노래와 아예 구도가 달랐다.

힙합 베이스에, 리듬도 훨씬 화려했다. 고음보다는 느낌으로 가는 노래가 많았다.

감성도 가요 감성이라기보다는 힙합 베이스의 팝 감성이었다.

확실히, 왜 앤젤이 이스트 웨이브 노래를 받지 말라는 건지는 이해가 됐다.

나는 연습을 하고, 하고 또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보컬리스트지, 래퍼가 아니었다.

내가 래퍼의 복잡한 리듬을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시간 정도 연습해도 제대로 부르기 어려웠다.

노래라면 무엇이든 자신이 있었는데, 멜로디가 섞인 랩이 되고 나니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쉬면서, MR 버전의 노래를 틀어놓았다.

'어, 이거 좋은데?’

워낙 좋은 사운드의 노래다 보니 MR 버전만 들어도 좋았다.

특히 후렴 부분에 멜로디가 기가 막혔다.

나는 가만히 그 곡을 듣다가... 후렴 부분이 되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이거였다.

나는 이스트 웨이브에게 제대로 된 곡을 받는 방법이 떠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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