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가평으로 가는 길이 슬슬 막히기 시작했다.
수도권이다 보니 금방 차량정체가 시작됐다.
자꾸 차가 멈추다 달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조수석의 문루아가 멀미를 시작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배영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죠? 루아 아티스트님 너무 힘들어하시는데..."
내가 적극적으로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의견을 제시했다.
"이럴 때는, 좋아하는 노래 듣고 그러면 좀 멀미가 낫지 않아요?"
배영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 그렇죠! 그럴 때가 있어요. 혹시 루아 아티스트님, 듣고 싶은 노래 있으세요?”
문루아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해변 이야기요...'라고 대답했다.
오창선이 우쿨렐레 반주에 맞춰 부른 잔잔한 여름휴가 노래였다.
문제는 지금이 2006년이란 것이었다. 아직 스트리밍 음원이 활성화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배영웅은 CD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필 아무도 '해변 이야기' MP3 파일이 없었다.
문루아 선배는 MP3를 챙기지 못했다고 했다.
배영웅 매니저가 씁쓸하게 말했다.
"아! 그 노래 들으면 딱 멀미가 한 방에 낫는데요. 아쉽네요..."
내가 슬쩍 환희를 봤다. 환희가 들고 있는 손가방에 살짝 우쿨렐레 손잡이가 보였다.
그걸 보고 나는 환희에게 물었다.
"그거 우쿨렐레냐?"
"네."
환희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연주돼?"
"코드만 잡을 줄 알아여."
"그럼 이거 잡아봐."
내가 '해변 이야기' 코드 진행을 환희에게 알려줬다.
환희도 이미 들어본 노래라 그런지 금방 감을 익히고 멋들어지게 연주했다.
간단한 코드 진행이 반복되는 곡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운전하면서 연주를 듣고 있던 배영웅 매니저도 '오~'하고 감탄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 곡, 내가 카피 곡으로 열심히 연습했던 곡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가창력 위주의 고음 가수다 보니 노래가 너무 무거워지기 쉬웠다.
그래서 비슷한 가창력 위주의 보컬리스트 오창선 선배가 부른 가벼운 휴가 노래인 '해변 이야기' 연습을 자주 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내가 환희에게 신호를 줬다.
환희가 시작한 연주에 맞춰 내가 노래를 시작했다.
이 바다가 너를 부르고 있어
시원한 바람
잠기는 파도
모두 다 네 것이야
너와 함께
노래를 부르다 보니 신기하게도 점점 모두가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 * *
너와 함께
노래를 따라부르기를 반복하자 어느새 문루아가 두통을 잊은 채,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힘이 넘쳐 보였다.
문루아가 내게 눈을 반짝이며 앙코르 요청을 했다.
"한 번 더 불러줘요!"
그 모습을 보던 재호랑 환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고 있자니 뭔가 불안했다.
* * *
가평에서 우리는 하염없이 숲을 걸었다.
바다보다는 정적이었지만 수목원과 숲을 산책하는 일도 새로운 충전이 되었다.
그 어떤 음악보다 새소리와 풀숲을 스치는 자연의 소리가 더 내게 영감을 주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풍경으로 감성을 충전한 다음에, 우리는 카페로 갔다.
카페에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가 하나씩 다른 커피를 마셨다.
재호가 커피를 마시지 않는 문루아만 나와 함께 빙수를 먹으라고 강력히 권했다.
내가 인상은 찌푸리며 그에게 항의했다.
"아, 왜? 나도 커피 마실래."
재호가 토를 달았다.
"루아 선배가 이걸 혼자 다 먹겠냐? 그러겠냐구. 반은 넘게 남겨야 해. 네가 다 먹어. 너는 커피도 별로 안 좋아하잖아."
문루아는 말이 없었다.
같이 빙수를 먹으면서 문루아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얼마나 빨간지 딸기 빙수 색깔이 되어버렸다.
재호랑 환희는 자꾸 킥킥대면서 나를 쳐다봤다.
'왜 다들 나만 쳐다보는 거야?'
* * *
저녁은 미리 건물째로 빌린 빌라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고기와 채소 위주로 이뤄져 있었다.
맛있으면서도 식단 관리를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고기를 먹어서 배가 슬슬 불러오자 배영웅 매니저가 준비한 와인과 치즈, 토마토 샐러드를 가져왔다.
배영웅 매니저에게 내가 말했다.
"실장님도 쉬세요. 일 같잖아요."
내 말에 배영웅 매니저가 씨익 웃었다.
"아, 오늘은 제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스케줄 관리하거나 하지 않잖아요!"
"네에."
안주와 와인이 깔리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대화 주제는 우리에게 가장 큰 화제인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였다.
그럴 법했다. 세계적인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기회가 느닷없이 온 셈이었다.
재호랑 환희는 온종일 글로벌 비전 생각뿐이었다.
내가 문루아에게 물었다.
"선배는 글로벌 비전 콘테스트 잘 아세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잘은 몰라요. 제가 데뷔한 2천 즈음부터는 이미 좀 관심이 줄기도 했고, 데뷔 때 저는 댄스 가수였으니까요."
배영웅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글로벌 비전은 밴드 음악이나 팝 위주죠. 댄스음악 가수가 우승한 적도 있긴 한데.”
문루아가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솔직히, 한국 가수가 글로벌 비전에 출전할 수 있다니, 상상도 못 했어요. 일본 가수만 구색 갖추기로 들어간 게 전부였는데. 그나마도 준결승에서 다 떨어졌다고요."
글로벌 비전을 본 적이 없던 내게는 다 새로운 이야기였다.
“그랬군요… 저도 몰랐네요."
배영웅이 우리를 바라보며 지그시 와인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근무 시간에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 배영웅이었다.
지금이 그에게는 휴식시간과 같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고기를 굽고 식사 준비를 하는 건 비원더 3인이 도맡아 했다.
배영웅이 피식 웃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비원더는 참 대단한 거 같아요."
나는 뜬금없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무슨 뜻이시죠?"
"쉴 때도 음악 생각뿐이잖아요. 20대 초반인데. 연애 이야기도 하고, 술 이야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게다가 그런 놀림거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배영웅 매니저의 말에 재호랑 환희가 푸후훗! 하고 웃었다.
나는 도통 모르는 이야기였다.
웃음을 진정시키고 재호가 말했다.
"글로벌 비전 보니까, 예선이 데모 테이프더라고요?"
배영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저도 들었어요."
재호는 넌더리를 내며 말했다.
"데모 테이프 단 한 곡으로 각국의 음악 전문가들이 심사한다니. 진짜 너무 잔혹한 거 같아요. 어떻게 한 곡으로 본인 음악을 모두 보여줘요? 머리가 부서질 거 같은데요."
프로듀서이자, 편곡 덕후인 재호다운 고민이었다.
환희도 거기에 맞장구치며 한 마디 얹었다.
"저도 고민이에여. 대체 무슨 가사를 써야 할지! 글로벌 비전은 대개 영어 가사를 쓰더라구여. 우리도 그래야 하는 건지. 근데 동양 가수가 영어 가사를 쓴들 뭐가 될까여? 일본 가수들은 죄다 그렇게 하긴 하던데."
세계대회는 처음이다 보니 별의별 고민이 다 들었다.
가사는 한글을 써야 하는 건지, 쓰면 얼마큼 써야 하는 건지, 장르는 무엇으로 해야 하는 건지 등등 끝도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막했다.
걱정 가득한 우리의 침묵을 깬 건 배영웅 매니저였다.
"자자, 내일은 천채왕 선생님이 잠시 들르실 거예요. 그때 고민 이야기를 해보시죠."
그 소식을 들은 우리는 깜짝 놀랐다. 나는 배영웅 매니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이요? 왜요?"
배영웅 매니저는 화알짝 웃으며 답했다.
"최초로 글로벌 비전에 도전할 TYB 가수가 될 비원더 격려차 방문하시겠다 합니다. 휴가는 사실 오늘까지 거든요! 어차피.”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내일이면 약속한 한 달의 휴가가 끝났다.
문제는 우린 그 이후의 일정에 대해서 전혀 받은 연락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왜 천채왕이 내일 오려고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내일부터 바로 활동 이야기를 하시려는 거군요?"
내 물음에 배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 우아하게 들린 와인잔이 찰랑거렸다.
"비슷해요. 자! 일 이야기는 내일 할 거니까! 오늘은 좀 재미있게 해보죠. 어떻게 비원더는 맨날 일 얘기만 해요? 제가 맨날 레크레이션 MC 역할을 해야 하잖아요."
배영웅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매뉴얼을 꺼냈다.
'팀 단위 레크레이션' 매뉴얼이었다.
TYB에서 팀 단위 워크샵을 갈 때마다 단합을 위해 다양한 게임을 개발했고, 이를 메뉴화해서 매니저마다 게임을 할 수 있게 준비했다.
이전에 우리가 겪었던 배영웅의 기상천외한 게임들이 다 여기서 나왔다.
배영웅이 엄하게 매뉴얼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신의 신탁을 읽는 사제와 같은 진지함이었다.
"이번에 진행할 게임은 '사랑해' 게임입니다."
...근데 그렇게 진지하게 하는 내용이 이따위(?)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사랑해 게임'의 규칙은 간단했다.
둘러앉아서 본인 옆의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말한다.
상대편은 '나도 사랑해'라고 대답하고 다른 곳으로 넘길 수 있었고 '꺼져'라고 말해서 반사할 수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패자였다.
환희가 부루퉁한 얼굴로 이 게임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루아 선배가 너무 유리한 거 아녜여? 포커페이스 그 자체 자나여."
환희의 말이 사실이었다. 문루아는 표정 연기의 달인이었다.
하기야 댄스 가수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녀는 평소에도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서 이번 게임에는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보였다.
배영웅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했다.
"그럴까요? 지금 앉은 상태로 보면… 아닐 거 같은데요?"
문루아의 오른쪽에는 환희가, 왼쪽에는 내가 있었다.
재호랑 환희가 갑자기 눈빛이 바뀌며 재미있겠다면서 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환희와 문루아의 대결이 시작됐다.
환희가 “사랑해"라고 하면 문루아 선배가 "꺼져"라고 답했다.
"사랑해~."
"꺼져~."
“사랑해!"
“꺼져!"
...둘의 랠리가 계속 반복되니, 걷잡을 수 없었다.
결국 지친 문루아가 '나도 사랑해'라고 대답하고는 나에게 돌아서서 눈을 쳐다보고 말했다.
"사랑해."
그 말을 하는 문루아는 정말… 눈이 깊었다.
다른 사람보다도 훨씬 더 검은 눈동자라는 느낌이었다.
그 큰 눈이 작은 얼굴에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차근차근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꾸욱 참고,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묘수를 날렸다.
"꺼져."
"푸하하하하하하!!"
문루아가 못 참고 웃어 버렸다.
환희랑 한참 대결하면서 들었던 말을 다시 나한테 들으니 웃음보가 터진 느낌이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다음부터는 내가 답만 하면 문루아가 웃기 시작했다.
"꺼져."
"푸하하하하!"
...문제는, 문루아가 금주 중이라는 거였다.
"저 지금, 술 못 마시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문루아를 위해 재호랑 환희가 합심해서 나를 흑기사로 몰아갔다.
재호는 이럴 때는 정말 청산유수의 달변가였다.
"야, 어쩔 수 없다 노을이가 마셔야겠네? 그지? 제일 친하구우~. 바로 옆이구. 술도 쎄구우~. 어쩔 수 없잖에."
내가 재호를 째려보며 쏘아붙였다.
"야! 너 취했어."
재호가 능글맞게 웃었다.
"나 안 취했그덩? 내가 얼마나 술이 센 줄 알어? 이제 시작이야. 술이 들어간다, 쭉~! 쭉! 쭉 쭉!"
"너 원래 이런 타입이었냐..."
확실히 레크레이션이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같이 술을 마시면서 게임을 하다 보니 전혀 모르던 면이 보였다.
의외로 게임에서는 허술한 문루아 선배의 모습이라던가, 의외로 술자리서는 짓궂은 재호의 모습 같은 부분은 원래는 아무리 오래 봤어도 몰랐을 부분이었다.
“그래, 나 줘!"
...그래서 나는 게임은 전승인데, 벌주는 죄다 내가 먹는, 이겼는데 이긴 거 같지 않은 찜찜한 결과를 맞이했다.
* * *
“...지금 몇 시지?"
어느 순간 필름이 끊긴 모양이었다. 일어나 보니 무려 12시였다.
가수 생활을 시작하고 가장 심하게 늦잠을 잤다. 엄청난 숙취가 몰려왔다.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마셨는지 아직도 거실에서 자는 중이었다.
문루아 선배만 소파에서 자고 있었고 나머지는 바닥이나 의자에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었다.
천채왕이 하와이안 셔츠에 반바지, 선글라스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표정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걸었다.
"야, 뭐냐? 너 술 냄새가 확 진동하는데?”
"아이고 죄송합니다, 들어오세요."
거실에 천채왕이 들어왔다.
널브러진 재호, 환희, 배영웅 매니저, 그리고 문루아를 보더니 천채왕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다른 애들은 그렇다 치고 루아나 배 실장까지? 나도 이런 건 첨 본다, 야. 진짜 친해졌나 봐?”
"네, 뭐어…"
"가끔은 괜찮겠지. 앉아, 앉아. 커피나 한잔할까?"
"제가 타겠습니다."
나서는 나를 만류하며 천채왕이 말했다.
"앉아있어. 나는 내가 탄 것만 먹어."
천채왕의 위압감 넘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식탁에 앉았다.
천채왕은 능숙하게 커피를 갈더니 와인 디캔딩을 하듯 섬세하게 커피를 내려왔다.
과연, 일반 커피보다 훨씬 맛있었다.
천채왕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맛있지?"
"네, 정말 맛있네요."
“이 정도 대접은 해야지, 우리 스타한테."
"네?"
천채왕이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 이뻐 죽겠네! 이놈 자식, 어디서 이런 보물이 왔냐?"
갑자기 불안하게 천채왕이 내게 왜 이러나 싶어진 나는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