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이스트 웨이브의 제안은 간단했다.
세계 최대의 오디션 프로인 '글로벌 비전' 아시아 지역 예선에 참가해보면 어떻겠냐는 말이었다.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 줄여서 '글로벌 비전'이라 불리는 이 대회는 세계 최대의 음악 축제였다.
내가 참여했던 '슈퍼스타 T’하고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슈퍼스타 T는 신인을 위한 등용문이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아마추어의 무대였다.
이에 반해 '글로벌 비전'은 아예 차원이 달랐다. 당연히 프로 가수들이 등장했다.
전 세계의 방송사들이 합심하여 세계인들이 음악을 교류하는 축제의 장을 만들자는 의도로 시작된 대회였다.
우승자 중 수많은 가수가 이 오디션을 통해 세계 최고의 가수로 발돋움했다.
역사만 해도 1950년대부터 거의 50년이 다 되어가는, 엄청난 의미의 대회였다.
하지만 이 대회는 어디까지나 서양권의 축제였었다.
대부분의 우승자는 유럽권, 혹은 북미나 호주 등지에서 나왔다.
아시아 국가는 거의 구색 갖추기식으로 참가하는 것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한국 가수는 출전한 적도 없던 걸로 기억했다.
사실 세계 음악 시장에서 아시아는 일본 정도만 대접받던 시절이었다.
모두 한국과 같은 음악 약소국에는 무관심했다.
그 높고 두꺼운 벽이 이번에 깨졌다고 이스트 웨이브가 재호에게 귀띔을 해줬다.
한국의 음악이 순식간에 주목받자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 주최 측에서 한국 대표를 선발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했다.
이스트 웨이브는 그 선발 과정에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참석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재호가 엄숙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이건 정말 엄청난 기회야. 수많은 글로벌 스타들이 이 대회 출신이라구. 특히… 미국 출신이 아닌데 세계적인 가수다? 거의 다 여기 출신이야! 거기에 참석해보라고 권유받은 거라구.
나는 흥분한 재호에게 차분한 톤으로 답했다.
"대단하네."
-목숨 걸고 해보자, 우리, 진짜. 우승은 무리라도, 세계인들에게 제대로 우리 노래를 보여 주자구.
재호가 이렇게 불타오르기는 처음이었다.
“야, 너 되게 불타오르네. 이런 캐릭터였냐?”
-흥분이 안 되냐? 머나먼 해외 시장이 먼저 자기 발로 우리한테 찾아오는데. 한 번 제대로 해봐야지. 이런 기회 인생에 몇 번 안 오거덩?
내가 달래듯 재호에게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열심히 준비하면 되지. 선생님께는 말씀드렸어?"
-당연히 했지.
"뭐라셔?"
다시 재호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하늘을 뚫을 기세로 높아졌다.
-엄청 흥분하지 당연히! 너처럼 뜨뜻미지근하지 않다구! 하여간 웃긴 놈이네.
나는 적당히 말을 마무리하고 통화를 끊었다.
'짜식...'
재호에게는 내가 왜 시큰둥한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시큰둥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게 원래 내 계획이라서였다.
나는 이미 세계 최고의 가수가 될 계획을 세워 두었다.
처음 회귀했을 때부터 월드 스타가 내 일관된 목표였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것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했다.
내 노래를 알릴 창구도 있어야 했고, 해외에서 내가 먹힐 수 있도록 다양한 상품성을 개발해야 했다.
그래서 MP3의 도움을 받아 아득바득 매일 다양한 외국어를 공부하고, 몸을 단련하고, 문루아 선배에게 해외 진출 노하우를 알아보는 등의 행동을 했다.
그렇게 준비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 해외 진출을 위한 몇 가지 시나리오가 생겼다.
그 경우의 수 중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 바로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였다.
재호의 말대로, 역사상 영미권 출신이 아닌 팝 가수 대부분이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나왔다.
물론 너튜브가 대세가 되어 케이팝 가수가 세계를 휩쓸기 전의 이야기였다.
한국에서 글로벌 비전에 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제 발로 글로벌 비전이 굴러들어왔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이제는 어떻게 이 대회를 우승할지, 그것만 고민하면 됐다.
* * *
오랜만에 내 집에 왔다. 근 한 달 만이었다.
내가 온다고 하자, 마침 여름방학을 시작한 동생이 나를 보러 귀가했다.
백만 년 만에 동생과의 저녁 시간이었다.
우린 언제나처럼 탁자에 앉아 음악방송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방송 화면을 응시한 채 동생이 내게 물었다.
"저녁 뭐 먹을 거야, 뭐 해줄까?"
"야, 됐어. 요리도 못하는 게. 이미 피자 시켰어."
내 말에 발끈한 동생이 언성을 높였다.
"피! 뭐야 너보다는 잘한다. 피자 같은 거 먹어도 돼?"
"가끔은 괜찮아."
내 체중 관리는 잘 되고 있었다.
동생은 나를 걱정스러운 듯 한참을 쳐다보더니, 이내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침 '잇츠쇼타임'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동생이 내게 물었다.
"오빠네는 활동 안 해?"
“쟤네가 이상한 거지. 우리처럼 활동 4~5개월 하면 조금 쉬는 게 맞는 거 같아."
동생이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잇츠쇼타임은 쉴 틈 없이 계속 활동하니까 뭐가 되는 거 같은데. 비원더는 안 하니까, 걱정되지 않아?"
"야, 괜찮아. 그런 거 없어… 이제는."
여동생이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얼마 전까지 비원더와 잇츠쇼타임은 철천지원수인 라이벌이었다.
가수들과 회사는 물론, 심지어 팬들까지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동생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잇츠쇼타임에 대한 억하심정은 이제 없었다.
일단 멤버들은 그들도 피해자라 생각했다.
심지어 나는 잇츠쇼타임의 리더이자 메인보컬인 앤젤과는 친구가 되기도 했다.
소인중은 역시나 아직도 거슬렸지만, 괜찮았다.
이미 손을 써 두었으니 말이었다.
곧 있으면 소인중의 시대는 막이 내릴 예정이었다.
그러니 나는 여유롭게 잇츠쇼타임의 무대를 지켜볼 수 있었다.
'동생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지켜보는 것도 좀… 재미있는데?'
나는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물을 마셨다.
그러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제안이 생각났다.
동생을 툭 치며 내가 말을 걸었다.
“야.”
"왜?"
"쟤 앤젤이랑 나, 친구야."
여동생이 나를 얼빠진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녀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더니 동생은 한숨을 푹 쉬면서 말을 토해냈다.
"지이랄하지 마."
"진짜야. 내기할래?"
"뭘 내기해?"
나는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바로 여기, 오늘 밤에, 앤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어쩔래?"
"그 사람이 여길 왜 와!"
다짜고짜 소리를 꽤액 질러대는 동생을 나는 차분하게 바라봤다.
"친구니까. 너만 괜찮으면 오라고 할 수 있지. 일본 숙소에는 한두 번 왔었어."
동생은 '이 인간이 지금 날 놀리는 건가?' 하는 듯한 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를 팍 질렀다.
"해! 안 오기만 해봐."
"그래."
나는 핸드폰을 일부러 동생 보이게 들고, 문자를 앤젤에게 남겼다.
오늘 시간 되면 집에 놀러 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미 나는 오늘이 앤젤의 쉬는 날임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요즘은 소인중 말을 잘 안 듣는 앤젤은 거의 단체 활동 말고는 휴업 상태였다.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탁자에 탁, 하는 소리를 일부러 내며 내려놓았다.
그걸 지켜보던 동생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다 우리 둘 다 다시 TV 화면에 시선을 돌렸다.
잇츠쇼타임 노래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갔기 때문이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립싱크인 게 아쉽네.”
동생이 고개를 획 돌려 내게 물었다.
"뭐야, 저거 립싱크야?"
"딱 봐도 립싱크잖아."
내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동생은 입술을 삐죽이며 눈썹을 찡그렸다.
"난 모르겠는데. 입 너무 잘 맞아."
“아냐, 립싱크야. 미묘하게 입이 안 맞잖아."
동생은 내 말을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런가아~?"
나는 슬쩍 티브이를 봤다. 아직도 잇츠쇼타임은 립싱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었다. 앤젤의 표정이었다.
앤젤은 상당히 밝아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거치적거리던 모래주머니를 벗어던진 사람과 같은 편한 표정이었다.
분명 앤젤에게 뭔가 있었다.
* * *
음악방송이 끝나고, 피자가 올 때쯤 앤젤이 내 집에 정말로 왔다.
내가 반갑게 앤젤을 맞이했다.
"일찍 왔네."
앤젤은 신발을 툭툭 벗어 던지며 말했다.
"마침 근처였어.”
"또 술 때렸냐?"
내가 핀잔주듯 말하자, 앤젤이 피식 웃으며 응했다.
"아니! LP 모으고 있었지. 자, 옛다! 선물이다."
앤젤이 귤 한 상자를 내게 줬다. 뜻밖에도 예의 바른 놈이었다.
"너, 이런 캐릭터였냐?”
"남의 집 오면 과일 정돈 당연하지. 아! 가족분이시구나. 반가워요, 앤젤입니다.”
여동생은 연예인이, 그것도 오빠의 적이자 라이벌이라 생각한 가수가 자기 집에 불쑥 들어오자, 놀란 듯 입을 가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할 뿐이었다.
그 덕에 대화는 내가 이어가야 했다.
"자, 자, 일단 들어와. 피자 먹어도 되지?"
"아, 되지이~. 난 식단 같은 거 안 해. 귀찮그던! 그거 따지다 보면 맹물하고 설렁탕밖에 못 먹어."
그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피자를 집어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잇츠쇼타임 신곡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먼저 앤젤에게 물었다.
"너 표정 좋던데? 이제 립싱크를 받아들인 모양이야?"
“좋게 받아들이려고."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앤젤에게 나는 물었다.
"어떻게 좋게? 목을 쉬게 하나?"
"아이~ 그게 아니고. 내가 지금 좀 창법을 바꾸고 있그던! 근데 아직 바꾸는 도중이니까 좀 완성도가 떨어지잖애. 그 기간 좀 버티게 해준다, 하고 있지."
"어떻게 부르는데?"
앤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말했다.
"비웃지 마라."
그리고는 앤젤은 자신의 신곡인 ‘잠 못 이루는 밤'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전까지와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날카로운 고음 테크닉 위주의 보컬이던 앤젤이 고음을 버리고, 대신 찐득한 감성과 독특한 음색으로 승부했다.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다크한 분위기의 노래라 나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건 앤젤이었다.
"으떠냐?"
나와 여동생은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봤다.
동생도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뭔가 아직 미완성이지만 은근히 독특하고 괜찮다'라는 감상이었다.
여동생은 말 대신 박수 후 엄지 척으로 화답했다. 내가 대답했다.
"이전하고 전혀 다른데!"
"당연히 다르지. 네 말대로 벽돌 하나까지 다시 깔고 있으니까. 평소에는 걍 여기서 고음 탁! 치면 편한데. 그러지 말라고 하니까, 마악 고민을 하는 거야. 여길 어떻게 부를!”
그의 말을 끊으며 내가 물었다.
"그러다 보니까 이런 게 나오는 거냐?"
“그래.”
"뭐, 아직 완성도는 떨어지긴 하는데, 곧 한 곡 완곡할 정도 될 거 같은데!"
나는 앤젤을 격려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빨리 그때가 왔으면 좋겠다. 아오… 답답해! 완성이 안 되니까."
"그래 뭐, 완성하고. 지난번에 말한 거, 그거 했냐?"
내가 눈짓으로 여동생에게 방으로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동생은 눈치를 채고 바로 자리를 비켜줬다.
"저! 내일 일찍 가봐야 해서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팬이에요~.”
앤젤도 뜻밖에 넉살 좋게 내 동생의 말을 받아줬다.
"아유, 고마워요. 사인이라도 해드릴까요?"
“좋죠!"
앤젤의 사인을 받은 후 나는 동생이 방으로 들어간 걸 확인하고 앤젤에게 다시 말을 시작했다.
“여튼 말이야, 농담이 아니라 진짜 어떻게 됐어? 매니저는 있냐?"
"아… 한 명 있긴 한데. 야, 그게 그렇게 쉽게 말이 되디? 회사 잘려도 나랑 같이하자는 그런 말을 어떻게…”
나는 우물쭈물하는 앤젤이 답답한 나머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어떻게든 술을 먹든! 도원결의를 하든! 빨리해라. 구명보트 만들어 놔. 노래도 빨리 완성하고. 혼자 솔로 가수 할 수 있게, 알았어?"
그 소릴 들은 앤젤도 욱해서 덩달아 버럭 소리 질렀다.
"아아, 씨! 알았어! 뭐 이렇게 잔소리질이야. 네가 엄마냐? 어차피 이 회사 8년은 다닐 건데, 뭐가 그리 급해에~?"
다음 날, 이런 헤드라인의 기사가 9시 뉴스 메인을 장식했다.
[소인중 구속! 마약 관련 법 어겨. 해외에서 체포돼. 국가적인 문제 될 수도.]
‘거 봐라.'
(다음 편에서 계속)